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0화
360화
역천마의가 랑랑을 보고 웃자 랑랑 역시 그녀를 보고 활짝 웃어 주었다.
“그래. 그럼 다시 만나자.”
“숙부님은 안 보시고 그냥 가세요?”
“응. 이제 알아서 잘하실 거야.”
역천마의도 그렇게까지 서두르고 싶지는 않았는데 린린이 서두르는 바람에 얼떨결에 떠밀렸다.
아진은 독각화망을 잘 말아서 내려왔고 독각화망은 굴욕적인 얼굴로 랑랑과 린린을 노려보았다.
그곳에 몸이 내팽개쳐진 후에야 왜 자기가 그곳에 있는지 알게 된 것 같았다.
그런 독각화망의 앞으로 흑주와 제일조가 나란히 날아와서 알짱거렸다.
그것이 독각화망의 신경을 더욱 건드렸고 독각화망은 당장 몸을 일으켰다.
몸 아랫부분에 힘을 주어 지탱하고 고개를 확 쳐들자 흑주는 냉큼 도망쳤는데 제일조는 어쩔 거냐는 듯이 오히려 독각화망에게 덤벼들었다.
“역천마의는?”
“갔어.”
간단하게 대답하고 린린이 독각화망을 구경했다.
그러면서 독각화망이 랑랑을 노리지 못하도록 랑랑에게서도 눈을 떼지 않았다.
랑랑은 총총 뛰어서 아진의 옆으로 와 아진의 손을 꼭 잡았다.
그곳만큼 안전한 곳이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체득한 것 같았다.
제일조는 높이 날아올랐다가 위협적으로 내려앉으며 독각화망의 신경을 곤두서게 만들었다.
독각화망은 아진에게도 당한 후라 이번까지 질 수는 없다고 생각했는지 마구 성질을 부렸지만 입이 꽁꽁 묶여 독을 분사하는 게 어렵게 된 바람에 제대로 힘을 쓰지 못했다.
제일조도 독각화망이 전력을 다할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을 알아차린 듯 이내 몸을 뺐다.
그리고 그때부터 흑주와 함께 독각화망을 유심히 구경했다.
“린린. 독각화망이야. 독아에서 아주 강한 독성을 가진 독을 분사하는 녀석이지. 다른 영물들을 먹으면서 강해진대.”
아진이 설명을 해 주는 동안 랑랑은 독각화망의 머리에 난 뿔을 신기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호기심이 생긴 듯 손으로 독각화망의 몸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아진은 그 모습을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뱀의 몸을 그렇게 쓰다듬다니.
대개 이런 걸 보면 소스라치게 놀라거나 얼굴을 찡그리면서 도망치려고 하지 않나?
그런데도 랑랑은 독각화망에게 거부감이 없는 것 같았다.
이상한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랑랑의 손이 지나가자 그때까지 세상 모든 것에 불만이 가득한 것 같던 독각화망이 조금 온순해지는 듯 잠잠해졌던 것이다.
처음에는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랑랑은 어느 순간 아진의 손을 잡고 있던 손까지 놓고 두 손으로 독각화망의 몸통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독각화망이 얌전하게 머리를 바닥에 처박았다.
꼭 닮았다고 하기는 그렇지만 순한 강아지가 눈을 끔뻑거리면서 주인을 바라보는 표정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독각화망이 랑랑을 지켜보았다.
사실 눈물이 맺힌 것 같은 촉촉한 강아지의 눈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기는 했지만.
“입은 왜 묶어 놨어요. 숙부님?”
“입을 벌리고 독을 뿜으니까.”
“아아…….”
랑랑은 곧바로 이해하고 독각화망의 앞에서 쭈그려 앉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대뜸 독각화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진은 린린을 바라보았다.
조금 위험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는데 린린 역시 걱정이 됐는지 랑랑 쪽으로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아진은 독각화망의 몸통이 좀 전에 비해 작아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처음에 봤을 때만 해도 이러지 않았던 것 같았는데.
그때는 동굴 천장에 거의 닿았던 것 같았는데 지금은 그에 비해 훨씬 작아진 느낌이었다.
“린린. 독각화망이 자기 몸 크기를 자유롭게 늘리기도 하고 줄이기도 하냐?”
“나는 아는 바 없는데?”
그러면서 린린도 독각화망을 주의 깊게 다시 보고 아진이 왜 그것을 물었는지 알아차렸다.
“신기한 일이네.”
