소설리스트

힐러, 의선되다-367화 (367/470)

제367화

367화

그것은 대단한 불균형이었다.

그동안 아진이 당연하게 차지해 왔던 자리와도 달랐다.

이제는 그가 돌봄과 도움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여기저기에서 내밀어지는 손길을 마주 잡으며 그의 가슴도 어느덧 뜨거워졌다.

너는 절대 혼자가 아니라는 듯이, 북리의천이 아진을 바라보고 웃음을 지었다.

소청도, 독고소영도, 랑랑마저도.

위도는 하유란의 손을 꼭 잡았다.

그녀는 그동안 위도에게서 그런 이야기를 직접 듣지는 못했지만 왠지 이제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제 괜찮아. 이제 겁나지 않아.”

위도의 말에 하유란은 그의 손을 굳게 잡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 * *

“랑랑. 독각화망이 네 말을 듣는다던데? 그게 정말이냐?”

“네. 맞아요. 화망이는 제 친구인데 제가 부탁하는 건 들어줘요.”

사람들은 말로만 들었던 독각화망이 어린 랑랑의 옆을 얌전히 따라다니는 것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독각화망의 뿔에는 알록달록한 비단이 예쁘게 묶여 있었다.

북리소은은 랑랑의 옷을 만들고 남은 자투리 천으로 아예 독각화망 전용의 머리끈을 만들어 주었고 랑랑과 독각화망은 색깔을 맞춰 함께 꾸미고 다녔다.

그러나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그렇다고 해서 독각화망을 우습게 보다가는 화를 피할 수가 없었다.

독각화망의 독아에서 분사되는 독에 바위와 나무가 녹아내리는 것을 본 사람들은 과연 독각화망이라며 놀라기 일쑤였고 랑랑은 독각화망과 짝을 이룬 채 한 사람 몫을 넉넉히 해 나갔다.

“랑랑아. 싸움이 시작되거든 잘 부탁하겠다.”

“나도 도와줘야 한다. 랑랑이 옆에만 있으면 겁낼 게 없을 것 같구나.”

강호의 고수들이 하는 말에 랑랑은 벅찬 감격을 느꼈다.

실제로 싸움이 벌어지고 나면 양상이 전혀 달라지겠지만 랑랑은 독각화망을 바라보며 결연하게 눈을 빛냈다.

“화망아. 잘할 수 있지? 우리를 믿는 분들이 저렇게 많이 계셔.”

그러면 독각화망도 예리하게 눈을 빛냈다.

이번에야말로 자신의 진면목을 발휘하려는 듯 결의가 대단해 보였다.

* * *

하늘을 바라보는 벽예월의 곁으로 한 사람이 다가갔다.

그녀는 옆을 돌아보지 않고 자신의 곁으로 다가온 사람이 하유란임을 알아차렸다.

하유란은 벽예월의 곁에 가까이 다가가 함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렇게 하늘을 보면 하늘이 이야기를 들려주나요? 하늘만 보고 있으려면 지루하지 않으세요?”

“네.”

벽예월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녀는 오직 하늘만을 보고 있었다.

“벽 소저는 참 이상해요. 이렇게 젊고 아름다운데 하늘만 들여다보면서 사는 건 억울하지 않은가요? 다른 사람들처럼 재미있게 살면 좋을 텐데. 서 공자님을 좋아하지 않으세요? 서 공자님에게 말해 보지 그러세요? 제가 말해 볼까요? 서 공자님을 좋아하시죠?”

벽예월은 여전히 웃음을 짓기만 했다.

하유란은 답답했지만 그래도 참았다.

원래 대화가 어려운 사람인가 보다고 생각하면서.

“이번 일에 소저의 공이 컸다고 들었어요. 예언을 했다고 하더군요. 그걸 몰랐다면 상공은 앞일을 대비하지도 못했을 거예요. 무슨 일을 당하는지도 모르고 죽었겠죠. 나와 내 아이는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도 모르고 망연자실했을 테고요.”

“그런가요?”

“그게 무슨 말이죠?”

하유란이 벽예월에게 물었지만 그녀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하유란은 벽예월이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뭐가 보인다고 그러는 걸까.

그러다가 하유란은 다시 벽예월에게 말했다.

“벽 소저. 서 공자님에게 마음을 말해 봐요. 고백해요. 서 공자님도 벽 소저가 싫지 않을 거예요. 지금까지 서 공자님이 따로 만나는 사람도 없잖아요. 그게 무슨 뜻이겠어요? 서 공자님도 벽 소저를 마음에 두고 있는 거예요.”

