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5화
355화
“그렇게 생각한다니 안타깝습니다.”
아진이 말을 마쳤을 때였다.
“분타주님. 무슨 일입니까. 들어가겠습니다.”
안이 소란스러워진 것을 이상하게 여긴 듯 밖을 지키던 사람들이 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
그들은 장채환이 분타주와 대화를 하고 있다고만 생각했을 뿐 그 자리에 또 다른 이가 있을 거라는 것은 알지 못했고 아진을 침입자로 여겼다.
무인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지만 분타주는 그들을 말리려고 하지도 않았다.
무인들이 아진을 알아보지 못한 것을 이용해서 아진을 제거할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한 듯했다.
“침입자다! 저놈을 죽여라!”
분타주가 소리치자 무인들은 일제히 검을 겨누고 아진을 향해 다가갔다.
“나는 산본의가의 서도진이오. 분타주의 잘못을 알아차려서 그의 행동에 책임을 물었는데 분타주는 그것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던 모양이오.”
아진의 말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우뚝 멈춰섰다.
아무리 분타의 최고 수장이 분타주라고 하지만 서도진이라는 이름에는 그만의 위력이 있었다.
정의맹주와 아진이 서로 대립되는 말을 한다고 해도 정의맹주의 말을 바로 따르기가 어려울 정도일 텐데 분타주라면 말을 할 것도 없었다.
그것은 위계질서와 충성심을 떠나, 그들의 영웅으로 부각한 아진에 대한 전적인 믿음에서 비롯된 갈등이었다.
다른 사람이 서도진의 이름을 사용하고 있는 거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의 목소리에서는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권위가 묻어났던 것이다.
“무슨 일인지 설명해 주실 수 있는지요.”
분타주의 경호를 맡고 있는 무력대의 대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진이 장채환을 바라보자 그가 대신 설명을 시작했다.
장채환의 말을 들은 무인들의 얼굴에 놀라운 낯빛이 감돌았다.
“여러분에게도 선택할 권리가 있소. 그리고 그 선택에 책임을 지면 되는 거요.”
아진이 말했지만 모두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공자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그런 결정을 내린 분타주님까지 믿고 따라야 할 의무는 저희에게 없습니다.”
그들은 단호했고 아진은 짐을 덜었다.
“그러면 뒷일의 처리는 부탁하도록 하겠습니다.”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드려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하남 분타의 전부라고 생각하지는 말아 주시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덕분에 마음 편히 떠날 수 있게 되어서 감사합니다. 제가 이곳에 있었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예.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진은 간단히 인사를 마치고 그곳을 떠났다.
앞으로는 그런 일들에 더 신경을 쓰지 않으면 안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윗선에서 일으킨 문제로 조직 전체가 책임을 지게 하기보다는 상세하게 살피고 따질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아진에게 더 막강한 힘과 권한이 주어져서 생긴 일이었다.
* * *
산본에 가는 동안 아진과 린린은 사파와 여러 문파들이 득세하며 생긴 변화들을 목도했다.
그것은 꼭 좋다고만 할 수도, 나쁘다고만 할 수도 없었다.
방치할 수 없는 문제에는 직접 개입했고 선을 넘은 조직은 관청에 고발해 조치가 취해지도록 했다.
관과 결탁해 버티던 곳은 관과 함께 철퇴를 맞았다.
그런 소식은 황실에도 들어갔고 황제는 드디어 아진과 린린이 오랜 폐관을 마치고 다시 세상으로 나온 것을 기쁘게 여기며 그들을 기다렸다.
* * *
제일조는 그들을 계속 따라다녔고 린린은 그들이 돌아간다는 내용을 적어서 역천마의에게 보냈다.
역천마의는 마선이 신교를 든든하게 지켜 주고 있고, 그동안 모든 동굴과 산천을 이 잡듯이 뒤지고 다녔어도 전에 보았던 것과 같은 동굴은 찾지 못했다는 회신을 보냈다.
기뻐해야 할 일인지 슬퍼해야 할 일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아직은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위안이 되기는 했다.
“오라버니. 만약에 그런 곳이 나타나고 오라버니가 살던 세계에서 사람들이 넘어와서 오라버니를 억지로 데려가려고 한다고 해도 이제 우리가 이길 수 있겠지?”
