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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349화 (349/470)

제349화

349화

“네가 아는 심법을 잊으라고 말하지 않더냐.”

아진은 머리에 타격감을 느끼며 마선의 심법에 집중했다.

신기한 것은 마선이 새로 알려준 심법이 위도의 섬에 적혀 있던 심법과 같았다는 거였다.

그대로 하면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심법이 실은 자연지기를 채우는 방법이었다는 것을 알고 아진과 린린은 한동안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자연지기에 대한 설명을 듣고도 린린은 이제 와서 심법을 바꾸는 건 너무 위험부담이 클 것 같다면서 바꾸는 것을 포기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린린은 그 심법을 자신이 익힐 수 없다는 것을 먼저 깨닫고 선수를 친 거였다.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는 심법이라던 두 사람의 평가는 그렇게 잘못된 것도 아니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도전할 사람은 시도해 볼만도 하지만 린린처럼 지금의 자신에게 충분히 만족하고 그 위의 세계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은 굳이 기웃거릴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마선은 기쁜 마음으로 아진에게 그것을 가르쳐 준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당대의 교주라는 신분으로 린린이 교주의 명령을 들먹이고 나오는 바람에 어쩔 수가 없었다.

아무리 선배라고 해도 마선은 마신을 믿는 이였고 마신의 율법에서 교주의 명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모르지 않았던 것이다.

린린은 마선을 자기에게 복종시키고 아진에게 심법과 마공을 전수하게 한 후에 자기는 할 일을 다 했다는 듯이 게으름을 부리고 있었다.

“그런데 선배님. 그 섬에는 어떻게 가셨던 거예요?”

아진이 자연지기를 만들기 위해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집중하는 동안 린린이 물었다.

“그건 무슨 소리냐.”

“섬에서 선배님의 심법을 봤거든요. 마선구검식이랑요.”

“……그게 무슨 말이냐.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냐. 패월악!”

그는 다급해지면 린린을 패월악이라고 불렀는데 마선의 그런 태도를 보면서 린린도 슬슬 정신이 드는 듯했다.

“선배님이…… 남기신 게 아니면 그게 왜 거기에 있…….”

“그게 무슨 말이냐고 했다. 내가 내 심법을 왜 섬에 남겨 놓는다는 말이냐. 다 죽어 가는 사람도 아니고 이렇게 팔팔한데. 지금껏 제자를 둔 일도 없고 다른 이에게 가르쳐 준 적도 없는데 내 심법이. 거기가 어디냐!”

그는 말을 제대로 잇지도 못하고 버럭 소리쳤고 린린은 섬이 있는 곳을 가르쳐 줘도 되나 하는 표정으로 아진을 보았다.

“가도 이제 거기에 그거 없잖아. 린린. 곤오철을 우리가 어떻게 얻었는지 잊었냐?”

“아. 맞다. 그게 적혀 있는 거 전부 부쉈는데…… 그래도 적어 두기는 했습니다. 선배님.”

린린은 마선이 그렇게 화를 내는 걸 오랜만에 봤고 왠지 이번의 잘못에는 자신의 지분도 조금 있는 것 같아서 더 이상 잔말을 하지 않고 꽁꽁 꼬불쳐 두고 있던 책을 꺼내주었다.

마선은 충격이 가시지 않는지 덜덜 떨면서 린린이 준 책자를 받아서 급하게 넘겼다.

“절반쯤 뒤에 있을 겁니다.”

린린이 소심하게 말하자 마선이 책의 반을 통째로 넘기고 뒷장을 급히 넘겼다.

그러다가 마침내 자신의 심법과 마선구검식이 나오는 것을 보고 얼굴이 하얗게 되었다.

그것은 그의 것이 맞았다.

그게 어떻게 책에 활자로 적혀 있을 수 있는 건가 해서 그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린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마선을 보았다.

그의 얼굴만 봐도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알 것 같아서였다.

그러면 이건 또 무슨 조화라는 말인가.

그는 섬에 가지 않았고 섬에 있는 바위에 그것을 새겨넣지도 않았는데 그것들이 저절로 적힐 수는 없는 게 아닌가.

“곤오철은 또 무슨 말이냐.”

마선이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자 린린은 아진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나 아진은 그런 일이 자기와는 상관없다는 듯이 공력을 자연지기로 전환하는 것에만 모든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금방 될 것 같다가 손끝에서 아슬아슬하게 사라져 버리는 것 같은 느낌 때문에 화가 나서 죽을 것 같았다.

