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6화
356화
“너 정말 대단하다. 아진아. 아무리 너라고 해도 이런 것까지 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을 못 했는데.”
도종은 눈이 휘둥그레진 채 말했다.
그동안 검술을 수련하면서 이제 아진과 어느 정도 겨뤄 볼 수 있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그게 얼마나 허황된 생각이었는지 단번에 깨달았다.
역시 자기는 어림도 없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도 도종은 자랑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다른 것도 할 수 있어. 불로도 변하고 흙으로도 변해. 물이랑 벼락은 안 되나 본데 그래도 이 정도면 괜찮은 거지.”
아진은 쉬지도 않고 자랑을 해댔다.
그곳에 있는 사람들만큼은 자신이 이룬 성취를 진심으로 기뻐해 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어서 아진은 평소보다 훨씬 더 흥분하고 고양된 상태였다.
“불이랑 흙까지?”
북리소은이 말도 안 된다는 듯이 묻자 린린이 더 자랑스러워하며 말했다.
“한번 불로 변했다가 섬을 홀라당 태워 먹는 바람에 섬에 있는 오래된 나무 몇 그루가 새카맣게 타 버렸어. 불로 변하는 건 성공했는데 원래대로 돌아오는 건 못 해서. 바보도 그런 바보가 없었지.”
“어머.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벽예월이 관심을 보이며 묻자 린린이 그날의 일을 생생하게 중계해 주었다.
“너구리들이 화가 나서 일제히 달려들어서 오라버니 몸에 붙은 불을 껐어요. 정확하게 말하면 오라버니 몸에 붙은 불이라고 할 수는 없고 오라버니 몸이 탄 건데……. 그게 그건가? 어쨌든 그랬어요. 그때부터는 겁이 나서 그러는지 불로 변하는 건 잘 안 하더라고요? 마선님도 불로 변하는 것까지는 못 했는데 오라버니가 불로 변하는 걸 보고 더 이상은 가르쳐 줄 게 없다면서 신교로 돌아가셨어요.”
“정말 신기하다. 아진이는 끝이 없구나.”
어머니는 자랑스러움이 물씬 묻어나는 얼굴로 말했다.
“원래 여러 가지 자연지기를 중복해서 사용할 수는 없는 거래요. 그런데 마선님이 특이하셨던 거죠. 그런데 오라버니는 그 마선님을 뛰어넘은 거고요. 마선님은 이제 신교로 가서 후진 양성을 하고 싶다고 하셨지만 제 생각에는 조금 기분이 상하셨던 것 같아요.”
“그렇기도 하겠다. 그분은 평생을 수련해서 이룬 성취일 텐데 아진이는 얼마 되지도 않아서 할 수 있게 됐으니까 말이야. 평생이라는 말로도 부족하지. 아진이가 우리한테나 예쁘지 다른 사람들 눈에는 정말 얄밉겠어.”
가모의 말에 가주가 정말 그럴 거라며 맞장구를 쳤다.
그러면서도 자랑스러워하는 표정을 숨기지 못하며 연신 아진을 보며 웃었다.
아진은 그런 반응이 쑥스럽기도 했지만 가족들이 흐뭇해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서 지금까지 오랜 수련을 참았던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린린은 그동안 뭐 했어? 너구리들이랑 놀다 왔어?”
도종이 묻자 린린이 코웃음을 쳤다.
“이거 왜 이러셔? 이제 내가 할 줄 아는 게 얼마나 많은데. 오라버니 옆에서 기다리는 동안 심심해서 내가 섬에 있던 무공을 다 익혀버렸잖아? 각각을 전부 다 대성해 버렸다고. 그게 얼마나 무시무시한 건지 모르지? 큰오라버니하고 대련하면 큰오라버니는 3초도 못 버틸걸?”
“3초는 무슨. 너 지금 나 무시하냐? 나는 1초 만에 꿇을 자신 있어.”
린린은 그게 무슨 말인가 하면서 잠시 헷갈리는 얼굴을 했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도종이가 저렇게 말해도 그 말을 그대로 믿으면 안 된다. 린린. 도종이 인기가 하늘을 찌른단다. 도종이에게 비무를 청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진료를 하는 게 힘들 정도지.”
“정말요? 그 사람들 다 이겼지. 큰오라버니?”
가주의 자랑에 린린이 즉각 물었다.
지는 것은 상상도 하고 싶지 않은 것 같았는데 도종이 웃으며 몇 번은 이기고 몇 번은 졌다고 말했다.
