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5화
345화
“혹시 내가 서 의원에게 져 주기를 바라나.”
그렇다고 해도 부탁을 들어 주려고 한 건 아니고 린린의 생각이 궁금해서 물어본 거였는데 린린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제 큰오라버니가 스스로 이룰 일입니다. 선배님께서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내가 신경 쓰지 않으면 이기지 못할 텐데.”
“사실 우승은 그렇게 큰 의미가 아니지 않겠습니까. 랑랑은 영리한 아이입니다. 제 아버지가 지금까지 해 온 것을 모를 아이가 아닙니다. 도전은 훨씬 전에 멈출 수 있었는데 지금껏 이어져 왔지요. 도전이 끝날 때까지는 계속해 나가겠지만 필요 이상의 의미를 두지도 않습니다.”
옆에서 보면 거기에 목숨을 건 것 같던데 너무 간단히 말을 해서 마선은 조금 심술이 났다.
“어차피 제가 부탁했다고 해도 선배님께서는 최선을 다하실 생각이 아니었는지요.”
“그래. 그렇지.”
“부탁드린 걸 알면 큰오라버니가 크게 화를 낼 겁니다.”
천하의 패월악이 그런 사람을 무서워한다는 건가 하면서 마선이 재미있다는 듯 린린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린린이 그 의미를 알겠다는 듯이 웃었다.
“선배님. 무서운 사람이 생긴다는 건 상당히 기분 좋은 일입니다. 통제받는 것도 재미있는 것 같고 가끔씩 의욕이 넘칠 때는 정말 즐겁습니다.”
“…….”
마선은 설마하니 린린에게 그런 말을 듣게 될 거라고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누가 그렇게 무서운데?”
“어머니랑 아버지도 그렇고 오라버니의 스승님도 그렇고 큰오라버니도 그렇고 곳곳에 좀 많이 있습니다.”
무서운 사람이 많다고 자랑하는 패월악이라니.
그런데 왜 그게 부러운 걸까.
마선은 당연히 무서운 사람이 없었다.
상당히 오래전부터 그랬다.
‘무서운 사람이라.’
아마도 그때부터였지 않았을까.
그가 자신의 모든 짐을 혼자 져야 했던 것은.
무서운 사람이 있었을 때는 그들의 등 뒤에서 바람을 피할 수 있었던 것 같았는데.
아버지가, 어머니가, 스승님이 떠나고 그가 권위를 인정하던 사람들이 하나둘 떠나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외로워지고 괴로웠던 것 같았다.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린린이 말한 무서운 사람은 그 후로 아무리 떠올려 보려고 해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마치 그 어색한 적막감에서 구해 주려고 하기라도 한 것처럼 밖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서도종과 서도진의 비무가 시작된다는 소리였다.
* * *
사람들은 경기장에 서 있는 두 사람이 아진과 도종이라는 사실에 조금은 기이하다는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아진은 그런 기분을 느끼게 만들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도종이 그곳에 있다는 것은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지금껏 기기묘묘한 방식으로 다른 이들을 하나하나 꺾고 마침내 그 자리에 선 도종을 보면서 사람들은 경이로움까지 느꼈다.
하루하루를 통해 그렇게 변해 가는 사람을 그들은 결단코 본 적이 없었다.
“시작하시지요.”
아진이 선수를 양보하자 도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신중하게 검을 뽑아 들었다.
“저게 곤오철로 만든 검이래.”
“이번에는 구경거리가 정말 차고 넘치는군. 곤오철로 만든 검까지 보게 되고.”
사람들은 그 검에 검기와 검강이 맺히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기대감에 부풀었다.
도종은 긴장감에 짓눌릴 만도 했지만 자신이 의도한 대로 검식을 풀어 갔다.
아진은 도종을 봐주지 않았다.
자기가 봐줘서 얻는 우승을 도종이 결코 바라지 않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도종은 여기까지 온 것도 믿기지 않는 듯했고 아진과 이렇게 함께 비무를 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크게 만족스러운 것 같았다.
그러나 비무는 비무였고 그들은 승부를 내야 했다.
“랑랑이 아버지랑 숙부님이에요.”
