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3화
353화
“손은 붙일 수 있겠느냐!”
“안 되겠습니다. 가주님. 잘린 지 오래된 것처럼 혈관이 막혔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그 일이 일어난 것은 이곳이 아니냐! 시간이 얼마 되지도 않았을 텐데 왜 안 된다는 말이냐!”
가주가 소리를 질러 봤자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가주가 운기요상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이 된다면 의원 따위는 치워 버리고 자기가 내공을 불어 넣어서 상처를 치료했겠지만 그 자리에 있는 이들 중에 그 정도의 수준이 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정의맹 분타에 데리고 간다면 아들을 치료해 줄 사람을 한두 사람 정도 찾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손이 이리된 것을 보면 분명히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먼저 물을 터였다.
갑자기 마도가 나타나서 습격을 한 것도 아니고 집에 가만히 있던 둘째만 이런 일을 당했다는 것은 분명히 이상한 일이었다.
“어쩌는 것이 좋겠느냐.”
가주가 대공자에게 물었지만 그도 좋은 수가 떠오르지 않는 듯했다.
“빨리 무슨 수든 떠올려야 한다. 이대로 시간만 보낼 수는 없는 일이다.”
“어쩔 수 없겠습니다. 아버님. 저놈이 저지른 일은 스스로 책임지도록 해야겠지요. 앞으로 검을 들 수는 없겠지만 두 손이 없어도 이원이가 할 수 있는 일은 있을 것입니다.”
“……그래. 네 말이 맞을 것 같구나. 잘못해서 가문의 위신이 떨어진다면 그것도 큰일이 아니냐.”
가주는 장이원의 치료를 포기하기로 하고 의원을 바라보았다.
“출혈은 확실히 멈춘 것이냐.”
“예. 가주님.”
“됐다. 그러면 이제 네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도록 하여라. 의수 같은 것은 만들어서 끼울 수 있지 않겠느냐.”
“예. 가주님. 그것은 할 수 있습니다.”
“그래. 그리하도록 하자.”
장이원은 자신을 향한 결정이 이루어지는 동안 점점 얼굴에서 핏기를 잃어 갔다.
모든 꿈이 물거품처럼 사라져 가고 있었다.
일이 그렇게 될 거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생긴다는 것인지…….
그는 아직도 제 잘못이 대단한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제가 하려고 한 짓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그게 이렇게 크게 키울 일이었나 해서 화가 났다.
그는 눈시울이 시큰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건 말도 안 된다는 생각에 입술이 부들부들 떨렸다.
“저 여자는 어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아버님.”
이제 다른 일은 정리가 되었다는 듯이 대공자가 제 아버지를 향해 조용히 물었다.
“물을 필요가 뭐가 있느냐. 저리 잘 알고 있는 아이를 살려 두어서 어쩌겠다는 말이냐. 어차피 이곳에 피가 흘렀으니 이 자리에서 끝내는 것이 낫겠구나. 다른 곳에 흔적을 만들어 두 곳을 치우느라 번거로울 필요가 있겠느냐.”
가주가 말하자 대공자가 검을 뽑아 들었다.
린린은 일이 속도감 있게 잘 돌아가는 것 같더니 갑자기 전개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대공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 뭐야. 나를 죽이려고? 머리가 그렇게밖에 안 돌아가나? 하긴. 이놈이 하늘에서 혼자 뚝 떨어진 것도 아니고 제 아버지와 어머니에게서 나온 걸 테니 식구들이 전부 멍청한 게 놀라운 일은 아니겠군.”
“닥쳐라. 이년!”
“네 동생이 벌인 짓으로 왜 나를 죽이려고 하는 거지? 여기에서 나만 죽이면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대공자는 린린이 그런 상황에서도 놀라지 않고 당당하게 말을 해서 기가 막혔다.
도대체 얼마나 배짱이 대단하기에 그럴 수가 있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들고 처음부터 의심스러운 것투성이였다는 생각도 들었다.
누군가 자신의 술에 수면산을 타고 납치까지 하는 걸 알았다면 그 일을 피하는 것이 정상이지 눈앞의 여자처럼 그 일을 조목조목 알고 있으면서 당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가장 말이 안 되는 것은 동생의 손목을 자른 방식이었다.
