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2화
362화
황궁에는 아진에게 익숙한 얼굴이 많았다.
이전에도 그랬지만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경내를 부지런히 오가고 있었다.
“이제 무관으로 임관하기 위해서는 산본무관을 나오는 것이 필수라는 말이 나돌 정도입니다. 산본무관의 위세가 정말 대단하지요.”
“어머니가 아쉬워하겠습니다. 무관에서 알토란 같이 키워 놓으면 쏙쏙 빠져나갈 테니까요.”
“가모님이 섭섭해하실 만도 합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이곳으로 뽑혀 온 것 같거든요.”
아진은 혹시나 하는 생각에 하월을 바라보았다.
“혹시 본가를 등에 업고 무례하게 구는 사람들은 없습니까? 알량한 권력을 휘두르려는 사람은 없는지 알고 싶습니다.”
그러자 하월이 웃었다.
“죽으려고 환장한 사람이 아니면 그런 짓은 하지 못할 것입니다. 공자가 얼마나 그런 것을 싫어하는지 알면서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가주님께서 요즘에도 산본의가 지부를 찾아다니시면서 관리를 하고 계셔서 다른 이들은 그것을 타산지석으로 삼고 미리 경계를 하는 것 같습니다.”
“정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산본무관은 동문을 아끼고 밀어주지만 사소한 잘못이라도 발견이 되면 그것을 덮어 주지 않는 걸로 유명합니다. 거기에 대해서 사람들이 말이 많기는 하지요. 그건 너무 심한 처사가 아니냐고 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자체 규율이 워낙 잘 지켜지는 만큼 내부에서는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동문에 대해서도 사적으로 봐주는 게 없다 보니 다른 사람들은 처음부터 산본무관 사람들을 경계합니다. 뇌물을 주거나 청탁을 했다가 본전도 못 건지고 잡혀가는 사람이 수두룩하지요.”
아진의 얼굴에 절로 웃음이 지어졌다.
그때 멀리서 까르르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한 아이가 공을 쫓아 달려왔다.
공이 구르는지 아이가 구르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함께 바닥을 구르듯이 달리던 아이가 아진의 앞에서 멈추고 헐떡거렸다.
세 살쯤이나 돼 보일까 하는 아이의 얼굴에 황제의 모습이 있었다.
황자인가 보구나 하면서 아진이 그 앞에 앉아 공을 잡아 주자 아이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궁녀들이 다가와서 아이를 데려가자 뒤따라 온 하월이 작게 속삭였다.
“십구 황자 전하이십니다. 폐하께서 작정이라도 하신 듯이 후사를 잇고 계십니다.”
십구 황자라니.
그 정도면 자기 자식의 얼굴이 다 기억나지도 않겠다고 생각하면서 아진은 황제의 힘에 감동했다.
“요즘의 폐하를 보면 아무것도 겁내지 않으시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전과 같았다면 이런저런 눈치를 보고 걱정을 하시느라고 하지 못하셨을 일도 이제는 거뜬히 해내시니까요.”
아진은 하월의 말이 이해가 됐다.
황제의 총애를 받으면 다른 이들에게 공격의 대상이 된다는 생각에 매사에 신중을 기하던 황제가 이제는 남의 눈치를 보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도 십구 황자라는 건…… 이건 절대 범접할 수가 없겠는데?’
아진은 비죽비죽 웃음이 나는 것을 참으며 황제의 궁으로 향했다.
“그런데 공자는 혼인을 하지 않습니까? 황상께서도 미래를 위해서 밤낮없이 힘을 쓰시는데 공자는 뭐 하고 계십니까?”
아진이 은근히 포문을 열자 하월이 피식 웃었다.
“그러는 서 공자야말로 왜 혼인을 하지 않으십니까? 서 공자에게 혼담을 넣고 기다리는 소저들이 그렇게 많다고 하던데요.”
“그런가요? 저는 들은 게 없는데요?”
“들었으면 소저들을 만나볼 생각은 있고요?”
하월이 정말 궁금하다는 듯이 묻자 아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의 가족들은 그런 압박을 하지 않았기에 아진은 혼인을 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막상 혼인을 하기 위해 사람을 만나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 머리가 지끈거렸다.
