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3화
363화
그녀는 벽에 기댄 채 벽예월을 보고 있다가 벽예월이 자리를 떠나자 그 뒤를 따라갔다.
벽예월은 몇 걸음을 옮기다 말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벽 소저?”
린린의 목소리가 들리자 벽예월이 깜짝 놀란 듯 뒤를 돌아보았다.
“벽 소저. 혹시 오라버니에게 안 좋은 일이 생겨요?”
벽예월은 말을 하지 못했다.
린린은 계속해서 걸어오며 말을 이었다.
“말하기 어려운 상황이면 제가 스스로 알아낼까요?”
벽예월은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었다.
섭혼술을 해서 알아내겠다는 것인데 그것은 별로 원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말이 벽예월의 정신을 조금 돌아오게 만든 것 같았다.
린린이 따라가는 동안 벽예월은 계속 걸음을 옮겼다.
린린이 한 말에 대한 대답은 하지 않은 채였다.
그녀가 가는 곳은 벽예월의 처소가 아니었다.
산본의가를 나서고 길을 따라 계속해서 걸었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린린은 벽예월을 다시 부르거나 하지는 않고 조용히 뒤를 따르기만 했다.
몇몇 사람들이 그들을 알아보고 인사를 건넸다.
평소라면 벽예월이 훨씬 더 환하게 인사를 받아 주고 린린은 대충 건성으로 받았을 텐데 그날은 반대였다.
벽예월이 여전히 뭔가에 집중한 채, 다른 사람이 인사를 걸어오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해서 린린이 사람들의 인사를 받아 주었다.
벽예월은 미령이 다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까지 올라갔다.
가는 동안 몇 번이나 그녀의 걸음이 느려졌다가 빨라지기를 반복했다.
벽예월은 그 사이에 린린이 자신을 따라온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것 같기도 했다.
“벽 소저. 하고 싶은 말이 있거나 해야 할 말이 있으면 어서 하세요.”
린린의 말이 들려오자 벽예월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별이 보이지 않는 하늘을 향해 그녀의 시선이 옮겨갔다.
천공을 장악한 태양 빛이 별을 가리고 있었지만 벽예월에게는 몇 개의 별이 보이는 것 같았다.
한동안 말을 편하게 나눈 적도 있었지만 떨어져 있던 시간이 길어지면서 두 사람은 다시 어색한 사이로 돌아갔다.
벽예월은 혼자서 깊이 생각을 하는 것 같더니 마침내 입을 열었다.
“사람이 건너왔어요.”
“어디에서요?”
“공자님이 오신 곳에서요.”
“…….”
린린은 왠지 그럴 것 같다고 생각했었기에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벽예월이 그런 걱정스러운 얼굴을 한다는 것은 아진에게 일이 일어난다는 의미인 듯했고 아진을 걱정하게 할 사람은 적어도 이 무림에는 없을 것 같았던 것이다.
“그 S급이라는 사람들인 거죠?”
그러자 벽예월이 린린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벽예월도 잘 알지 못하는 듯했다.
“오라버니가 그랬거든요. 오라버니는 그곳의 유일한 SSS급이었대요. 그리고 세 명의 S급 헌터가 있었는데 그중 한 사람이 위도 오라버니였어요. 나는 다른 두 명의 헌터도 언젠가는 이곳에 오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벽 소저가 그렇게 말한 걸 보면 이곳에 올 사람들은 그 사람들인 것 같아요.”
“그러면 그 말이 맞나 봐요.”
벽예월은 한숨을 쉬었다.
아직도 가슴이 쿵닥거리고 있었다.
밤사이에 우연히 올려다본 하늘.
그곳에서 위도의 별이 피를 흘렸다.
보통 그녀의 눈에 보이는 별들은 빛을 잃거나 갑자기 그 빛이 강해지기는 했지만 피를 흘리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 그때는 그랬다.
한동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가늠이 되지도 않았다.
그녀는 아진과 위도의 별을 알아보았다.
그때 어디서 나타난 건지 알 수 없는 별들이 갑자기 위도의 별을 향해 다가갔다.
위도의 별이 피를 흘리고 떨어졌을 때 벽예월은 꿈에서 깼다.
그 이야기를 하는 벽예월을 보면서 린린은 벽예월이 꿈을 꿨다는 건지, 별을 보고 있었다는 건지 헷갈렸다.
둘 다인 것 같기도 했다.
“그러면 위도 오라버니가 위험해진다는 거예요?”