어디선가 귀여운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은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웃음을 지었지만 아진은 그러지 않았다.
도종은 잠시 주의가 흔들린 것 같았는데 아진은 웃지도 않은 채 여분의 검을 꺼내 들었다.
검을 잡은 손 모양이 이상하다는 생각을 할 틈도 없이 그것이 허공을 향해 멀리 날아갔다.
사람들은 아진이 뭘 하려는 건지 알지 못한 채 검이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
그것을 눈속임이라고 생각한 이도 있었고 도종도 그렇게 여기며 공격을 다시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눈속임이 아니었다.
허공에서 몇 번이나 휘휘 돌면서 날아간 검의 면이, 경기장에서 오 장 정도 떨어진 벚나무의 기둥을 강하게 때렸고 조심스럽게 꽃잎을 매달고 있던 벚나무에서 꽃잎이 떨어졌다.
사람들은 아진이 왜 갑자기 그런 짓을 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게 해서 시야를 가리게 할 수도 없고 그 조그맣고 연약한 꽃잎을 날려 사람을 상하게 할 수도 없을 것 같았다.
아진의 의중을 모르기는 도종도 마찬가지였다.
도종은 그냥 정정당당하게 싸울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검격을 휘둘렀다.
아진은 도종을 능히 상대해 주면서 꽃잎도 잊지 않고 있었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날씨였는데 나무에서 떨어진 꽃잎들이 일제히 날았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이 서 있는 경기장까지 날아와 그 주위를 느리게 맴돌았다.
눈송이처럼 작은 잎의 안쪽에서 희미한 붉은 빛이 번지는 꽃잎은 주위를 순식간에 몽환적인 분위기로 만들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진이 비무 대회를 구경하는 이들에게 축제의 분위기를 만들어 주려고 그런 건가 하며 그 모습을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그들은 그것이 갑자기 까맣게 물들면서 재가 되어 쏟아져 내릴 때까지도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지 못했다.
“도…… 독장이다……!!”
누군가 외쳤고 사람들은 아진의 신형에서 검은 아지랑이 같은 것이 피어오르는 것을 보았다.
독장은 정확히 경기장 주변에서만 맴돌았고 도종은 검기로 독장을 베어냈다.
“그냥 쉽게 이기게 해 줄 생각은 없는 모양이군.”
황제가 하월에게 말하는 동안 하월도 놀란 눈으로 경기장을 지켜보았다.
도종은 아진의 독장을 베어낸 후 아진을 바라보았다.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럴 때 어떻게 하라고 했는지.
‘골치 아픈 말을 걸어오는 사람이 있으면 어떻게 하라고 했더라?’
그리고 도종은 아진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럴 때는 그 말을 무시하고 형님도 더 이상한 말을 해 버리라고.
전투도 마찬가지라고.
당혹스러운 공격이 들어오면 그 공격에 휘둘리지 말고 자신의 것을 해 나가라고 했다.
그게 어려우면 어떤 공격에는 그냥 몸을 내어 주고서라도 그렇게 하라고 했는데 이번 공격은 그렇게까지 할 수 있는 건 아닌 것 같았다.
꽃이 재가 되었다.
그것이 사람의 몸에 닿으면 어떻게 될지 알지 못했고 확인해 보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제선문주는 비무 대회에서 일찌감치 탈락한 후에 계속 이런저런 독을 만들어서 각자에게 공급해 오고 있었는데 제선문주 때문에 비무의 결과가 더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렵게 나오기도 했다.
도종은 급한 대로 장력을 일으켜 꽃잎과 독장을 날렸다.
그러나 아진은 고집스럽게 다시 독장을 날렸고 도종은 손에 불을 일으켰다.
삼매진화가 터무니없을 정도로 쉽게 그의 손에서 펼쳐지는 것을 보면서 사람들은 탄식 같은 함성을 내뱉었다.
독이 화기에 약하다는 것을 알고 한 일이었는데 그것은 정확하게 맞아 떨어졌다.
바람을 타고 간 불길이 아진의 독장을 태워 버렸고 아진은 망연한 얼굴을 했다.
