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1화
351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한눈에 보기에도 값비싸 보이는 비단을 두르고 당당하게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그 지역에서 힘깨나 쓰는 유지들의 자제들 같았다.
아진은 문이 열리고 그들이 들어올 때 한 번 힐끔 보기는 했지만 오래 관심을 두지는 않았다.
린린은 그것조차 할 시간이 없었다.
얼마만의 포식이냐 하면서 음식을 흡입하느라 바빴던 것이다.
젓가락이 입에 오기까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고 생각했는지 점점 입을 접시에 가까이 대는 것 같더니 나중에는 몸을 완전히 숙인 채 거의 밀착하고 퍼먹고 있었다.
아무리 자기 동생이기는 하지만 좀 창피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는데 그러면서도 아진은 보리차와 만두를 린린의 옆에 가져다주었다.
“좀 천천히 먹어. 그러다가 체하겠다, 인마. 누가 뺏어 먹냐? 다 먹고 모자라면 더 시켜 줄 테니까 천천히 좀 먹어.”
그러면서도 접시에 만두를 올려 줬더니 게 눈 감추듯 만두가 사라졌다.
입은 크지도 않은 게 어쩌면 그렇게 잘 먹는지.
아진은 객잔에 나타난 사람들에 대해서는 금방 신경을 끈 채 린린의 식사 시중에 전념했다.
입가에 묻는 게 있으면 닦아 주려고 대기를 하고 있었는데 묻히지도 않고 잘 먹었다.
“어머니 아버지가 보시면 도대체 너를 얼마나 굶긴 거냐고 하시겠다.”
“그러면 섬에서도 잘 먹었다고 말씀드려 줄게. 그런데 확실히 이런 맛은 안 나잖아. 나는 이런 걸 먹고 싶었거든. 불맛이 그리웠어.”
씩 웃으며 말하는 린린을 보면서 아진이 입가에 묻은 고추기름을 닦아주었다.
“안 매워? 물도 마셔 가면서 먹어. 속에서 불나겠다.”
“여기 음식 맵게 잘 한다. 기억해 뒀다가 다음에도 또 와. 오라버니.”
“그래. 그러자.”
확실히 린린의 말대로였다.
맵기만 한 게 아니라 맛있게 매웠다.
“한 잔 따라 줘?”
“보리차 말고 죽엽청.”
“참나. 술맛을 뭘 안다고.”
그러다가 그게 린린에게는 해당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아차 했다.
패월악이었을 때 린린이 술을 즐겼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술을 마시기는 해 봤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너. 술 좋아했어. 린린?”
“아니. 그래도 마실 때는 마셨어. 분위기가 좋아서 한 잔 정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 있잖아. 오라버니는?”
“모르겠어. 좋아했던 것 같기도 하고. 기억이 잘 안 난다.”
그러는 동안 그들에게 완전히 소외되고 있던 사람들이 근처를 지나갔다.
시간상으로는 훨씬 전에 지나가야 했는데 어쩌다 보니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멍하니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들은 그 지역 유지의 자제들이었고 어딜 가건 대접을 받는 것에 익숙했다.
객잔이건 주루건 가장 좋은 곳만 찾아다녀서 이런 곳에는 자주 다니지 않지만 늘 가던 곳만 가는 것도 물린다며 그날은 그동안 가보지 않았던 곳을 탐방해 보자며 이곳에 온 거였다.
평소 같았다면 가장 좋은 자리로 안내하지 않고 뭣 하는 거냐면서 목소리를 높였을 사람들이 어쩐 일인지 조용했다.
부친이 정의맹 하남 분타에서 최근 요직에 올랐다 하여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 다니는 정주장가의 이공자 장이원은 그들 무리의 우두머리와 같았다.
함께 있던 이들은 각각 토호의 자제들로 집안이 정의맹 하남 분타와 관계를 맺고 있었고 그들 자신도 무공을 연마해서 나중에는 정의맹에 나가 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최근 무림맹과 사파에 소속된 여러 방파가 빠르게 치고 올라오는 와중에 그들은 압박감을 느끼고 있었고 전처럼 무림맹이 힘을 쓰지 못하고 사파는 억압되던 시기를 그리워했다.
그러면서 자기들이 시대를 잘못 태어났다며 원망하고 시도 때도 없이 모여서 시간을 축내고 있었다.
그래도 집안에 가진 돈이 많아 하인 몇은 수행으로 데리고 다녔고 통 크게 돈도 잘 써서 어디 가서 무시를 당하고 다닐 일은 없었다.
“자리를 마련하지 않고 뭘 하는가.”