아진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우리 조카가 대단한 아이인가 봐.”
린린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진도 그 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 * *
채운산에서 들어온 지 한 달여의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들이 섬에서 나왔다는 소식도 슬슬 황실에 들어갔을 것이고 지금쯤 황실에 올 때가 되었다며 황상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지만 아직은 그럴 시간이 생기지 않았다.
다른 사람도 아닌 랑랑의 문제라서 이번에 끝을 보겠다는 생각으로 매달린 결과 아진은 이제 거의 확신에 이르고 있었다.
랑랑에게는 어떤 독도 통하지 않았다.
몸에 퍼져서 붓게 하거나 마비시키거나 피를 썩게 하지도 못했다.
바위와 나무도 문제없이 녹이는 독각화망의 독이었지만 랑랑에게는 조금도 해를 끼치지 못했다.
그런 사실은 모두 우연히 발견되었다.
랑랑의 체질을 알아보겠다고 독을 직접 랑랑에게 분사할 수는 없었는데 어느 날 독각화망과 놀던 랑랑이 몰래 독각화망의 입을 묶은 것을 풀어 줬다가 그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독각화망이 독을 분사했을 때는 랑랑도, 독각화망도 똑같이 놀랐다.
독각화망은 자기가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깜짝 놀랐고 랑랑은 자기 때문에 독각화망이 난처해지겠다고 생각했다.
그 일이 일어났을 때는 목격자가 없었기에 둘은 그 일을 자기들끼리만 알고 넘어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랑랑의 옷이 전부 타 버린 것을 본 린린과 아진은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곧바로 알아차렸다.
그 모습을 봤을 때 두 사람은 머리카락이 흠뻑 젖을 만큼 놀랐고 온몸에서 식은땀을 흘렸다.
랑랑에게서 눈을 뗀 건 정말 반의반 각도 안 되는 시간이었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난다는 건지 할 말이 없었다.
“라…… 랑랑. 너…… 괜찮니?”
린린이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랑랑은 한껏 환하게 웃었다.
다친 곳도 없고 완벽하게 괜찮았지만 혼이 날까 봐 그것이 무서웠다
“랑랑. 네가 그걸 풀었어?”
아진은 독각화망의 입이 자유로워진 것을 보며 물었고 랑랑은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그렇다고 대답했다.
자기도 자기 죄를 알고 있는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독각화망 역시 옆에서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도망치는 것을 보면 독을 분사하는 게 독각화망의 본능이었다.
저는 신이 나서 그런 거였는데 랑랑의 옷이 타 버리는 걸 보고 독각화망도 꽤나 놀랐다.
“이리 와 봐. 랑랑.”
아진은 랑랑의 몸을 꼼꼼히 살폈고 랑랑이 조금도 다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경미한 화상 자국조차도 없었고 독에 녹은 흔적도 없었다.
“…….”
린린도 랑랑을 면밀하게 살피고 그 결과 랑랑이 완벽하게 무사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어떤 식으로 작용해서 독이 위력을 잃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랑랑의 체질이 특이하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독각화망의 독에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랑랑은 역천마의가 키워 놓은 독초를 스스로 먹었다.
몸에 해가 없을 정도로 희석해서 먹여 보며 체질을 알아보려고 했던 아진과 린린은 어느 날 역천마의가 키워 놓고 간 독초가 전부 사라진 것을 발견했다.
아진은 린린이 치운 거라고 생각했고 린린은 아진이 그랬다고 여겼다.
전에도 랑랑이 독초를 함부로 먹은 일이 있었기에 랑랑의 손에 닿지 않는 곳에 놓으려고 치운 거라고만 생각을 한 것이다.
누군가의 손이 닿기 전에 독초는 정말 잘 보관되고 있었다.
랑랑이 절대로 올라갈 수 없는 나무 꼭대기에 올려 두었으니 랑랑에게 대단한 재주가 있다고 해도 그 독초에 손을 댈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감쪽같이 사라졌고 아진과 린린은 서로가 치운 거라고 생각하다가 결국 린린이 먼저 아진에게 물었다.
혹시나 하면서.
“오라버니. 역천마의가 키워주고 간 독초는 어디에 뒀어?”
아진의 표정이 바뀐 것은 그때였다.
“그게 무슨 소리야? 네가 치운 거 아니야?”
“내가 왜 치워? 거기만큼 안전한 곳도 없는데?”
“…….”