벽예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아직 막을 수는 있는 거죠? 지금껏 계속 그래 왔잖아요.”
린린은 벽예월에게 대답을 요구하는 것이 의미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저절로 그 말이 나왔다.
“벽 소저.”
“그들은 이미 건너왔어요. 그리고 처음보다 더 강해졌어요.”
“왜요?”
린린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아진은 그곳에서 경쟁 상대가 없던 가장 강한 사람이었다.
린린에게는 그 믿음이 있었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건너온다고 해도 아진의 상대가 될 수는 없을 거라는 믿음.
그런데 그자들이 왜 멋대로 강해져 버렸다는 말인가.
벽예월에게 따질 일이 아니라는 것은 그녀도 알고 있었다.
‘오라버니에게 나타났다는 그 문구. 무림으로 이동하겠냐고 물었던 존재. 그 존재가 그들을 강하게 만든 건가?’
린린의 머릿속이 여러 가지 생각으로 복잡해졌다.
그동안 무시하고 부정하고 피하려 했던 일이 갑자기 린린의 앞에 딱 내밀어진 것 같았다.
“위도 오라버니한테는 말했어요?”
벽예월은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요.”
왜 하필 지금일까.
린린은 위도가 이런 상황을 걱정해 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제는 행복해져도 되지 않을까 하면서 용기를 냈던 것 같은데.
위도에게도 드디어 좋은 사람이 생겼고 사랑의 결실도 생겼다며 같이 기뻐했는데.
그런데 그렇게 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사람들이 건너왔다고 했다.
빠득-.
린린의 이가 갈렸다.
‘네가 뭔지는 모르겠는데. 무슨 생각으로 오라버니를 여기로 보내고 다른 사람들도 계속 보내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네 생각대로는 안 돼. 지금까지 네가 어떤 식으로 살아 왔건 이제는 다른 걸 보게 될걸?’
린린은 검 손잡이를 잡았다.
그녀의 몸 주위로 검은 마기가 일렁였다.
벽예월조차 그 기운 때문에 놀라서 그녀를 바라봤을 정도였다.
“벽 소저. 먼저 가 봐도 돼요? 혼자 올 수 있겠어요?”
“물론이에요. 그런데…….”
벽예월이 린린을 바라보았다.
린린은 그녀가 하고 싶은 말이 뭔지 알 것 같아 고개를 끄덕였다.
“위도 오라버니한테는 내가 말해 줄게요. 위도 오라버니가 어떤 사람인지 알잖아요. 쉽게 무너질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요. 그렇죠? 알죠?”
벽예월은 마지못해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위도는 린린에게 보루처럼 여겨졌다.
위도가 무너진다면 그다음은 바로 아진의 차례일 거라는 생각 때문에 린린의 마음이 더욱 급했다.
언덕을 내려가던 린린은 결국 급한 마음을 참지 못하고 신법을 펼쳤다.
마을 사람들이 그녀를 불렀지만 린린은 멈추지 않은 채 그들 사이를 지나갔다.
린린의 얼굴에 그런 표정이 지어진 것을 오랜만에 보는 사람들은 걱정이 돼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인데 그런 걸까. 제발 아무 일도 없어야 할 텐데.’
사람들의 마음에는 어느덧 그런 생각이 한가득이었다.
* * *
“린린. 린린.”
위도의 목소리가 들린 것은 린린이 한참 위도를 찾아다닐 때였다.
린린이 묻는 사람마다 위도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고 하더니 그가 처음 보는 여자와 나타났다.
위도의 옆에 서 있는 여자는 단정하고 의지가 강해 보였다.
언젠가 비무 대회 때 본 것 같기도 했는데 린린이 그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그녀가 먼저 다가왔다.
“이린 아가씨. 이제야 뵙습니다. 정말 오래전부터 뵙고 싶었어요. 하유란이라고 합니다.”
하유란은 무사건을 두르고 표사복을 입은 채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린린은 그 모습을 보고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벽예월이 했던 말이 떠올라서였다.
“아가…… 씨. 왜…… 그러세요?”
하유란은 린린이 자기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혹시 자기가 실수한 게 있나 하면서 위도를 바라보았다.
그렇지 않아도 전부터 린린에게 아내를 소개해 주고 싶어 했던 위도는 이제야 두 사람이 서로 만났다고 생각하면서 즐거워하다가 린린의 반응을 보며 난감했다.
“린린?”