여자들을 만나면 무슨 얘기를 해야 할지도 알 수 없었고 공통의 관심사를 찾기도 어려울 것 같았다.
혼인 상대로 여협은 생각해 보지 않았고, 특히나 무공을 익히지 않는 사람과는 할 얘기도 없을 것 같았다.
그렇다 보니 조건을 충족하는 사람이 없었다.
“꼭 혼인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뭐. 세상을 살면서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부럽습니다. 나는 이제 그런 말을 할 처지가 아닙니다.”
하월은 가문을 잇기 위해서라도 혼인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공자는 어떤 사람을 생각합니까?”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은 없어서 그냥 가문에 도움이 되는 사람 중에 고르려고 생각합니다. 거기에 맞는 소저들 중에 가장 적합한 사람을 고르려고 하고 있지요.”
“그러면 그 소저들은 얼마나 불행하겠습니까?”
“그래도 후사는 이어야 하고 아버님은 조금이라도 내가 서두르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아진은 속으로만 고개를 젓고 있었다.
하월의 아버지가, 그리고 하월의 생각이 이곳에서는 보편적일 텐데 다행히 자기는 그런 압박에서 자유로운 편이라고 생각하며 다행으로 여기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우리 부모님이 참 개방적이야. 손주를 보고 싶다고 닦달을 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텐데.’
하월과 주거니 받거니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덧 황제가 머무는 궁의 후원에 이르렀다.
아진이 그즈음에 도착할 거라는 것을 알지 못해서였는지 황제는 후원을 거닐고 있었다.
그러다가 아진을 발견한 듯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그를 기다렸다.
아진은 단숨에 황상의 앞으로 나아가 그의 앞에서 깊이 허리를 숙였다.
“괘씸한지고.”
황제의 옆에서 선이남이 반가운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웃고 있었다.
“하월은 어찌 함께 오는 것이냐.”
“길에서 웬 사람이 입을 벌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기에 누구인가 하고 봤더니 서 공자가 아니겠는지요. 폐하. 그대로 놔두면 소매치기를 당할 것 같아서 데려왔습니다.”
“당하게 놔두지 그랬느냐. 주군을 이렇게 기다리게 하는 괘씸한 자는 그런 일을 당해 봐야 한다.”
황제가 쌓인 것이 많은 듯 말했지만 아진은 싱글벙글하고 있었다.
“폐하께서는 나날이 청년이 되어 가시는 듯합니다.”
“헛수작하지 마라.”
그러나 황제만 화를 내고 있었고 다른 이들은 모두 해처럼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아진도 전혀 겁이 나지 않았다.
“폐하. 보여 드릴 것이 아주 많사옵니다.”
황제는 조금 더 화를 내고 있으려고 했지만 그 말에을 듣자 계속 고집을 부릴 수가 없었다.
“하월은 이제 가 보도록 하여라. 아진을 데려온 것은 잘하였다.”
“폐하…….”
“됐다. 똑같은 놈들 같으니라고. 뒤도 안 돌아보고 가서 여태 얼굴도 비치지 않더니 이제야 와? 아진이 오지 않았으면 여기에는 오지도 않았겠지.”
“세상에. 그게 정말입니까? 이렇게 정이 없어서야. 그건 공자가 너무 심했습니다.”
“네가 할 말은 아니다.”
아진이 심했다는 듯이 하월을 바라보며 말하자 당장 황제의 면박이 이어졌다.
“다과는 되었으니 아무것도 들여오지 말거라.”
황제가 말하고 먼저 안으로 향하자 선이남이 아진과 하월을 보고 웃더니 황제를 따라갔다.
“공자는 좀 심하셨소. 멀지도 않은데 자주 좀 찾아뵙지 그러셨소.”
“나야말로 바빴습니다.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정도였다고요.”
두 사람은 소곤거리다가 시끄럽다는 황제의 소리를 듣고 웃으면서 그를 따라갔다.
* * *
“신묘하구나. 신묘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다는 말이냐. 짐도 그것을 할 수 있겠느냐.”
황제는 언제 화를 냈던가 싶을 정도로 아진의 일거수일투족에 몰두했다.