대공자는 동생이 어떻게 하고 있다가 그 일을 당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형벌을 받기 위해 강제로 두 손을 나란히 들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런 식으로 두 손이 반듯하게 잘려나가는 것은 불가능했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손목의 뼈까지 절단되도록 깊이 잘려나갔는데 그곳 외에는 검이 스친 자국조차 없다는 것도 이상했다.
“너는 누구냐. 도대체 너는 누구냐.”
대공자의 말에 린린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시간 끌 것 없다. 죽여라.”
대공자가 검을 빼 들자 린린이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가주는 자식을 잘못 키운 책임을 스스로 지는 것이 옳았다. 자식을 잘못 키워서 자식이 저 모양이 되어 버렸으면 그냥 내쳐야 했다. 장이원이 너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가문 전체가 장이원의 잘못으로 멸망하게 하는 대신에 말이다.”
“닥쳐라. 네 이년!! 내 기필코 네년을 죽이겠다!”
“둘째는 아둔하고 아비는 결단이 부족하고 첫째는 그냥 멍청하니 가주의 직계에게 기대할 것은 없을 것 같다만. 정주장가의 방계는 어떠냐. 너희도 같다면 정주장가는 계속 두고 볼 것이 없겠구나. 장가의 무인들이 말을 해 보아라. 너희에게 말을 할 기회는 주도록 하겠다.”
“뭘 하는 것이냐! 당장 이년을 죽이라는 말이다! 왜 저런 소리를 하도록 그냥 두고 있는 것이냐!!”
가주가 소리치자 대공자가 린린을 향해 검을 휘두르려 했지만 그는 검을 내리지도 못했다.
린린은 지풍을 날려 대공자의 혈을 짚어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섬전처럼 가주의 앞으로 다가갔다.
“네가 해라. 가주.”
“……!”
“네가 해라. 가주. 네 손으로 검을 들고 네 손으로 나를 공격해라. 입만 나불나불하지 말고, 다른 사람에게 시키지 말고 말이다. 가주가 하는 일이 입만 나불거리는 거라면 너무 편한 게 아니냐.”
“……!!”
가주의 눈알이 미친 듯이 흔들렸다.
“지금껏 네놈이 어떻게 살아 왔는지 알겠군. 소리만 버럭버럭 지르면서 책임은 지지 않고 일이 생기면 남들의 뒤로 숨기 바빴던 거군. 그런 건 아주 안 좋은 버릇인데 말이야. 가주로서 자격이 없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린린은 말을 하면서 가주의 어깨 밑에 검을 깊이 박았고 가주는 그 모습을 보면서 피하지도 못했다.
속도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를 압도하는 시선을 마주하면서 두려움에 몸이 굳어 움직이지 않았던 것이다.
“머…… 멈춰라!!”
대공자가 외쳤지만 이미 검은 깊이 박힌 후였다.
대공자는 창백하게 질린 눈으로 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아, 아버님……!!”
제 몸에 검이 깊숙하게 박히는 것을 보면서도 가주는 여전히 린린을 밀어내지도, 그만하라고 소리치지도 못했다.
생전 그런 자리에는 선 적도 없었고 직접 그런 일을 당할 일도 없었던 것이다.
“그동안 얼마나 편하게 살아왔는지 알겠어. 뒤에 서서 소리만 치면 되는 거였군. 이래라저래라 하면서. 그리고 네 아래에 있던 놈들은 고분고분 그 말을 들으면서 너를 계속 멍청한 폭군으로 남아 있게 했던 거고 말이다.”
린린의 말에 화를 낼 법도 했건만 가주는 그러지 못했다.
“삶은 누구에게나 소중한 것이나 고통은 누구에게나 꺼려지는 것이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들은 그게 자기 일이 되기 전까지는 잘 모르지.”
어깨 아래에 박아 넣은 검을 옆으로 비틀며 린린이 말했다.
날카롭게 벼려진 검날에 혈관들이 잘려나가고 있었다.
“너는 자격이 없다. 자격 없는 자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 그곳은 필히 멸망할 수밖에 없지. 멸망하는 것이 왜 나쁜지 아는가. 그것이 풍기는 악취 때문이다. 너는 처음부터 태어나지 않는 게 좋았다. 네 두 아들들과 말이다.”
린린은 조심성 없이 검을 뽑았다.
