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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366화 (366/470)

제366화

366화

황성으로 가기 전 그녀를 봤을 때에 비해 훨씬 초췌해진 모습이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은 눈으로 그녀가 아진을 바라보았다.

다른 이보다 먼저 진실에 가까운 사실을 알고 있다는 이유로 그녀는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위도를 죽이는 사람이 그녀가 아닌데도, 그 누구보다 위도의 죽음을 막고 싶은 사람이 그녀일 텐데도 지금 벽예월은 엄청난 부담감에 짓눌려 있는 것 같았다.

아진은 진심으로 벽예월이 안타까웠다.

“공자님…….”

벽예월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린린에게 얘기는 들었습니다.”

“네…….”

“황제 폐하의 명으로 서남에 가서 제가 살던 곳에 나타났던 괴수를 발견하고 그놈을 죽였습니다.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벽 소저가 봤다는 그것은 실제로 일어날 가능성이 클 것 같습니다. 제가 살던 곳에 있던 사람들이 이곳으로 왔다는 것도 그렇고 말이지요.”

“…….”

벽예월은 그 말이 아진의 입을 통해 나오자 더 크게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그러나 아진의 이야기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벽 소저. 저는 여기에 와서 수많은 동료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지키고 싶은 사람도 얻었지요. 그게 얼마나 기쁘고 신나는 일인지 벽 소저는 모를 겁니다.”

“아뇨.”

벽예월이 다급하게 말했다.

“아뇨. 알아요. 저도 알아요. 저도 그런걸요. 저도 그런 기분을 느끼는걸요.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저는 그분들을 제 동료라고 느껴요. 그리고 그분들이 다치지 않도록, 제가 할 수 있는 걸 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제가 할 수 있는 건…… 그분들의…… 죽음을 예견하는 것뿐이에요.”

벽예월이 고통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 위도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벽 소저가 본 내 모습이 내 마지막 모습이 아닐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벽 소저가 본 것처럼 죽지만 그 후에 아진이가 나를 살릴 수도 있지 않을까요?”

위도는 웃고 있었다.

벽예월은 정말 그럴 수도 있을까 하는 얼굴로 아진을 바라보았다.

“그렇군요. 정말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위도 형님도 생각하는 걸 벽 소저가 생각을 못 했다니. 반성하셔야겠습니다.”

아진이 말하자 위도가 발끈하며 그건 또 무슨 말인 거냐고 했다.

“그거 나를 무시하는 말 맞는 거지?”

“형님이 갑자기 지혜로워지셨습니다.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죽는다던데.”

“허!”

그들의 사이에서 잠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놈들. 마음에 안 들기는 하지만 그래도 싸움을 걸어온다면 기꺼이 싸워 줄 생각이야. 어차피 무서워할 필요도 없잖아. 나는 별로 겁도 안 나. 살면서 정말 겁낼 일은 사실 얼마 되지 않더라. 내 자식에게 부끄러운 모습 보이지 않고 끝까지 용감하게 싸우면 되잖아. 그렇게 해서 진다고 해도 그건 부끄러워할 게 아닐 거야.”

위도는 단단히 마음을 다잡은 것 같았다.

“형님은 그렇게 생각해요? 저는 질 자신이 없어요. 어떻게 지는 건지, 이제는 지는 방법을 잊어버린 것 같아요.”

“내가 기억나게 해 줄까, 오라버니?”

갑자기 나타난 린린이 아주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아.”

아진이 린린의 머리를 쓰다듬고 말했다.

“그 싸움은 어디에서 벌어지게 되는 걸까? 다시 그 괴수들이 나타날까? 그자들은 괴수와 함께 공격을 해 오는 걸까?”

린린이 물었지만 아진도 그것을 알 수는 없었다.

* * *

거대한 적의 출현은 일시적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단결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사람들은 가슴에 저마다 뜨거운 의지를 품고 산본으로 모여들었다.

북리의천을 필두로 북리세가가 가장 먼저 왔고 그 뒤를 그림자처럼 독고세가가 따랐다.