“으으으으……!”

아진은 좌절에 빠져 탄식을 했다.

린린이 설명을 하는 동안 마선은 조금씩 화를 가라앉히는 것 같았다.

마선은 위도의 섬에 대해 알지도 못했고 너구리가 돌아다닌다는 섬에는 가 본 적도 없었다.

린린이 하는 말을 들어 보면 그곳까지 쉬지 않고 신법을 펼쳐야 갈 수 있는 것 같은데 그런 곳이라면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났다고 해도 기억에서 저절로 잊힐 수는 없을 듯했다.

그런데도 린린이 필사해 놓은 내용은 자신의 것이 맞아서 더욱 할 말이 없었다.

“다른 것들도 내가 봐도 되겠는가. 교주.”

“그러세요.”

마선에게 아진이 전수받을 것이 많아서 이런 걸 아낄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린린은 흔쾌히 승낙했다.

마선은 그것들이 그 섬의 바위에 적혀 있었다는 말을 떠올리며 다른 것들도 자신의 무공과 비슷한 수준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기대에 훨씬 미치지 못했고 마선은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나도 거기에 한 번 가 보면 좋겠군. 이럴 게 아니라 거기에 가서 수련을 하면 어떻겠는가.”

그들은 심산의 모처에서 매일 수련을 이어 나가고 있었는데 마선에게서 그 말을 듣고는 아진과 린린의 눈이 동시에 동그래졌다.

왜 진작 그곳을 떠올리지 못했을까 해서였다.

“좋은 생각입니다. 바로 가시지요.”

그동안 린린과 마선이 나누는 얘기를 듣지 않는 것 같더니 아진이 가장 먼저 일어섰다.

어차피 짐이랄 것은 각자가 가지고 있는 옷 서너 벌이 거의 전부였다.

거기에 곤오철로 만든 검을 각각 집어 들고 린린과 아진이 마선을 바라보았다.

마선은 두 사람이 떠날 준비를 마칠 때까지 린린이 준 책을 보고 있을 생각을 하고 있다가 둘이 벌써 준비를 끝마치고 자기만 바라보는 것을 알았다.

“무슨 준비가 벌써…….”

그러고는 그도 그들을 따라나섰다.

작정을 하고 신법을 펼치면 다른 사람에게 뒤처지지 않는 아진이었지만 마선에게는 안 되었다.

한 줄기 바람이 되어 불어 가는 마선은 얼마든지 빨라질 수 있었다.

그가 더 서두르지 못하는 것은 섬의 위치를 알지 못해서였다.

아진도, 린린도 신법이 느리다고 재촉을 받는 사람들이 아니었지만 마선과 함께 갈 때는 상황이 달라졌다.

그들이 신법을 펼치는 동안 제일조가 같이 날았다.

제일조는 아진이 수련을 하는 동안 그 주위에서 머물다가 사라지곤 했다.

어느 때는 흑주와 함께 오기도 했다.

제일조는 아진이 이곳에 있는 게 이상한 듯했다.

집이 여기가 아닌데 왜 여기에서 이렇게 옹색하게 살고 있는지 걱정이 되는 것 같았다.

제일조는 아진이 조만간 돌아갈 거라 생각하고, 그때 같이 가려고 기다려 주는 듯했는데 이제는 산본의가가 아닌 다른 방향을 향해 전력으로 신법을 펼치자 조금 더 고민이 깊어지는 것 같았다.

그래도 언제나 마음을 굳히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고 아진을 따라 움직였다.

“아 참. 오라버니. 우리가 섬으로 간다는 걸 역천마의한테는 알려 줘야 할 것 같은데.”

린린의 말에 아진은 잠시 멈췄다.

역천마의는 린린의 명에 따라, 전에 발견한 것과 같은 동굴이 있는지 알아보는 중이었다.

동굴 벽을 부수지 않고 벽 바깥의 기운이 확연히 다르게 느껴지는 곳이 있는지 알아보라는 난해한 명을 수행하기 위해 며칠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연구에 몰입한 역천마의는 자신의 제자들을 데리고 동굴마다 다니며 하나씩 수색을 하고 있었다.

끝이 있기는 한 작업인지 모르지만 그래도 그것이 린린에게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포기하지도 못하고 열과 성을 다하고 있었다.

혹시 알아 낸 게 있으면 지금까지 있던 곳으로 소식을 전해 올 텐데 위도의 섬에 가 있을 거라는 사실을 알려야 할 것 같았다.

