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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350화 (350/470)
  • 제350화

    350화

    지금은 모든 것이 바뀌어 있었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많은 사람들이 가장 먼저 아진을 찾았다.

    황제가 했던 말도 어쩌면 일맥상통했을 것이다.

    아진이 곁에 있어야 안심이 되고 조금만 기다리면 아진이 올 거라고 생각하면 마음을 놓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한두 사람이 그에게 걸기 시작한 기대가 그의 발목을, 손목을, 어깨를 무겁게 잡아당긴 듯했다.

    그리고 지금 이곳에서 아진은 그것들을 하나하나 내려놓고 있었다.

    -아진아. 더 빨리 달려 봐.

    -형님. 나 좀 데리고 가.

    그의 귀에 어린 날의 청명했던 목소리가 떠도는 것 같았다.

    린린은 눈을 감고 있는 아진의 몸이 조금씩 떠오르는 것을 보았다.

    “……!”

    하마터면 오라버니를 부를 뻔했지만 그가 지금 무아지경에 빠졌다는 것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너구리 한 마리가 뒤늦게 아진을 발견하고 반갑다며 달려오는 것을 보고 린린이 그 주위에 기막을 둘렀다.

    너구리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보이던 사람들이 갑자기 사라진 것에 희한하다는 듯이 통통한 고개를 양쪽으로 갸웃거리더니 다시 다른 곳으로 사라졌다.

    아진의 모습은 점차 높이 떠오르더니 그의 신형이 흐릿해졌다.

    린린은 깜짝 놀라서 그에게 한 발 다가갔다.

    이대로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아진에게 다가가 손을 잡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러나 그렇게 하다가 아진을 방해하면 다시 그 깨달음을 얻기 위해 수십 년을 기다려야 할지도 몰랐다.

    린린의 마음이 어떤지도 모르고 아진의 모습은 점점 더 흐릿해져 갔다.

    린린은 손을 들었지만 차마 아진을 잡지는 못했다.

    이대로 바람으로 변하게 되는 걸까? 그래도 돌아오겠지? 마선님처럼.

    사라지는 아진을 그냥 보기만 해야 하는 린린의 가슴은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아진의 모습은 안개에 뒤덮인 것처럼 보였다.

    그 모습마저도 더 희미해졌다.

    하얗게 피어오르던 연기가 점점 흩어지다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처럼 그렇게 아진의 모습이 사라졌다.

    없었다.

    더 이상은 어디에서도 아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린린은 벌떡 일어서서 아진이 있던 곳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돌아오겠지? 오라버니. 돌아오는 거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고 어떤 기분을 느껴야 하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사라진 거라고 생각이 든다면 당장 달려가서 찾아올 텐데 찾아 나서야 하는 건지 기다려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지독하고 끔찍한 형벌인지 린린은 서서히 깨달아 가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을 기다렸던 수많은 사람들을 떠올렸다.

    그때 왜 갑자기 설인정이 떠올랐을까.

    설인정이 자신을 보면서 보였던 그 감격스러운 표정을 린린은 아주 오랫동안 이해하지 못했다.

    어쩌면 지금까지도 그럴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설인정. 염마는 만났느냐. 염마가 네 부탁을 들어줬느냐. 너는 어디에 태어났느냐.’

    끝도 모르게 조급해지던 마음이 조금은 안정이 되었고 린린의 입가에 웃음이 감돌았다.

    린린은 기막을 치웠다.

    그러자 언덕을 지나가는 바람이 보였다.

    낮게 자란 풀들을 어루만지는 것 같더니 너구리들을 쫓아다니며 머리를 쓰다듬기도 했다.

    유독 움직임이 다른 한 줄기의 바람.

    서도진이었다.

    바닥을 넓게 쓸었다가 혼자 치솟아 올라가기도 하고 그대로 언덕 끝에 서서 이리저리 휘몰아치더니 절벽을 향해 내달렸다.

    린린은 신법을 펼쳐 절벽으로 달려갔다.

    바람이 절벽에서 떨어졌다.

    끝도 보이지 않는, 까마득한 낭떠러지에서 소름 끼치게 무서운 광풍이 휘몰아쳤다.

    그것은 아진이 아니었다.

    린린은 그 자리에 못 박힌 것처럼 앉아서 아진이 불어 가는 것을 보았다.

    커다란 파도가 일고 하얀 포말이 부서지자 바람이 놀란 듯 위로 솟구쳤다.

    린린의 얼굴에 웃음이 지어졌다.

    아진이 뭘 하고 있는지 이제 보였다.

    바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바람이 일으킨 일은 보였다.

    화가 난 파도를 보면 아진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아진은 실컷 파도를 놀리다가 솟구쳐 올라왔다.

    그 높은 절벽을 거슬러서.