그러나 그들은 시작에 불과했고 더 많은 이들이 그 뒤를 따랐다.

그중에는 열호문의 문도들도 있었고 무림의 후기지수들도 있었다.

요괴가 나타났다는 보고가 들어올 때까지 사람들은 산본에서 함께 수련을 하며 준비를 하기로 했다.

산본으로 찾아온 사람들 중에는 무림맹 시절의 구파일방도 있었다.

황제의 배려로, 실전된 무공비급을 얻은 후에 각자 봉문을 한 채 수련에 수련을 거듭하고 마침내 절기를 복원해 낸 이들이 자존감을 되찾은 모습으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아진은 그것이야말로 황제의 놀라운 한 수였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홀로 외로운 싸움을 해 나가야 했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지금 당장 눈앞의 전투를 치르는 것은 정작 대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괴수와 싸우고 나서 내공이 모두 회복하기 전에 계속해서 적들이 밀려오거나 요괴가 나타난다면 그때는 아진도 결과를 장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폐하께서 이곳에서 요괴가 나타날 수 있다고 하시며 함께 산본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을 한 사람은 모용세가의 가주였고 다른 이들도 그 말을 받았다.

아진은 황제가 그들을 이곳으로 보내기 위해 그렇게 설명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일이 있기 며칠 전에 아진은 황성으로 돌아갈 수 없는 사실을 설명하며 벽예월이 봤다는 천기의 내용을 황제에게 알려 주었었다.

황제는 놀라면서도 아진에게 명을 내렸다.

-짐이 너를 잃도록 하지 말거라. 상하지 말고 짐의 곁으로 돌아와야 할 것이다.

아진은 그 명령을 따라 주고 싶었다.

아진이 그 생각을 하는 동안 사람들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런 일이 생길 거라는 것은 알지 못했지만 이 자리에 함께할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무림의 고명하신 분들께 많은 것을 배우겠습니다.”

“전에는 함께 하지 못했지만 이번에는 미력하나마 힘을 보태겠습니다.”

소림과 무당, 아미파의 장문인들을 보며 아진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하고 있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이 있다면 그들이 이 싸움의 본질을 정확히 알지 못한다는 거였다.

황제는 그들이 너무 큰 두려움에 휩싸이지 않도록 하고 싶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겠지만 아진은 겁이 나더라도 적을 정확히 알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이곳에 자리하신 여러 선배님들께 그동안 제가 드리지 못한 말씀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눈을 빛내며 아진을 바라보았다.

서도진.

산본의가의 이공자로 그동안 수많은 불가능한 일들을 이루어 왔던 사람.

검신의 제자로 이미 스승을 뛰어넘는 검의 경지에 이른 그가 하려는 말에 모두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그가 하는 말은 한마디도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로 모두가 눈을 빛내며 아진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 때 아진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저는 이곳 사람이 아닙니다.”

“…….”

장내에 깊은 적막감이 찾아왔다.

몇몇 사람은 혹시 자기만 못 알아들은 게 아닌가 하는 듯이 주위를 바라보았다.

몇 사람은 아진의 동생인 서이린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혹시 이 사람도 환생을 한 것인가 했다.

‘그럴 수도 있겠어. 이런 기재가 되기 위해서는 이미 전생에 대단한 검객이었겠지.’

그들은 그런 가정조차도 부담 없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저는 미래에서 왔습니다. 살던 곳도 이곳과 다른 나라였지요. 서남에 나타났던 요괴는 제가 살던 곳에 나타났던 괴수입니다. 제가 살던 곳에는 그런 괴수가 나타났고.”

아진은 자신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해 나갔다.

사람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채 아진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나 그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마침내 그의 이야기가 다 끝났을 때 사람들은 작은 탄성을 냈다.

아진이 위도를 바라보자 위도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을 이어나갔다.

“서도진 공자는 그곳에서 SSS급 헌터였습니다. 가장 강한 사냥꾼이었다고 하면 되겠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보다 한 단계 낮은 S급 사냥꾼이었지요. 그리고 이번에 다른 두 S급 사냥꾼이 이곳으로 올 거라는 예언이 있었습니다.”

