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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354화 (354/470)
  • 제354화

    354화

    그때에야말로 사람들은 경악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린린이 서이린일 거라는 것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던 사람들은 그가 바로 서도진일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의 얼굴이 한순간에 흑빛으로 변해 버렸다.

    잘못한 것이 있건 없건 마찬가지였다.

    그동안 서도진에 대해서 들어 왔던 수많은 이야기들이 떠오르며 이 자리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급히 머리를 굴렸다.

    장이원은 특히나 더했다.

    아버지가 정의맹 분타에서 한자리를 꿰찼다고 지금껏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의기양양하게 굴어왔는데 그 정의맹을 세운 것이나 다름없는 사람이 눈앞에 있었던 것이다.

    그가 객잔에서 아진을 보고 그 사실을 알 방법은 전혀 없었지만 그는 자신의 실책이 뼈아팠다.

    “이 일을 정의맹 분타에서 어찌 처분하는지 보겠소. 우리가 이곳에 왔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말하지 마시오. 당신들이 이미 우리가 누구인지 알아봤다고 해도 말이오. 정의맹 분타에서 당신들의 잘못을 감싸기 급급하다면 그들도 거기에 합당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겁니다.”

    아진은 그렇게 말하고 가주를 바라보았다.

    “가주는 장이원이 저지른 일을 공표하고 장이원과 함께 스스로 책임지도록 하시오. 장이원과 같은 짓을 하면 어떤 처벌을 받게 되는지, 장이원과 같은 자를 감싸면 어떻게 되는지 다른 사람들이 당신들을 보고 알게 될 거요.”

    “……예.”

    가주는 덜덜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아진이 나타난 순간부터 그는 급격히 말수가 줄었다.

    그 전에는 말을 해서 조금이라도 잘못을 탕감받을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았다.

    자신의 입에서 나온 실언으로 영영 돌이킬 수 없는 일들이 생길 것만 같아서 한마디를 하는 것이 그렇게 신경 쓰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지금껏 힘들게 쌓아 올렸던 모든 것이 한순간에 허무하게 사라져 버리는 것 같았다.

    “정의맹 분타에 먼저 말하시오. 그들이 혹시 장의원의 일을 덮으라고 말해도 당신은 그 일을 공표해야 할 거요. 며칠 후에 관에서 이 일을 알게 될 테니 괜한 수를 쓰려고 하지 마시오.”

    “그러겠습니다. 소협. 저와 제 아이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아진은 다른 이들을 둘러보고 린린과 함께 그곳을 떠났다.

    무인들은 그 유명한 사람들을 눈앞에서 봤다는 사실에 감격을 감추지 못했다.

    하필 좋지 않은 일로 만나기는 했지만 그래도 감격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 * *

    이제 사람들 틈을 다니며 조용히 그들이 하는 말을 듣는 것은 아진에게 조금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바람으로 변해서 대기를 떠돌면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정주장가의 가주는 아진이 그렇게까지 할 거라는 것은 알지 못했겠지만 그동안 들어 왔던 서도진에 대한 명성 때문에 감히 다른 꿍꿍이를 품을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그는 아진이 시킨 대로 정의맹의 분타로 향했고 분타주를 찾아갔다.

    분타주는 장채환이 만나기를 청한다는 말을 듣고 그를 불러들였다.

    장채환이 평소에 수완 좋게 일을 처리하고 지역 토호들과의 관계도 잘 이끌어 와서 분타주는 그를 깊이 신뢰하고 있었다.

    “분타주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저를 믿어 주셨는데 이런 말씀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가주 장채환은 웃는 얼굴로 자기를 맞이하고 환담을 나누려는 분타주를 보고 부담스러워서 먼저 말을 했다.

    웃는 얼굴이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싸늘하게 굳을 것을 생각하자 그냥 매를 빨리 맞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무슨 이야기인데 그러시오.”

    분타주는 그때까지도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물었다.