    ‘나를 봤나?’

    린린은 깜짝 놀라며 벌떡 일어섰다.

    아진이 맹렬히 올라와 린린을 세게 치는 바람에 린린은 고개를 돌리고 웅크려야 했다.

    이 무식한 오라버니!

    린린의 옷자락이 깃발처럼 펄럭거리며 소리를 냈다.

    린린의 얼굴에서 함박웃음이 터졌다.

    아진은 하는 김에 린린의 몸을 떠올려보려고 했는지 아예 작정을 하고 그 주위에서 몸을 부풀렸다.

    린린은 순순히 져 주지는 않겠다는 생각으로 바닥에 발을 꽉 붙이고 버텼다.

    아진의 커다란 웃음소리가 바람에서 느껴지는 것 같았다.

    버티고 버텼는데도 린린의 몸이 손가락 하나만큼의 높이로 떠올랐다.

    언제 왔는지 너구리들이 린린의 주위에 모여들었다.

    재미있겠다고 생각하면서 다음에는 자기도 좀 해 줬으면 좋겠다는 듯이.

    그러다가 갑자기 아진이 나타나자 깜짝 놀라서 도망쳐 버렸다.

    한꺼번에 도망치다가 저희끼리 밀리고 발이 엉켜서 서로 부딪치는 녀석들도 있었다.

    그렇게 구르고 밀리다가 떨어진 꽃잎들이 바람을 타고 허공에 떠서 린린의 머리 위에 떨어졌다.

    아진은 어느새 바람을 자유롭게 움직이고 있었다.

    “린린. 봤어? 오라버니가 하는 거? 이거 정말 엄청나다. 너도 배워 봐. 린린. 이거 진짜 대단해.”

    아진은 벅찬 감격이 다 사라지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나도 해 보려고는 했는데 잘 안 돼서.”

    린린이 시무룩하게 말하자 아진도 고개를 끄덕였다.

    린린이라면 웬만하면 포기하지 않고 함께 해 보려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명백한 벽이 존재했고 자기가 그 벽을 뛰어넘을 수 없을 거라는 것을 인정했다.

    그것을 알면서도 계속 그 벽을 두드리느니 자기가 잘할 수 있는 것을 하겠다고 마음을 고쳐먹은 것 같았다.

    아진은 다시 바람으로 변했고 이번에는 훨씬 더 오래 돌아오지 않았다.

    섬을 샅샅이 돌아보는 중인 것 같았다.

    린린은 또 아진을 하염없이 기다렸다.

    친구들과 노느라고 정신이 팔려서, 자기가 동생을 봐야 한다는 것을 깜빡 잊어버린 아이처럼 아진은 린린을 완전히 잊은 것 같았다.

    ‘아. 뭐야…… 심심한데.’

    린린은 아진을 기다리다 지쳐서 자기가 가지고 있던 책을 꺼냈다.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제대로 볼 생각도 거의 하지 않고 있었는데 심심하고 할 일이 없다 보니 이제는 거기에 눈이 갔다.

    “흠…….”

    다른 사람이라면 그것을 보고 재미를 느끼지 못했겠지만 린린은 아니었다.

    어느덧 린린의 손은 곤오철로 만든 검을 빼 들었고 자신이 본 구결을 외웠다.

    언제 따라왔는지 가장 높은 나무 위에 앉아 있던 제일조가 린린을 보고 내려왔다.

    심심하기는 제일조도 마찬가지였기에 린린의 대련 상대가 되어 주기로 한 모양이었다.

    잠시 후에 섬 한가운데에서 뇌성이 울렸고 깃털 몇 개가 타 버린 제일조가 하늘로 날아 올라갔다.

    지극히 평화로운 한때였다.

    * * *

    이야깃거리가 없는 객잔에 두 사람이 들어왔다.

    둘 다 죽립을 눌러쓰고 있었고 여기저기 해어진 잿빛 무복을 입고 있었다.

    한 사람은 훤칠하니 키가 컸고 다른 사람은 그 어깨에 머리가 겨우 닿았다.

    죽립 밑에서 나온 목소리는 중후하고 믿음직스러웠다.

    “어향육사랑 궁보계정도 하나씩 주시오. 과파육이랑 죽엽청 한 병도.”

    그 목소리는 조금 높고, 전체적으로 자갈을 밟는 것 같이 느껴졌다.

    목소리가 독특해서 자연스럽게 귀를 기울이게 됐는데 중후한 목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미안합니다만 과파육이랑 죽엽청은 취소입니다.”

    “아니. 왜? 내가 낼게.”

    “다 먹지도 못하면서 욕심 좀 부리지 마라. 너는 항상 그게 문제야. 어향육사랑 궁보계정도 다 못 먹을걸? 그럼 소면이랑 만두를 취소할까?”