아진이 제일조를 바라보자 손짓할 필요도 없이 제일조가 날아왔다.

시킬 일이 있다는 것을 알고 이미 아진을 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사이에 린린은 역천마의에게 전할 내용을 적어 놓고 그것을 제일조의 서찰통에 넣어 주었다.

제일조는 서찰통이 잘 매달려 있는지 확인하려는 것처럼 한 번 휙휙 차 보고는 높이 날아올랐다.

그러는 동안 성질 급한 바람이 두 사람 주위를 몇 번이나 맴돌았다.

* * *

마선은 그동안 린린이 그 섬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들으면서도 그 말을 전부 다 믿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린린이 딱 필요한 얘기만 해 왔던 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떻게 이런 곳이 다 있다는 말이냐…… 교주.”

마선은 자기가 왜 그곳에 왔는지 잠시 잊은 채 멍하니 섬을 구경했다.

이렇게 평화로운 곳이 있을 거라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너구리들은 저희끼리 장난을 하고 있었고 사방은 시원하게 뚫려 있었다.

그는 바람으로 변해 절벽과 해안 곳곳을 구경하고 돌아왔다.

아진은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자마자 공력을 자연지기로 바꾸는 일에 다시 돌입했고 그곳에서는 전보다 그 작업이 훨씬 순탄하게 잘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린린. 너 여기에서 운기 해 봐. 대기에 녹아 있는 기운이 다른 곳이랑 다른 것 같은 느낌이야.”

린린은 아진의 말대로 했고 정말 그렇다는 것을 깨달았다.

영초가 지천으로 자라는 곳이라서 그런 건가 하면서 린린은 쉬지 않고 신법을 펼치면서 소진되었던 내공을 채웠다.

“진작 여기로 올 걸 그랬다.”

그렇게 편안한 기분을 느끼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수많은 사람들, 수많은 가문, 문파의 일을 고민하고 걱정할 필요 없이 지금은 그저 자신만 생각하면 되었다.

그럴 수 있다는 게 신기하게 느껴질 정도로 그동안은 그럴 시간이 없었다.

아진은 공력이 자연지기로 바뀌었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을 인식한 순간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리기는 했지만 이번에는 단서를 잡은 것 같기도 했다.

‘그 부담감 때문이었던가 봐. 여전히 나한테는 부담감이 커서. 내가 모든 사람들을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이 나를 붙잡고 있었던 건가 봐.’

아진은 조금씩 더 자신을 내려놓기로 했다.

내가 아니어도 모두 다 잘할 거라는 생각.

다른 사람들이 그 자리를 채운 채 잘 이끌어갈 거라는 생각.

자신이 사라져도 웃음소리가 계속 이어질 거라는 생각.

그런 생각에 아진의 마음이 조금씩 가벼워졌다.

아무 걱정도 없이 어린 도종의 뒤를 따라 달려가며 웃어대는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가 아마도 그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니. 그건 아니구나. 린린이 태어났을 때야말로 정말 좋았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서로 린린을 먼저 안아 보려고 가족들이 린린의 방으로 달려가는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졌다.

가주도, 도종도 마찬가지였다.

환자들을 진료하는 동안에도 오직 린린 생각만 했던 것처럼 마구 달려와 린린을 안는 그들을 보면서 얼마나 행복했었는지.

하마터면 어머니의 뱃속에서 나오지 못하고 죽을 뻔했던 린린이라 더 그렇게 소중했을 것이다.

걱정할 거라고는 아무것도 없던 순간.

자기가 해야 할 걱정은 어머니와 아버지가 대신 짊어져 주었던 시간들.

그날의 아진으로 돌아가자 그의 몸이 조금씩 가볍게 떠오르는 것 같았다.

생각해 보면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아진이 처음 그곳에 왔을 때 산본의가는 상황이 좋지 않았고 아진은 처음부터 많은 일을 스스로 해야 했었다.

혈천방의 왈패들과 싸우고 그들을 산본의가의 손님으로 맞아들이는 일부터 시작해서.

그러나 그때도 아버지와 어머니의 일을 도와준다는 의미였지 아진에게 거는 사람들의 기대는 전혀 없다시피 했다.

‘그 차이였나 보구나. 그때는 내 일이 아니었어. 성공하지 않아도 되는 거였고. 내가 이루어내는 성공은 다 부수적인 거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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