“생각해 보니까 내가 꼭 이겨야 하는 것도 아니더라고. 정말 간절히 나를 이기고 싶은 사람들이 있을 텐데 매번 나만 이겨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고.”
그러자 린린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도종을 바라보았다.
“그러면 안 되는 거지. 그러면 큰오라버니한테 진 사람은 어떻게 되는 건데? 그 사람들은 큰오라버니한테도 진 거고 큰오라버니가 져 준 사람한테도 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이중의 패배감을 느낄걸? 져 준다는 건 말이 안 돼. 큰오라버니가 일단 한 번 이겼으면 큰오라버니는 큰오라버니가 꺾은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이겨야 하는 거라고.”
“항상?”
“당연하지. 이긴 사람한테는 이긴 책임이 따르는 거야. 끝까지 이겨야지.”
“아…… 그런 거야? 그런 건 줄 알았으면 함부로 이기지 않는 건데 그랬다.”
도종은 진심으로 큰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말했고 린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는 져 주겠다는 생각으로 싸우면 안 돼. 웬만한 사람들은 큰오라버니가 어떤 마음으로 싸우는지 알 거야. 전력을 다하지 않는다는 건 무인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일이야.”
“그래. 정말 그렇겠다. 그러면 안 되는 거였네.”
사람들은 린린이 도종에게 훈계하는 것 같은 모습이 귀여운 듯 웃었다.
그러나 도종은 그 분야에서만큼은 린린이 자신의 대선배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기에 린린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열심히 들었다.
많은 이야기가 오가고 가주가 린린에게 술을 따라 주었다.
“아버지. 아진 오라버니도 정말 웃기지 않아요? 자기가 살던 곳에서는 스무 살이 돼야 술을 마실 수 있었다면서 저한테도 스무 살이 되고 술을 마시라잖아요?”
“나는 네가 더 웃겨. 아진이가 뭐라고 하건 네가 마시고 싶으면 마시는 거지. 지금까지 아진이 말은 다 듣고 이제 와서 불평하고 있냐?”
도종의 말에 린린이 깊이 생각에 잠기는 듯 허공을 바라보았다.
“정말 그러네. 내가 왜 그랬지?”
“너는 가만 보면 항상 그래. 아진이가 하는 말을 안 들으려고 바락바락 대들지만 조금 있다 돌아보면 아진이가 시킨 건 다 하고 있지.”
도종의 말에는 린린도 할 말이 없었다.
그런 적 없다고 말하면 도종은 언제 어디에서 그랬는지 하나도 빼놓지 않고 전부 말을 할 것 같아서였다.
“소청아. 너는 어떻게 할 거야? 너도 네 스승님 말대로 그렇게 할 거야?”
도종이 묻자 소청이 씩 웃더니 대답을 피했다.
“저 녀석. 얼굴 보니까 소청이는 벌써 술 마셔 본 거네.”
내심 소청의 대답을 기대하고 있던 아진이 말하자 소청의 눈이 동그래졌다.
무척이나 당황한 것처럼.
“그건 아니에요.”
소청이 깜짝 놀라며 두 손을 저었지만 놀란 소청의 모습을 보는 게 재미있는 듯 사람들은 계속 몰아가며 놀렸다.
다른 때는 순박해 보이는데 그런 면에서는 의기투합이 잘되는 그들이었다.
“그래. 린린. 오래 기다렸으니까 이제 원 없이 마셔. 그 뭐지? 내공으로 취기 몰아내고 그러는 거 없는 거다. 나는 아직 그런 거 못 하는데 너희만 그러면 안 되잖아. 같이 취하고 같이 흉한 꼴도 보이고 그래야 공평하지. 그런데 잔이 너무 작다.”
도종은 다른 때보다 훨씬 말이 많았고 린린과 아진도 그와 함께 떠들어 댔다.
무슨 말을 해도 전부 다 이해되는 자리에 있다는 것이 그들을 더할 나위 없이 편하게 만들었다.
“그 사이에 사파도 많이 득세한 것 같더라고요. 그런데 선을 지키기는 하는 것 같아요. 한 번 크게 당한 기억이 있어서 이번에는 처음부터 알아서 조심하는 모양이에요. 누구 하나에게만 힘이 집중되지 않고 적절히 분산돼서 사람들이 살기에는 더 좋아진 것 같고요. 서로 견제하는 것 같았거든요.”