    “객잔에 와서 먹는 거 오랜만이잖아. 간도 안 된 산짐승 잡아먹는 거 이제 질렸다고.”

    “그러면 점심에는 어향육사를 먹고 저녁에는 과파육을 먹어. 그럼 되잖아.”

    “한 번에 다 먹고 싶다고!!”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어느덧 흐뭇하게 웃음을 짓고 있었다.

    꼭 자기들 집에서 아이들이 옥신각신하면서 싸우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아서였다.

    “남기기만 해 봐라. 한 젓가락당 한 대씩 맞을 줄 알아.”

    “웃기시네. 나한테 손을 댈 수는 있고?”

    “웃기고 있네. 너 그 말 진지하게 하는 소리냐?”

    사람들은 점점 흥미진진해져서 이 두 사람이 갑자기 화해하지 않기를 바랐다.

    잘하면 재미있는 구경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던 것이다.

    “저…… 과파육이랑 죽엽청은 취소인가요?”

    점소이가 다가와서 얌전히 묻자 작은 사람의 죽립이 들렸다.

    “아뇨. 다 가져다주세요. 음식값은 미리 계산할게요.”

    “감사합니다. 죽엽청은 그냥 드릴게요.”

    “아. 그러면…… 한 병…… 더요?”

    점소이에게 주문을 하는 거면서도 눈은 맞은 편에 앉은 남자를 향했다.

    “너 아직 술 마실 나이 안 됐잖아, 인마.”

    “자기 동생 생일도 모르고 잘하는 짓이다. 여기! 다섯 병 가져다주세요!!”

    남자가 깜짝 놀라며 죽립을 벗더니 눈을 위로 뜨고 계산을 해 보는 것 같았다.

    “마, 말도 안 돼. 아닌데? 아직 몇 달 남았을 텐데? 정말이라고? 정말 생일이 지났다고?”

    “흥! 그리고 스무 살이 되기 전에는 술 마시면 안 된다는 법은 도대체 누가 만든 거냐고. 내가 아주 그냥!!”

    그 말을 한 사람보다 그 말을 따라준 사람이 더 이상한 것 같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스무 살 생일을 맞은 주인공은 그 자리에서 죽엽병을 전부 조져 주기로 마음을 먹었다.

    패월악 때 마시던 걸 생각하면 죽엽병이 웬 말이냐 싶기도 했지만 조그만 객잔에서 다른 술을 시키면 점소이가 당황하기만 할 것 같아서 그냥 죽엽청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본격적인 식사를 위해 죽립 끈을 풀어 옆에 내려놓자 깎아 놓은 듯 조각 같은 젊은 여자의 모습이 드러났다.

    맞은 편에 앉아 있던 남자 역시 죽립을 벗고 손으로 턱을 괸 채 동생의 얼굴을 흡족하게 바라보았다.

    아무도 이 만두가 스무 살을 넘기지 못할 거라고 했지만 이렇게 건강하게 자라서 자기도 이제 어른이라며 당당하게 죽엽청을 시키고 있었다.

    자기가 가르쳐 줄 건 전부 다 가르쳤다며 마선이 섬을 떠난 후로도 1년이 넘게 지났다.

    그 시간 동안 아진의 곁을 지켜 준 건 린린과 제일조였고 아진은 마선구검식을 완전히 해체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초식을 만드느라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고 그것을 아직 실전에 써먹지는 못했지만 그는 실전에 써먹을 기회가 빨리 돌아오지 않기를 바랐다.

    숙수는 솜씨가 좋았고 요리가 옮겨지는 동안 린린의 눈이 초승달 모양으로 접혔다.

    “그래. 일단은 먹고 보자. 그리고 생일 축하한다. 린린. 이 오라버니가 잊을 리가 없잖아? 다 알고 있었어. 섬에서 나오면 챙겨 주려고 했지.”

    뻔한 거짓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린린은 이번에는 관대하게 넘어 가주기로 했다.

    드디어 섬에서 나왔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좋았던 것이다.

    주위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죽립 아래에서 드러난 모습이 너무 대단한 미인이라는 것에 한 번 놀랐고 그 소저가 엄청난 대식가라는 사실에 다시 한번 놀랐다.

    객잔도 그렇고 객잔이 들어선 지역도 그렇고 이만한 미인이 나타나면 괜히 몰려들어 시비를 걸고 시시껄렁한 농담을 던질 만도 했는데 그곳에서는 한동안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

    그들이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느껴진 심상치 않은 분위기 때문이었는데, 분위기 파악을 못 하는 사람들은 세상 어디에나 존재하는 법이었다.

    드르륵, 문이 열리고 한 무리의 사람들이 요란하게 들어왔다.

    빈자리를 찾던 이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한곳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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