그래도 너무 오래 서 있었다고 생각했는지 장이원의 하인이 점소이에게 말했다.
“예. 2층이 조용하니 그곳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점소이가 서두르자 장이원이 잠시 서 있다가 점소이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점소이는 창가 쪽의 좋은 자리를 안내했지만 장이원은 점소이의 안내는 무시하고 자신이 직접 자리를 골랐다.
그곳에서는 아진과 린린이 앉은 곳이 내려다보였다.
“무엇으로…….”
“저 소저가 먹는 것이 무엇인가. 참 맛있게도 먹는군. 저것으로 가져와 보게.”
“예. 나으리.”
점소이는 등줄기로 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재빨리 사라졌다.
“누구인지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공자님.”
눈치 빠른 하인이 말했지만 장이원에게서는 대답이 없었다.
하인은 그것을 무언의 승낙으로 알아듣고 냉큼 사라졌다.
장이원은 홀린 듯이 린린을 바라보았다.
“이곳에서는 본 적이 없는 사람들 같습니다. 떠돌이 낭인이라도 되는 걸까요? 여자 낭인은 본 적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만.”
“여자라고 낭인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겠지요. 그래도 보기 드문 광경이기는 합니다.”
서로 별 뜻 없는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그들은 미리 나온 보리차를 마시면서 연신 아래층 식탁을 힐끔거렸다.
그러는 동안 돌아온 하인이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두 사람은 남매지간인 것 같다고 합니다.”
그리고 동생의 생일이 최근에 지난 것 같다는, 별로 중요하지도 않고 정확하지도 않은 이야기까지 줄줄 늘어놓았다.
외지에서 온 듯하고 무공을 익힌 것 같다며 그냥 딱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는 이야기를 읊어댔다.
점소이도 아는 게 별로 없는데 아는 건 뭐든 말을 해 보라고 하니 그런 말들이 나왔던 것이다.
“여동생이 술을 좋아하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술을 시킨 게 여동생이라고 합니다.”
그 말을 들은 장이원의 눈이 빛났다.
“술을 좋아한다.”
“예. 그런데 돈은 많지 않은지 여동생이 뭘 시키면 저 남자가 자꾸 구박을 한다고 합니다.”
딱 봐도 그건 돈이 적어서 그런 게 아니라 여동생이 너무 많이 시켜서 그런 것 같기는 했지만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장이원은 여자에게 과도한 관심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고 그런 일로 구설에 휘말린 적도 없었지만 그날은 이상했다.
이대로 그들이 나가는 것을 보면 어떻게 해야 하나 하면서 마음이 조급해졌던 것이다.
“이곳에서 방을 잡았다고 하더냐.”
“그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만 곧 날이 저물 테고 술이 몇 잔 더 들어가면 그리될 수도 있지 않을지요.”
장이원은 혼자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계단을 내려갔다.
하원은 장이원이 자기에게 따로 말할 것이 있어서 그런 거라는 것을 눈치채고 그를 따라갔다.
“이것은 수면산이다. 이것을 저 남자의 술에 타라고 하여라. 그리고 저 자가 쓰러지면 소저를 도와 방에 옮겨 주고 기력이 쇠한 것일 뿐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라고 안심시켜 주어라. 그러면 나머지 일은 내가 알아서 할 것이니라.”
정말 사용할 일이 생길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않고 장난삼아 들고 다니던 것이었다.
하인에게 내미는 손이 긴장으로 덜덜 떨렸다.
자신답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는 말과 행동을 제어하지 못했다.
하인은 혹시라도 그가 말을 돌이킬까 해서 잠시 기다렸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예. 공자님.”
“실수 없이 해야 할 것이다.”
“여부가 있겠는지요.”
하인이 사라진 후 장이원은 자리로 돌아가 점소이가 가져온 요리를 먹기 시작했다.
“오늘은 일찍부터 모여서 그런지 피곤하군요. 먼저 일어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그의 말수가 급격히 줄어든 것을 알고 장이원의 눈치를 보던 사람들은 별말을 하지 않은 채 그의 처분에 따랐다.
“그러면 저희도 이만 일어나도록 하겠습니다.”
그들이 지나갈 때 린린의 식탁에는 빈 그릇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그러고도 그녀는 깊은 고민에 빠져들었다.
조금만 더 먹자고 할 것인가.
아니면 이 정도로 만족할 것인가.
아진은 오늘 안에 결정을 내리기는 힘들 것 같다고 생각한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자기가 손수 음식을 더 주문해 주었다.
“방금 주문했던 것을 4분지 1씩만 더 주문해도 되겠소? 양이 조금 부족한 듯싶어서 그렇소.”