그러면서 아진이 바람이 되었다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것은 어려울 듯합니다. 린린도 공력을 자연지기로 바꾸는 것을 어려워했습니다.”
“린린이 못 한다면 짐은 어림도 없겠구나.”
그 말을 듣자 빠르게 포기가 가능해진 듯했다.
“정말 신기하구나. 그리고 이 모습을 봐서 짐이 얼마나 마음이 놓이는지 모를 것이다. 지금 서남의 상황이 좋지 않다.”
아진은 그렇지 않아도 곧 그 이야기가 나올 거라고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기에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그곳에 관군을 파병했는데 그때마다 전멸했다. 소식을 전할 사람도 남지 않고 모두 죽었지. 나중에 사람들을 다시 보냈을 때는 훼손된 시신만이 남아 있었다고 했다. 확실히 사람의 소행은 아닌 것 같았다고 하더구나. 무공의 흔적이라고 할 수도 없고 거대한 짐승의 이빨과 발톱으로 죽인 것 같다고 했다.”
“요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폐하.”
“그게 아니면 무엇이겠느냐.”
“지금도 계속 보고가 올라오는지요.”
“그런 일이 계속되다 보니 이제는 사람들이 일부러 그곳을 피하는 것이겠지. 방법이 강구되지 않은 채로 계속 사람들을 보낼 수도 없어서 우선은 그곳에 사람들이 들어가지 못하게만 하였다. 달리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황제는 잠시 침묵하다가 아진을 바라보았다.
“네 생각은 어떠냐. 아진아.”
“가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말씀드릴 수가 없을 듯합니다.”
“그래. 그렇겠지. 그러면 언제 가 보겠느냐.”
“미룰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바로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럴 가능성이 크지는 않을 것 같았지만 자꾸만 던전의 괴수가 생각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풀리지 않는 의문을 계속 가지고 있는 것보다는 그냥 차라리 가서 직접 확인을 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함께 갈 만한 사람들이 있다. 아진아. 그동안 다른 이들도 수련에 박차를 가했어.”
“토벌을 위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우선은 살펴보러 가는 것이니 이번에는 혼자 가겠습니다. 폐하.”
“그래. 그런 생각이라면 그렇게 하는 게 나을 수도 있겠군.”
황제는 누구라도 함께 가는 게 낫지 않을까 했지만 오히려 아진의 발목만 잡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강하게 권하지도 못했다.
선이남이 아진을 뒤따라 나갔다.
“네 말대로 토벌을 하려고 하지는 말고 둘러보기만 하고 돌아와라. 그리고 토벌대를 꾸리자. 거기에는 나도 참가하마.”
“예. 형님.”
아진은 그 말에 큰 의미를 담지 않았다.
선이남은 오랜만에 만난 아진과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 것 같았지만 아진은 우선 머릿속에 가득 찬 것을 비우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다녀오겠습니다.”
그들을 따라 나온 하월도 그 자리에 서서 아진이 사라지는 모습을 보았다.
“그 요괴라는 것들…… 별 것 아니겠지요?”
하월이 물었지만 선이남이 대답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 * *
“벽 총관님. 그것은 거기에 실을 것이 아닌데요.”
선화 부인의 말에 벽예월이 멍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선화 부인은 이상한 생각이 들어 벽예월에게 다가갔다.
“괜찮으세요?”
“……네? 네. 괜찮습니다.”
그러나 벽예월은 그 후로도 몇 번 더 비슷한 실수를 반복했다.
물건을 실을 마차를 잘못 알려 주어서 사람들이 다른 마차에 물건을 실었다 내리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조금 쉬는 게 어떻겠어요, 벽 총관님?”
선화 부인은 아무래도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벽예월에게 말했다.
“…….”
그녀는 대답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자리를 떴다.
그런 식으로 자리를 뜨는 것도 벽예월에게는 상상하지 못할 일이었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일을 끝내지 못한 채 자리를 떠나야 할 상황이 생겨도 확실하게 처리를 한 후에 떠나는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무슨 생각 때문인지 얼이 빠진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한참 전부터 주시하던 사람이 있었다.
린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