“그래. 그건 우리도 느끼고 있다. 산본에도 여러 무가가 생겨났단다. 어느 곳 하나가 두드러지지 않고 서로들 세력을 키워 나가고 있지. 하지만 어느 한 곳에 불만이 생기면 사람들은 다른 곳으로 갈아탄다. 보호세를 내고 자기들의 편의를 위해서 무가를 적절히 이용하고 있어. 산본의 왈패들은 선을 지키지만 워낙 외지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들어와서 가끔 소동이 벌어지거든.”
아진의 말에 가주가 산본의 상황을 말해 주었고 아진은 변화의 물결이 산본에도 이르렀다는 사실에 신기해했다.
술이 어느 정도 들어가 기분 좋은 취기가 퍼졌을 때 도종이 아진의 팔을 툭 건드렸다.
“바람이나 쐬러 나가자.”
“응. 형님.”
아진이 도종을 따라 나가자 도종이 뒤를 돌아보며 연신 웃었다.
“며칠 전에 네가 돌아온 꿈을 꿨어. 아침에 잠에서 깼는데 내가 웃고 있더라. 꿈에서 깼는데 여전히 웃고 있었던 거지. 꿈인 걸 알고는 아쉽더라.”
아진은 누군가 자신을 그렇게 그리워하며 기다려 주었다는 사실에 괜히 감격스러워졌다.
“조금 더 빨리 올 수 있었는데.”
“아니야. 됐어. 네가 허튼짓하고 다닐 녀석도 아니고. 필요한 일에 시간을 썼을 테지. 기다리고 그리워하는 시간이 꼭 나쁘기만 한 것도 아니고.”
두 사람은 바닥을 박차고 전각 지붕 위로 올라갔다.
전에는 도종이 이 정도까지는 하지 못했는데 비무 대회를 지나면서 새롭게 할 수 있게 된 것들이 많았다.
“그래도 네가 없으니까 많이 막막하더라. 네가 있는 동안 의지가 많이 됐었는데.”
“그런 소리 하지 마. 형님은 항상 나보다 훨씬 더 잘해 왔잖아.”
“그때 말이야. 랑랑이 앞에서 자랑스러운 아버지가 되게 해 주려고 나를 도와주고 가르쳐 준 거. 두고두고 생각이 나면서 고마웠어. 너한테 고맙다는 말을 제대로 못 한 것 같아서 아쉬웠고.”
“나야말로 형님을 보면서 많이 배웠어. 솔직히 무섭기도 했고. 내가 형님의 근골을 가지고 태어났으면 나는 도중에 몇 번이나 못 하겠다고 포기했을 거야.”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거든. 그리고 너에게 배울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기회인지 알고 있었고. 다들 너한테 한 번이라도 지도를 받고 싶어서 애를 태우는데 나는 운이 좋았던 거지. 너한테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내가 힘들다고 포기하는 건 말이 안 될 것 같았어. 랑랑이에게 자랑스러운 아버지가 되고 싶었고 말이야. 그 후로 나는 랑랑이의 영웅이 됐지.”
흐뭇하게 웃는 도종을 보며 아진 역시 웃음을 지른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어떤 마음으로 버텼는지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까지 웃고 있던 도종의 표정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아진아. 그런데 랑랑이 좀 이상하다.”
“그게 무슨 소리야?”
아진이 놀란 얼굴로 도종을 바라보았다.
도종은 어렵사리 말을 꺼내 놓았지만 그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좋을지 알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잘은 모르겠는데…… 사실 이걸 좋다고 해야 하는 건지, 나쁘다고 해야 하는 건지도 잘 모르겠어. 왜 우리 집안에서 그런 체질이 나온 건지도 모르겠고.”
“무슨 얘긴데?”
아진은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랑랑이 만독불침의 몸을 가진 것 같다. 우리는 이런 쪽으로 아는 게 거의 없어서 검신 대협을 찾아뵙고 여쭤봤는데 맞는 것 같다고 하시더구나.”
“랑랑이 만독불침이라고? 그러면 정말 대단한 거잖아, 형님. 랑랑이 그 체질을 타고난 거야?”
“그런 것 같아. 랑랑이 독초를 먹은 적이 있거든. 그때 생각만 하면 지금도 숨이 턱 막혀.”
“그게 무슨 소리야. 형님? 독초는 관리를 특별하게 하잖아.”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잔뜩 들떠있던 아진의 눈이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