“이곳이라는 것은…….”

그 말은 북리의천의 옆에 서 있던 낭왕에게서 나왔다.

“정확한 것은 모릅니다. 하지만 그 싸움이 벌어질 곳은 이곳 산본일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왜냐고 묻는다면 그 예언에 자신의 죽음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말을 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왜냐고 묻는 사람은 없었다.

“그 사람들은…… 서 공자보다는 약하다고 봐도 되는 것인지요?”

제갈세가의 누군가가 말했고 위도는 고개를 저었다.

“아마도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안심시켜드릴 말씀을 해 드리고 싶지만 아무래도 그렇지 않을 것 같습니다.”

작은 탄식 소리.

서로를 바라보는 흔들리는 시선.

그러나 동요는 오래가지 않았다.

그들은 흔들리는 파도 위에서 잽싸게 중심을 잡는 사람들처럼 빠르게 마음을 다잡았다.

상황이 어떤지는 알았으니 이제 거기에서 앞을 보고 나아갈 준비를 하면 되는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혼자서는 낼 수 없는 용기였지만 여럿이 함께 있어서 내 볼 수 있는 듯했다.

“그러면 우리가 상대해야 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서 공자가 그 사람들이 사용하는 무공을 보여 줄 수 있다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만.”

“저희가 사용한 것은 무공이 아닙니다. 저희는 검과 활을 사용하고, 내공과는 다른 마나라는 것을 사용했습니다. 이곳의 무공은 가미되지 않고 괴수의 공격을 회피하고 피해를 입혀 쓰러뜨리는 것에 주안점을 두었습니다.”

말로 설명하는 것에 한계를 느끼고 있을 때 높은 나무에 앉아 있던 제일조가 날아와 갑자기 아진을 공격했다.

사람들은 제일조가 갑자기 왜 그러는 건가 하면서 이상하게 여겼지만 아진은 제일조가 자신에게 비무를 청하고 있는 거라는 걸 깨달았다.

간혹 사람의 지능을 뛰어넘기도 하는 영물인만큼 자신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차린 듯했다.

“제일조가 도와주려고 그러는 건가 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말했고 아진은 제일조를 향해 자신이 사용하던 공격법을 선보였다.

제일조와의 움직임을 보며 사람들은 어떤 방식인지 이해하는 듯했다.

“그러면 우리는 훨씬 이로울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합니까. 서 공자? 서 공자는 어떤 게 싸우기에 더 유리했습니까?”

“무공이 훨씬 유리합니다. 하지만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속도와 위력 면에서 그들이 앞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걱정이 되는 것은 그들의 힘이 원래 있던 곳에서 가지고 있던 것보다 훨씬 더 강해져 있을 거라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아진과 함께 작전을 세우는 게 꼭 좋은 일은 아니라는 것을 금방 깨달았다.

아진은 누군가 억지로 자신감을 끌어 올리려고 해도 어지간해서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놔두지를 않았다.

그런 싹만 보여도 당장 목을 움켜쥐고 정신을 차리게 만드는 게 그의 특기인 것처럼 보였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알겠소. 우리가 도움이 될 거요. 우리를 믿어 주시오.”

곤륜파의 장문인이 말하자 독고세가의 가주가 아진을 바라보며 인자한 웃음을 지었다.

“한결 좋군요. 공자에 대해 깊이 알게 돼서 더 친밀해지는 느낌이 드오. 그동안 공자는 왜 그렇게 남다른 건지 이해가 되지 않고 어쩔 수 없이 시기도 했는데 처음부터 우리와는 종자가 다른 사람이었던 게 아니오?”

소림방장의 말에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우리는 어렵게 기회를 얻었소. 그리고 이제는 우리가 스스로 그 믿음에 보답을 해야 할 때요. 우리 정파 무림인들이 다시 한번 우리의 이름을 드높일 수 있는 기회가 온 것 같아서 이 노부는 기쁘오.”

점창파의 장문인이 목소리를 드높이자 한 사람 두 사람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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