“예.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점소이는 그렇지 않아도 정주장가의 하인에게서 특별한 임무를 받았기에 잘 됐다고 생각하며 주방으로 갔다.
자연스럽게 술 한 병을 내어 줄 수 있겠다고 생각하며 점소이가 몰래 수면산을 술병에 타서 가지고 나가자 아진이 린린의 앞으로 요리를 몰아 주었다.
장이원은 객잔을 나가면서 뒤를 돌아보고 싶은 것을 참느라 애를 썼다.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길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귀엽게 군다. 그렇지 않아도 여비도 챙겨야 하는데 탈탈 털어도 되겠지?]
아진이 전음을 보내자 린린도 피식 웃었다.
[정신 차리게 해 주면 고맙다고 하겠지.]
그리고 두 사람은 점소이가 새로 가져다준 술을 나눠마셨다.
점소이는 린린까지 술을 마시는 것을 보고 걱정이 돼서 술이 독하다며 말려보려고 했지만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꿍꿍이를 다 알고 있는 아진과 린린은 주거니 받거니 하며 술을 나눠마셨다.
그들에게는 그 술에 든 것을 해독하는 게 조금도 어렵지 않았지만 그것을 모르는 점소이는 두근거리는 얼굴로 숨어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너무 많이 마신 것 같소만 객잔에 빈방이 있으면 방을 얻고 싶소. 두 개 부탁합니다.”
“예. 바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아진이 쓰러지지 않는 게 이상하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일이 뜻대로 되는 것 같아 점소이가 신이 나서 말했다.
정주장가의 하인과 자기가 소곤거리면서 한 이야기를 아진이 전부 들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였다.
술에 취한 듯 비틀거리며 방에 들어간 두 사람은 방 안에 들어가자마자 말짱한 모습으로 각자 침상에 앉아서 정주장가의 하인이 오기를 기다렸다.
슬슬 지루해지려는 찰나, 바람 불 일이 없는 꽉 막힌 곳에 바람이 불었다.
“오라버니. 내가 한 말 잘 생각해 봐. 도둑질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잖아. 물건 입장에서 생각해 봐. 그 물건들은 자유로워지고 싶을지도 몰라. 자기들이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곳에 가 보고 싶을지도 모르고. 우리는 그 물건들에게 자유를 주는 거지.”
아진은 린린의 헛소리를 들으면서 피식 웃었다.
바람이 되면 말을 할 수는 없지만 헛소리를 듣는 것은 전혀 무리가 없었다.
아진은 자기가 원하는 바람이 될 수 있었다.
봄의 미풍처럼 될 수도 있고 한겨울의 삭풍이 되어 몸을 움츠러들게 할 수도 있고 습기를 가득 머금은 더운 바람이 될 수도 있었다.
습기 가득한 바람이 되어 몇 번 불어 주면 린린은 질색을 해 댔다.
“내가 오라버니 같은 능력을 가졌으면 나는 정말 재미있게 살았을 거야.”
그러나 린린도 그냥 해 보는 말이었을 뿐 정말 그러고 싶어서 진지하게 하는 말은 아니었다.
린린은 빨리 이곳의 일을 처리하고 어서 산본의가에 돌아가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너무 오래 그들을 보지 못했다.
보지 않은 시간 동안 얼마나 변했을지, 수없이 상상을 했지만 상상 속의 모습은 흐릿하기만 했다.
린린이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조용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아진은 린린의 곁에 지켜섰고 문이 열리고 복면인이 조용히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하인은 아니었고 린린을 데려가려고 온 자인 것 같았다.
[헛수작 하면 바로 말해. 린린.]
[뭐하러 말해? 내가 죽이면 되는데.]
린린의 말에 아진은 그도 그렇다고 생각했다.
일단 이 자는 장이원의 하수인에 불과할 뿐이니 그들을 장이원에게 데려다줄 때까지 웬만하면 참자고 생각하고 있었다.
복면인은 린린을 안아 들려 하다가 가볍게 들릴 거라고 생각했던 그녀가 예상치 못한 무게가 나가자 진땀을 뺐다.
린린이 천근추의 수법을 쓰며 버틴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한 채 다시 들려고 했지만 린린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복면인은 설마 눈앞의 가녀린 소저가 무공을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을 잠시 했지만 린린에게서 느껴지는 내공의 수위가 형편없이 낮아서 그 생각도 곧 거두었다.
그는 린린이 자신을 훨씬 뛰어넘는 내공을 가지고 있어서 실제로 가진 내공을 숨길 수도 있는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