    “실은…… 제 둘째 놈이 큰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아니. 실수라는 말로도 되지 않을 일입니다. 명백한 죄를 지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오.”

    분타주의 표정이 굳었다.

    그는 지금껏 자신의 경력을 잘 유지해 오고 있었고 나중에는 반드시 총타로 나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장채환의 말은 불길하게 들렸다.

    “무슨 이야기인지 빨리 말을 해 보시오.”

    “실은 제 아이가…….”

    장채환은 떨어지지 않는 입술로 겨우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야기가 이어지는 동안 분타주의 얼굴은 점점 일그러졌다.

    얘기가 끝났을 때 그는 노여움을 감추지 못하고 탁자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탁자에는 무른 반죽에 새겨진 것처럼 주먹의 자국이 고스란히 생겨났다.

    “……죄송합니다. 분타주님.”

    “닥치시오!”

    분타주는 당장 험한 말이 튀어 나가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장채환은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한 채 그의 처분을 기다리고 있었다.

    분타에서 얻은 자리를 잃는 것은 기정사실이 될 것이고 그동안 장가가 누려 오던 것도 위태로워질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누굴 원망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며 장채환은 고개를 숙인 채 묵묵히 기다렸다.

    이윽고 분타주가 입을 열었다.

    “그 일을 아는 자가 누구요.”

    “……예?”

    장채환은 그가 왜 그러는 걸까 하면서 고개를 들었다.

    설마.

    좋지 않은 예감이 장채환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 일을 아는 자가 누구냐고 물었소. 말하시오.”

    “아이들과…… 본가의 무인들 몇 명이 알고 있습니다.”

    “다행이군. 그 일이 밖으로 새어 나갈 걱정은 없을 테니. 스스로 그런 일을 밖에 하고 다니지는 않을 것 아니오?”

    “예?”

    장채환은 분타주가 그 일을 덮으려고 하는 거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여자는 어찌했소. 놓친 것은 아닐 테고.”

    “분타주님. 그것은…… 그것은 저희가 책임질 일입니다. 제 아들도 기꺼이.”

    “닥치시오. 그럴 거였으면 처음부터 그런 일을 하지 말았어야지. 지금이 우리 분타에 어떤 시기인지 모르오? 다른 분타들은 크고 작은 성과를 내면서 앞서가고 있소. 나는 그들에게 뒤처질 생각이 없고 말이오. 그런데 이때 내가! 내가 고작 그런 일에 발목이 잡혀야 할 거라고 생각하시오?”

    “…….”

    장채환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구성원의 잘못에 눈을 감아주는 것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었다.

    “그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하시오. 혈기왕성한 나이에 그 정도 일은 있을 수 있는 거요. 앞으로는 자숙하고 근신해야 하겠지만 한 번 일어난 일로 너무 크게 소란을 떨려고 하지 마시오.”

    “분타주님.”

    “분명히 말했소. 이것은 명령이오. 다시는 이 일을 나에게도, 다른 사람에게도 말하지 마시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것은 명령이오.”

    가주는 잠시 침묵했다.

    분타주는 가주가 알아들었을 거라고 생각하고 그를 내보내려 했다.

    처음에는 화가 났지만 생각해 보니 대단한 일도 아니었다.

    그런 일을 한 번 눈감아 주면 앞으로 장채환이 자기에게 더 충성을 바칠 테니 오히려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죄송합니다만. 그렇게는 할 수가 없겠습니다.”

    그랬기에 장채환이 그렇게 말했을 때는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자기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건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뭐요?”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분타주님의 명이라면 저는 분타주님의 명을 따를 수가 없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요!”

    분타주는 더 이상 화를 참지 못한 채 큰 소리를 질렀다.

    장채환은 그 자리에 아진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지만 스스로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는지 판단하는 것은 조금도 어렵지 않았다.