가주는 머릿속이 아득해져 가는 것 같다고 느끼면서 하나의 이름을 떠올렸다.
이 나이에 이렇게 광오한 말을 할 수 있는 여자.
그 이름이 집요하게 그의 머릿속을 비집고 나오려 하고 있었다.
‘그러지 마. 나오려고 하지 마.’
그는 부들부들 떨면서 속으로 외쳤다.
상상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설마 서이린이라는 것인가.
패월악의 환생이자 당대 천마신교의 교주?
그 역시 린린을 직접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 나이의 여자 중에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도, 이원의 손목을 이런 식으로 잘라 버릴 수 있는 사람도, 대공자의 움직임을 지풍으로 봉쇄하고 자신의 근맥을 끊어 버릴 수 있는 사람도 그 여자뿐일 것 같았다.
장이원의 손을 그렇게 만든 것은 린린이 아니었기에 그의 추측이 전부 다 들어맞은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대부분은 맞았다.
“살려 주십시오……!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가주가 더듬더듬 말하자 주위에 있던 이들이 놀라며 가주를 바라보았다.
그곳에 있던 이들은 검을 빼 들고 있었지만 린린을 향해 검을 겨누지 못하고 있었다.
대공자는 린린에 의해 그렇게 됐지만 다른 무인들은 장이원이 저지른 잘못으로 자기들까지 괜한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
그들 중 몇은 가주와 혈연으로 연결되어 있었지만 나머지는 그렇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무림맹의 명문세가들이 수뇌부 몇 명의 일탈과 잘못된 판단에 의해 무너져 버리는 것을 보았고 지금 자신들이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공자를 두둔하기 위해 자신들의 미래를 걸 수는 없었다.
“가주님이 계속 이공자를 두둔하신다면 저는 가주님을 따르지 않을 것이고 더 이상 정주장가에 남지도 않을 것입니다.”
누군가 말하자 그것이 신호가 된 듯 다른 이들도 곧 그 말을 이어받았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잘못은 이공자가 저질렀습니다. 저희는 이공자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면서도 이공자의 잘못을 덮어 주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공자! 이공자가 양심이 있다면 차라리 자결해서 이 일을 책임지시오! 가문을 위태롭게 하지 말고 말이오.”
무인들이 일제히 가주와 이공자를 향해 소리치자 린린은 뜻밖의 상황에 재미있다는 표정이 되었다.
린린은 대공자의 판단이야말로 궁금해졌고 다시 지풍을 날려 그의 움직임을 자유롭게 해 주었다.
대공자는 제 아버지와 동생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건 간에 혼자서 상황을 돌이키는 것은 이제 너무 어려워 보였다.
무인들의 지지를 받지 못한 채 가문을 이끌어 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그도 모르지 않을 터였다.
“아버님……!”
가주는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린린을 바라보았다.
“내가…… 내가, 큰 잘못을 했습니다. 내 잘못으로 가문을 위태롭게 할 뻔했습니다.”
가주의 말에 린린이 웃었다.
“가문을 위태롭게 할 뻔한 것이 잘못이 아니다. 너와 네 아들이 무고한 사람을 죽이려 한 것이 잘못이다. 그러고도 너희는 관에게 위임받은 권한으로 이 지역의 치안을 유지하겠지. 너희의 손이 그런데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 뭐라고 말을 했다는 말이냐. 너희가 그동안 어찌해 왔을지 뻔하다.”
“아닙니다. 그런 일에는 사사로운 감정과 이익을 개입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감찰을 받으면 밝혀질 일이다. 너희가 저지른 모든 일이 세상에 밝혀질 것이다.”
“……!!”
가주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린린에게 사죄하려고 그런 것이 아니라 낙심이 되어서 저도 모르게 그렇게 된 듯했다.
“소저. 이 일을 정주장가와 연관 짓지는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정주장가에는 가문의 명성을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희생해 온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주와 공자들이 저지른 잘못만으로 정주장가 전체를 응징하는 것은 그것 또한 정의에 부합하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인 한 사람이 말하자 다른 이들도 선처를 부탁했다.
가문이 어찌 개인의 것이겠는가.
외인 출신의 무인이라고 해서 가문을 아끼는 마음이 작다고 어찌 쉽게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런 질문들이 린린에게 날아들었다.
린린은 더 이상 긴말을 하지 않았고 그 자리에 아진이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