그러자 린린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위도와 하유란을 바라보며 웃음을 지었다.
“아…… 저도 반가워요.”
위도의 팔에는 위도를 꼭 닮은 아기가 안긴 채 벙싯벙싯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린린의 얼굴에서 다시 웃음이 사라졌다.
삶은 왜 이러는 걸까.
이런 삶은 도대체 누가 준비해 놓는 걸까.
인간이 행복해지기만을 기다리다가 사람들이 기뻐서 웃음을 지으면 이때다 하는 것처럼 그들의 앞에 덫을 놓는…….
도대체 그 존재는 누구라는 걸까.
린린은 멍하니 아기의 얼굴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린린. 왜 그래? 안 좋은 일이라도 있어? 혹시 걱정되는 일이라도 있어?”
위도는 심상치 않은 걸 눈치챈 것처럼 린린에게 물었다.
“이쎠?”
위도의 아이가 아빠의 말을 따라 했다.
아직 말을 잘 하지도 못하는 아기가 어쩌다가 따라 한 말이었다.
린린이 놀라서 바라보자 아기가 이를 드러내고 방긋 웃었다.
위의 잇몸은 아무것도 없는 선홍빛이고 아랫잇몸에서만 밥톨 같은 새하얀 이 두 개가 솟아나 있었다.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더 화가 났다.
이 사람들은 행복할 자격이 있다는 생각에.
‘행복해지면 되지. 그러면 되지. 그렇게 되게 해 주면 되지.’
린린은 더 이상 복잡하게 생각할 게 아니라고 여기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위도는 린린이 왜 그러는 건지 도대체 알 수 없었고 하유란은 혹시 자기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러는 걸까 해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반가워요. 저도 만나고 싶었어요.”
“네…….”
하유란은 정말일까 하는 듯 린린의 표정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그리고 아가씨라고 부르지 말고 그냥 린린이라고 부르세요. 위도 오라버니의 부인이시잖아요.”
“하지만 그래도…….”
“그게 더 편하잖아요. 저는 언니라고 부를게요.”
“어머…….”
린린이 자신을 언니라고 부르겠다는 말에 하유란은 깜짝 놀란 듯 위도를 바라보았다.
천마신교의 교주가 언니라고 부르겠다고 했으니 분명 자랑할 만한 일이었다.
“어언니!”
위도의 아기는 그날따라 말문이 트이는지 벌써 두 개의 단어를 성공해 내고 있었다.
린린은 아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기는 제 머리 위로 다가오는 린린의 손을 끝까지 바라보았고 그러는 바람에 눈이 위로 모이며 치떠졌다.
그러자 하유란이 아기에게 말했다.
“눈을 그렇게 뜨면 아프잖아.”
눈을 그렇게 뜨면 아프다는 건 아기를 유심히 보는 엄마가 아니고는 할 수 없을 말일 것 같았다.
린린은 얼른 손을 내렸다.
하유란은 린린과 좀 더 얘기를 나누고 싶은 것 같았지만 린린은 위도와 해야 할 말이 있었다.
“언니. 잠깐 오라버니하고 얘기 좀 했으면 하는데 괜찮을까요?”
“그러세요. 물론 괜찮죠.”
그러면서 하유란이 아기를 데려갔다.
위도는 그날 린린이 여러모로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군말 없이 린린을 따라나섰다.
“왜 그래. 린린? 무슨 일 있어?”
린린은 웬만큼 조용한 곳으로 갔을 때 그를 향해 돌아서며 말했다.
“오라버니. 제가 하는 말. 잘 들으셔야 해요.”
“그래. 말해 봐. 집중해서 듣고 있으니까.”
“오라버니도 예월 언니가 천기를 볼 수 있다는 건 알고 계시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지금부터는 대답을 함부로 하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놀란 듯 그가 황급히 입을 열었다.
“혹시 우리 아기한테 무슨 안 좋은 일이 생길 거라고 하던?”
“아뇨.”
아니라는 말에 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기에게만 일이 생기지 않으면 다른 일은 얼마든지 헤쳐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린린은 한숨과 함께 그에게 말했다.
“오라버니예요. 오라버니에게 일이 생길 거래요.”
“……뭐? 무슨? 혹시…… 내가 다시 그곳으로 가게 된다고 하던?”
“아뇨.”
린린은 심호흡을 해야 했다.
이런 말을 전하는 것이 이렇게 힘들어진 것을 보면 자기도 참 많이 달라졌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