    “이보시오. 나는 지금 부탁하는 게 아니오. 알겠소? 누구도 내 앞길을 막지 못한다고 말을 하는 거요. 끝까지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면 나도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오. 아버지와 아들이 집에서 자결한 채 발견된다고 해도 이상하게 보일 것 같지는 않고 말이오.”

    장채환은 그런 말까지 들으면서 기분이 유쾌하지는 않았지만 그것까지도 자기가 참아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더 이상 멍청한 소리를 늘어놓으려고 하지 말고 나가시오.”

    분타주가 말했을 때 아진은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모습을 드러냈다.

    “으으아악!”

    아진의 모습이 나타나자 분타주는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을 치다가 탁자를 잡고 그것과 함께 나뒹굴었다.

    그렇게 꼴사나울 수가 없었다.

    그는 아진의 모습을 멀리서나마 몇 번 본 적이 있었고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이 그 아진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영약의 섭취로 모습이 조금 달라졌다고 해도 분타주는 그 사실을 분명하게 느꼈다.

    “고…… 공자님…… 공자님이 여기에서는 웬…… 어쩐…… 아니. 어떻게…….”

    그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도 알지 못한 채 말을 더듬으며 말했다.

    아진은 그런 분타주를 싸늘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공자님……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모르겠지만, 그리고 무슨 얘기를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전부 선의에서 한 행동입니다. 아랫사람이 저지른 잘못을 윗사람으로서 덮어 주려고 한 것뿐입니다. 그것은 잘못된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나에게 이런 변명을 할 필요도 없겠소. 그런데 왜 그렇게 다급하게 구시오. 분타주.”

    아진은 그가 알량한 말주변으로 자신을 조종하려 한다는 것이 더 기가 찼다.

    “공자님…… 그것이 아니고 이것이 오해할만한 이야기라서…….”

    “오해할만한 이야기라. 나는 분타주의 생각에 동의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리고 분타주의 사고방식에 아주 큰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분타주가 정의맹의 분타를 다스리는 데 부적격하다는 것을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깨달았다는 의미입니다.”

    “공자님…….”

    그러다가 분타주는 자기가 아진의 앞에서 그렇게까지 저자세로 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저는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하남의 분타주는 저고 공자님에게는 정의맹의 활동에 대한 권한이 없습니다! 공자님이 그동안 정의맹을 위해 큰일을 해 오셨다는 것까지 부정하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권한도 없는 일에 나서시는 것은 안 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진은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분타주. 정말 아무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

    분타주는 자신이 함정에 빠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 전까지만 해도 그는 아진을 좋아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아진은 정의맹의 영웅이었다.

    아진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정의맹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잠깐 사이에 그는 아진과 같은 편에 설 수가 없게 되어 버렸다.

    아진도 분타주가 왜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하는 건지 알고 있었다.

    함정이라면 함정이었는데 그렇다고 분타주의 앞에 함정을 놓은 것이 미안하지는 않았다.

    “분타주. 정의맹에는 다른 어느 조직에 요구되는 것보다 더 높은 도덕성이 요구됩니다. 그것은 정의맹이 다른 곳보다 훨씬 더 큰 힘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분타주가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은 사람들이 분타주에게 그 힘을 행사할 자격이 있다고 믿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나는 그 믿음이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고작 이런 일 하나로 이럴 수는 없습니다. 그동안 내가 이루어 온 모든 일이 이것 때문에 아무 의미가 없어진다고 할 수 없는 것이 아닙니까!!”

    반발은 거셌지만 아진은 흔들리지 않았다.

    “제가 혼자 판단할 일은 아니겠지요. 총타의 감찰기관이 판단할 겁니다.”

    “이건 모함입니다!! 나를 꺾으려고! 내가 맹주가 되는 것을 사전에 막으려고 이런 것이 아니냐는 말입니다!!”

    분타주의 분노는 생각보다 컸다.

    아진은 그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원하기만 한다면 어떤 자리건 그에게 열려 있었기에 아진은 고작 분타주 자리 하나에 그렇게 목숨을 거는 것처럼 구는 모습이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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