벽예월은 하유란을 한 번 바라보고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그 시간은 지극히 짧았고 벽예월의 시선은 다시 하늘을 향했다.

하유란은 기분이 나빠졌다.

“벽 소저도 이제 적은 나이가 아닌데. 그러다가 혼인을 할 수는 있겠나요? 한 해 한 해 달라지지 않아요? 처음에는 산본에 사는 남자들이 벽 소저 때문에 가슴앓이를 하면서 산본의가 앞에서 진을 쳤다던데.”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요. 상관도 없고요.”

“그런데 그거 말이에요. 나는 그 얘기를 믿지 않는데 그래도 사람들이 워낙 그 문제를 가지고 떠들어 대서 말하는 건데. 혹시 그게 사실이에요? 서 공자와 이린 아가씨가 서로 연모한다는 얘기 말이에요. 에이. 거짓말이죠? 두 사람은 남매잖아요. 아니. 나도 그 얘기는 들었어요. 서 공자님이 가주님과 가모님의 친자식이 아니라는 것 말이에요.”

벽예월의 얼굴에는 계속 웃음이 지어졌는데 하유란은 이제 그 웃음의 의미를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자꾸 웃는 걸까.

기분 나쁘게.

자기가 얘기를 하고 있는데 제대로 바라보지도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건가?

하유란은 그런 마음이 드는 것을 애써 눌렀다.

“어쨌거나 두 사람이 피가 섞이지 않았다고 해도 그건 사실이잖아요. 두 사람이 남매라는 것 말이에요. 너무 더럽지 않은가요? 남매로 자라온 사람들이 서로를 연모하다니 말이에요. 그런 일이 일어나게 해서는 안 돼요. 만일 그렇게 되면 사람들이 산본의가를 뭐라고 생각하겠어요? 모두 손가락질을 할 거예요.”

“하늘이 나에게 무슨 얘기를 하는지 겁이 나나요?”

벽예월의 말에 하유란은 멍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하늘이 어디까지 알려 주는지. 천기를 어디까지 들려주는지 궁금해서 지금 여기에 있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이에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나는 그냥 벽 소저가 밤마다 하는 일도 없이 여기에 나와서 하늘을 보고 서 있는 게 불쌍해 보여서 말벗이라도 돼 주려고 여기에 있는 거예요.”

“그렇게 말하신다면 얘기해 줄게요. 하 표사님. 하늘은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답니다. 그리고 위 대협이 피를 흘리는 것도 보여줬어요.”

하유란의 눈가에 싸늘한 웃음이 맺혔다.

조롱하는 것 같은 웃음이었다.

“우리가 위 대협이라고 부르는 게 우스운 모양이에요. 그렇기는 할 거예요. 위 대협의 이름은 조 위도고 위 대협이라는 호칭은 맞지 않으니까요.”

벽예월은 점점 더 놀라운 말을 하고 있었다.

“그게…….”

하유란은 설마 하는 얼굴로 벽예월을 바라보았다.

“그곳에서 건너온 그 사람이 위 대협의 곁에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얼마나 가까이에 있는지, 그게 누구인지는 알지 못했어요. 그것도 알려 줄까요? 이번에 위 대협을 공격하게 되는 사람은 한 사람이에요. 한 사람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지요.”

벽예월이 하늘을 바라보던 시선을 내려 하유란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사람은.”

“닥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벽예월. 청승맞은 짓은 그만하고 그냥 입을 다물라는 말이다. 하늘이 희한한 짓을 한 모양이구나. 그런 이야기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이 좋았을 텐데. 밤하늘이나 보고 있으니 이런 일을 당하는 거지. 생각보다 머리가 좋은 편은 아닌 것 같군.”

“그 말이 맞습니다. 나는 머리가 좋은 사람이 아니에요.”

벽예월이 웃었다.

하유란은 지금 이 순간 벽예월이 웃는 것만큼 싫은 게 없었다.

“그게 나라는 걸 알았으면 끝까지 입을 다무는 것이 좋지 않았겠느냐.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말을 할 것이지. 아. 그래 봤자 네가 하는 말을 믿어 주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아서 할 수가 없던 건가?”

하유란의 얼굴에 자신만만한 표정이 번졌다.

위도도, 아진도 자신의 앞에서 꼼짝 못 할 거라는 사실이 마음에 들었다.

지금의 그녀는 모두의 동정을 받고 있었다.

사악한 사람들의 목표가 돼서 죽음이 예정되어 있는 위도의 아내.

그녀를 보는 사람들은 누구건 하유란을 위로하지 못해 안달이었다.