아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시선은 아진이 만들어 준 해먹 위에서 태평하게 잠을 자고 있는 랑랑에게 옮겨졌다.
“……랑랑?”
아진이 랑랑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랑랑을 깨웠다.
랑랑이 눈을 뜨려다가 얼굴 위로 쏟아지는 햇살을 눈부셔 하자 아진이 재빠르게 두 손을 겹쳐 그늘을 만들어 주었다.
“숙부님.”
“랑랑. 너 혹시. 나무 위에 있던 독초…… 먹은 건 아니지?”
아진은 그럴 리가 없을 거라고 애써 믿으며 물었다.
랑랑이 용빼는 재주가 있다고 해도 거기까지 가서 독초를 가져오는 건 불가능하기에 자기가 지금 괜한 소리를 묻고 있는 거라는 생각을 계속하게 됐다.
그러나 랑랑이 부끄러운 듯이 웃었다.
“헤…… 조금만 먹으려고 했는데…… 먹다 보니까 맛있어서 다 먹었어요.”
“…….”
아진은 린린을 바라보았다.
린린도 얼빠진 얼굴을 하고 아진을 보았다.
둘이나 붙어 있었으면서 어린 조카가 독초를 먹는 것도 몰랐다는 사실에 엄청난 자괴감이 밀려들었다.
“어떻게…… 했는데?”
린린이 묻자 랑랑이 나무 밑에서 늘어져 자고 있는 독각화망을 가리켰다.
“화망이가 가져다줬어요.”
“저 새끼가!!”
린린이 벌떡 일어나서 독각화망에게 달려가자 독각화망은 위기를 느낀 듯 재빠르게 나무 위로 기어 올라갔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린린에게는 나무 위로 뱀을 쫓아가는 것이 조금도 어렵지 않았기에 독각화망은 금세 린린에게 잡혔다.
일단 독을 사용하지 못하는 독각화망은 린린에게 어떤 위협도 되지 못했다.
그러나 랑랑의 목소리가 린린을 막았다.
“화망이 때리지 마요. 랑랑의 친군데.”
그러자 독각화망이 눈치를 살피다가 랑랑에게로 도망쳤다.
둘이 서로 친해졌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 같았다.
일단 아진은 독초에 대한 것을 물었고 랑랑은 겁에 질린 독각화망의 등을 쓰다듬어 주면서 대답을 해 주었다.
역천마의가 키워두었던 독초.
랑랑은 그 많은 독초를 전부 먹었고 그러고도 아무렇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그게 조금 더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비슷한 맛이 나는 풀을 찾아다녔다고 했다.
독각화망이 몇 개를 찾아 줬는데 처음 같은 맛이 나지 않아서 실망스러웠다는 랑랑을 보며 두 사람은 할 말을 잃었다.
독초의 독이 해치지 않는 몸.
그리고 독물을 복종시킬 수 있는 능력.
지금까지는 독각화망뿐이었기에 그걸 일반화하는 것이 섣부를 수는 있었지만 독각화망을 데리고 다닌다면 랑랑에게는 굴복하고 싶지 않아도 독각화망이 무서워서라도 독물들이 랑랑에게 굴복할 것 같기도 했다.
“랑랑은 특별한 아이야.”
이제 아진도 린린도 그 사실을 부정하지 못했다.
* * *
“랑랑. 그거 먹으면…….”
“안 돼!”라는 말을 하려고 했지만 아진이 그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랑랑이 풀을 꿀꺽 삼켰다.
망혼초였다.
사람의 기억을 잃게 만든다는 풀.
채운산을 제집처럼 드나들면서도 채운산에서 망혼초를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그 망혼초가 하필 랑랑의 앞에 나타난 것이다.
“랑랑?”
아진이 조심스럽게 불렀지만 랑랑은 그의 걱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독각화망과 함께 다른 곳으로 가서 놀았다.
랑랑을 통해 계획했던 것들을 확인하고도 본가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은 독각화망 때문이었다.
독각화망은 이제 랑랑을 제가 지켜야 할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주인이라고 여기지는 않아도 제 새끼 정도로 느끼며 랑랑을 보호하려 하는 듯했다.
뱀이 새끼라고 여기는 것을 좋아하기는 어렵겠지만 상대가 독각화망이라면 얘기가 좀 달랐다.
독각화망이 작정을 하고 랑랑을 보호하기로 한다면 앞으로 랑랑의 안위를 걱정할 일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