“당연하지. 그것들은 한주먹거리도 안 돼. 그건 전부터 그랬어. 너는 그동안 그것 때문에 섬에서 그렇게 수련을 한 거였냐?”
“당연하지.”
“귀엽네. 나는 심심해서 그러는 줄 알았더니.”
린린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아진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 말이 안심이 되기도 했다.
“거기에 있는 사람들은 어느 정도야?”
“너만 한 사람도 별로 없어. 그러니까 자신감을 가져도 돼.”
“정말이야? 확실해?”
“확실하지.”
아진은 말을 해 놓고 자기가 한 말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린린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까 좀 이상하기는 한 것 같다. 거기에서 가장 강한 게 나였거든? 그런데 내가 여기로 왔잖아? 나보다 낮은 S급 헌터가 세 명이 있었고 위도 형님이 그중 하나였는데 위도 형님도 여기로 왔잖아? 왜 거기에서 강해진 사람들이 자꾸 여기로 오지? 그러면 거기는 정말 별 볼 일 없겠는데?”
“그래? 그러면 거기는 멸망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
“모르지. 그건.”
“그런데 그거. 강한 순서인 거 맞아?”
“맞…… 지.”
꼭 그런 건 아니지만 공격력의 수치가 압도적으로 컸으니까 맞는 것 아닐까 하면서 아진은 혼자서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갈수록 그곳에 대한 기억이나 소속감은 점점 더 희박해져 갔다.
이러다가 시간이 더 지나면 자기가 다른 곳에서 왔다는 생각도 들지 않을 것 같기도 했다.
“위도 오라버니는 아직도 그곳을 그리워할까?”
린린이 묻기 전에 아진도 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마 그러지 않을까? 형님은 처음부터 그랬었잖아.”
그리고 두 사람은 자기들이 주위 사람들에 대해 모르는 게 참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 * *
산본이 얼마나 바뀌었는지 생각하지 못하고 두 사람은 산본의가 비무 대회가 열릴 때 북리의천과 하월이 했던 실수를 그대로 했다.
신법을 펼치다가 자기들이 잘못 온 줄 알고 되돌아갔던 것이다.
“여기가 산본이 맞나 봐!”
그러다 다시 돌아오고 나서 린린이 먼저 말했고 아진도 고개를 끄덕였다.
비무 대회를 앞두고 개간했던 곳은 그들이 떠날 때보다 훨씬 더 커져 있었다.
그때 그들이 만들었던 마을 외곽에 그것과 비슷한 크기의 마을이 두 개나 더 생겨나 있었던 것이다.
“이거 정말 엄청난데?”
산본의가가 있는 마을에만 해도 오백 호가 넘는 가구가 모여 살고 있는 듯했고 그런 것이 인근에 몇 개가 더 있었다.
다른 지방을 아무리 돌아다녀 봐도 이만한 곳은 볼 수가 없었는데 그저 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이 정도면 행정구역을 따로 재편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그들이 마을 입구로 내려갔을 때 아진과 린린은 뭔가가 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뭐지? 원래는 이러지 않았는데. 뭐가 달라진 거지?”
문득 마을을 가득 채우던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이들 때문이네. 우리가 올 때마다 아이들이 먼저 알고 달려 나왔는데. 아이들이 없어.”
린린의 말을 듣고 아진도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누군가 비명을 지르며 벼락같이 달려왔다.
훌쩍 자라난 아이들이었다.
“세상에. 세상에!! 이게 누구예요? 아가씨랑 공자님 맞죠? 얼굴이 변하셨어요. 환골탈태하신 거예요? 그 정도는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다 알아보겠어요. 우리 아가씨랑 공자님은 환골탈태를 백 번을 하신다고 해도 알아볼 것 같아요.”
“누가 와? 누가 오셨다고? 공자님이 오셔?”
그 소리는 순식간에 번져나갔고 곳곳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아이들은 여전히 마을을 지키고 있었고 어떤 아이들은 부모보다도 키가 커져 있었다.
각자 일을 돕고 있다가 소식을 듣고 온 아이들이 해바라기처럼 웃으며 아진과 린린을 반겼다.
그 아이들을 보고 있자니 시간이 정말 많이 흘렀다는 것을 알 것 같았다.