“내가 너를 살려 둘 수 없는 이유는 충분히 알 거라고 생각하는데 이제부터 나한테 협조를 하면 어떨까? 이런 곳에서 죽이고 싶지는 않은데.”

“다른 곳으로 가야 하는 이유는 뭔가. 하유란.”

그 목소리는 그들이 서 있는 곳의 뒤쪽에서 들렸다.

하유란이 깜짝 놀라며 벽예월을 향해 검을 빼 들려 하는 순간 거센 바람이 그녀의 몸을 날렸다.

하유란은 균형을 잡지도 못한 채 바닥을 나뒹굴었고 검은 검집과 함께 멀리 던져져서 혼자 굴렀다.

그런 돌풍이 갑자기 불어온 이유를 깨닫고 하유란은 경악했다.

언제, 어디에서 그들이 나타났다는 것인가.

하유란은 내내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갑자기 허망하게 실수해 버리고 싶지 않아서 계속 주위의 기척을 살피고 있었다.

벽예월이 무엇을 아는지 알아낸 후에 조용히 그곳을 떠날 생각이었지 일을 크게 만들 생각도 아니었다.

어차피 벽예월은 그녀에게 무서운 상대도 아니었다.

건너온 자가 둘이라는 말에서 이미 하유란은 벽예월을 믿지 않고 있었다.

엉터리 천문관.

천기를 제대로 읽을 줄도 모르는 돌팔이.

하유란은 속으로 잔뜩 벽예월을 비웃고 있었다.

S급 헌터가 되고 판에 박힌 것처럼 똑같이 펼쳐지는 일상을 살던 그녀에게 어느 날 나타난 상태 창은 그녀의 인생을 뒤흔들었다.

[무림으로 이동하시겠습니까?]

그녀는 웃었다.

그런 곳으로 갈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산드라 레이첼.

그녀에게는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그리고 사람들이 성공 요소로 꼽는 모든 것이 있었다.

그런 삶을 포기하고 무림으로 이동할 이유가 뭐가 있다는 말인가.

그녀는 실소를 흘리면서 거절했다.

그러자 또 다른 상태 창이 나타났다.

[살행에 성공하면 당신이 소유한 것을 모두 가진 채 당신이 원하는 시점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의미를 충분히 음미할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에 다시 그 질문이 떠올랐다.

[무림으로 이동하시겠습니까?]

모든 것을 가졌지만 젊음만은 사라졌다.

레이드의 기교는 늘었지만 체력은 전과 같지 않았다.

얼굴의 주름은 외면한다고 사라지지 않았고 목소리마저 탄력을 잃어 가고 있었다.

가진 것이 많다 보니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줄어드는 것이 그렇게 안타까울 수가 없었다.

버러지 같은 자들에게 그 찬란한 젊음이 주어진 것을 보면 속이 쓰리고 화가 났다.

그때 나타난 상태 창은 그녀를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살행? 누구를 죽이라는 거지?’

의문을 품기는 했지만 아무나 죽일 수는 없다는 생각 때문은 아니었다.

그녀가 의문을 품는다고 답이 들려온 것은 아니었다.

그때부터는 그녀가 조급해졌다.

그 질문이 거두어질까 봐서.

그녀는 서둘러 대답했다.

그러겠다고. 그렇게 하겠다고.

그 후에 일어난 일은 즉각적이었다.

그녀의 몸은 무림으로 이동했다.

자신에게는 자기가 수행해야 할 임무가 있었고 그것을 하기만 하면 약속된 미래가 있었다.

어떤 삶이 기다리고 있는지 알고 있는데 그 자리에서 멍하니 있을 이유는 없었다.

그녀는 무림 세계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래서 더욱 그 일에 매달렸다.

빨리 이곳을 떠나서 자기가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이곳에서 그녀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았고 특출나지도 않았다.

다른 이들보다 드러나지 않았고 인정받지도 못했다.

레이첼은 자신의 마나를 내공으로 바꾸는 것을 하지 못했고 사람들이 검기를 뽑아내는 것을 보며 경악했다.

그래도 자신의 자리에서 갈고 닦은 결과 그녀는 사람들이 일류라고 부르는 경지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절대 만족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사람들의 칭송을 받고 미래의 희망이라고 불렸던 산드라 레이첼이 어느 날 갑자기 별 볼 일 없는 사람이 되었을 때 그녀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레이첼은 자신의 목표를 정확히 알고 있었고 그것을 이행하기 위해 애썼다.

이곳에 와있던 사람들.

먼저 와 있던 사람들을 죽여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 레이첼은 작전을 세웠다.

살행의 대상이 누구인지는 상태 창이 나타나서 설명을 해 주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