“공자님이랑 아가씨가 오셨다고요?”
“세상에. 언제 오신 거예요? 왜 이제야 오세요? 얼굴 잊어버리겠어요.”
“아진이가 왔다고?”
낯익은 수많은 얼굴들 속에서 아진은 굉장히 희한한 조합을 발견했다.
환하게 웃고 있는 위도와, 위도를 꼭 닮은 조그만 아기.
세상에.
어쩌다 이런 일이.
엄마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엄마도 좀 닮았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아진은 위도에게 달려갔다.
“형님. 어떻게 된 거예요?”
“뭐. 이렇게 됐다. 좋은 사람을 만났어.”
위도는 쑥스러운 듯이 말했다.
“누군데요? 언제 혼인하셨어요?”
“아부, 바바바바!”
아기는 생전 처음 보는 아진이 제법 마음에 드는 듯 침을 튀겨 가며 아진을 반겼다.
아진도 이렇게 귀여운 아기는 정말 오랜만에 본다고 생각하며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비무 대회에 참가했던 사람인데 지금은 표행을 나갔다.”
“네에? 산본표국에서 일하세요?”
“응. 엄청 예뻐.”
위도가 말하고 얼굴을 붉혔다.
이 형님이 이렇게 되다니.
아진은 위도의 얼굴이 밝아진 것이 좋았다.
“한번 안아 볼래? 벌써 되게 묵직해.”
위도가 자랑스러워하며 말했고 아기는 벌써부터 아진에게 오려고 바둥거렸다.
아진이 무척 마음에 드는 듯 아기는 폭 안긴 채 아진의 얼굴을 반죽 주무르듯이 주물러대면서 놀았다.
매번 돌아올 때마다 엄청난 환영을 받는 아진과 린린이었지만 이번에는 정말 오랜만의 귀환이었던 만큼 다른 때와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러다가 아진은 소청이 달려온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키가 훌쩍 자라고 젖살이 모두 빠져서 얼굴선이 날렵해진 것이 앞으로 여러 소저들의 밤잠을 설치게 만들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까 랑랑 이 녀석은 숙부가 왔다는데 왜 안 와?”
아진이 말하자 어느샌가 나타난 도종이 웃음을 터뜨렸다.
“너는 이 형님이 꼭 직접 와야 하더라?”
“형님!”
아진은 안고 있던 아이를 위도에게 돌려주고 도종을 꽉 끌어안았다.
그러자 도종의 얼굴이 반으로 접힌 붕어빵처럼 눌렸다.
“우리가 직접 오는 게 맞지. 귀한 아진이가 한 사람 한 사람 찾아다닐 수 있겠느냐.”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리자 린린이 날다람쥐처럼 달려가 아버지에게 폭 안겼다.
“아이구야. 이녀석. 아버지한테 매달려서 천근추 쓰지 마라. 허리 나간다.”
“린린. 이 어미는 보이지도 않니?”
“기다리세요. 이제 어머니 차례예요.”
린린이 달려가 어머니를 안자 어머니의 얼굴이 해처럼 빛났다.
오랜만에 봤다고 그런 애교도 부릴 줄 아는 모양이다 싶어 아진은 흐뭇하게 웃었다.
집은 언제 돌아와도 좋다고 생각하며 모두 재회의 기쁨을 만끽했다.
한 사람 한 사람과 인사를 나누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고 한 번 눈을 마주치는 것만 해도 어려웠지만 모두의 얼굴이 행복해 보여 마음이 놓였다.
* * *
“그건 어떻게 됐어. 아진아? 마선님의 무공은 익혔어?”
도종은 궁금한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아진이라고 해도 그것까지는 어려웠을 거라고 생각하기는 했다.
만약 익히지 못했으면 속이 상할 거라는 생각에 그냥 묻지 말자고도 생각했다.
그런데 너무 궁금했고 결국 묻고 말았다.
그런데 아진은 왜 이제야 묻는 건가 하는 듯했다.
“응. 형님. 해 볼까?”
해 볼까? 라고 물었지만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아진은 그 자리에서 바람으로 변해 사라졌다.
서로 깊이 있는 얘기를 하기 위해서 가족들과 소청, 그리고 위도와 벽예월하고만 함께한 자리였는데 모두 그 모습을 보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