제선문주에게 새로 받은 독이 꽤 마음에 들었는지, 서운한 기색이 꽤 오래 얼굴에 남아 있었다.
도종은 간신히 급한 불을 껐다고 생각하며 그때부터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신의 공격을 펼쳐 나갔다.
그가 침통을 꺼냈을 때 사람들은 지금까지 봐 왔던 것과 비슷한 유형의 공격이 나올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다시 보더라도 지루하지는 않은 장면이라고 생각하며 더욱 집중했다.
산본의가의 비무 대회가 아니었다면 이런 구경을 이렇게 풍성하게 하기는 어려웠을 거라고 느끼면서.
그러다가 도종의 침통에서 나온 침이 전에 보던 것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사람들은 더욱 집중했다.
그동안은 침을 손가락 사이에 끼워서 날리는 식이었는데 그때는 침통을 입에 대고 불었다.
그러자 민들레 홀씨 같은 가늘고 얇은 침 수백 개가 아진을 향해 한꺼번에 날아갔다.
특정한 혈을 노리는 것이 아니라 그의 몸을 전부 뒤덮어 버릴 기세로 날아가는 침을 보며 사람들은 기겁했다.
거기에 독이라도 묻어 있으면 피할 길이 없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진은 거기에 순순히 맞아 줄 생각이 없다는 듯 검을 휘둘러 검풍을 날렸다.
힘없이 팔랑거리던 침은 그대로 땅에 떨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사람들의 착각이었을 뿐, 잠시 바닥으로 향하던 침은 어느새 다시 아진을 노리고 날아갔다.
허공섭물로 그것을 조종하고 있는 건가 했지만 그러기에는 이유가 부족했다.
그만한 공력을 소모해서 침을 날리기보다는 차라리 그 공력으로 더 강력한 공격을 준비하는 게 나았던 것이다.
그러던 아진의 얼굴이 갑자기 일그러졌다.
“으으윽!”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것처럼 신음까지 나왔다.
그 신음이 극한의 통증 때문에 나오는 것과는 왠지 어딘가 미묘하게 달랐다.
사람들은 아진이 왜 그러는 건지 알지 못한 채 서로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거냐고 물었다.
그러나 그들도 알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눈앞에 팔랑거리던 현란한 침들이 전부 다 눈속임용이었다니.
아진은 그것을 무시하고 제 방식으로 공격을 재개하기로 마음먹은 순간 몸이 이상한 것을 느꼈다.
‘이게 뭐지?’
그런 생각으로 그가 잠시 얼굴을 찌푸렸을 때 도종의 얼굴에 ‘됐다!’라는 듯한 표정이 지어졌다.
참을 수 없는 배변감이 느껴지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설마 약을 먹인 건가 했지만 그건 아니었다.
‘혈을 짚은 거라고? 언제?’
그런 질문이야 의미가 없기는 했다.
하려고만 했다면 침 하나를 몰래 날려서 꽂는 것은 도종에게 문제도 아니었을 테니까.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진은 자기가 느끼는 증상을 해소해 줄 자리에 침을 놓으려 했다.
그러나 일순간 모든 정신을 한 곳에 집중해야만 했다.
언젠가 자신이 악진혁을 골탕 먹였던 때의 일이 생생하게 떠오르는 것 같았다.
아진은 이마에서 식은땀을 흘렸다.
왜 그러지? 중독된 건가?”
상황을 알지 못하는 이들은 아진이 그러는 이유를 알지 못했고 아진은 결국 대의를 위해 스스로 그 자리를 떠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가 바닥을 박차고 사라지자 심판관과 진행 요원들은 이게 무슨 일인지 의아해하면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우승을 밀어주려고 그런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올 만도 했지만 가까이에서 있으면서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지켜봤던 사람들은 막판에 아진이 사경을 헤매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는 것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서도종 의원의 승리입니다.”
심판관의 말에 관중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단지 의원들만큼은 그 자리에서 풀쩍 뛰어오르며 두 손을 높이 들고 환호성을 질렀다.
마선은 뭔가 이상한 냄새가 난다고 생각하며 혼자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바람으로 변한 채 의원들 사이를 누볐다.
그리고 도종이 날린 가느다란 침들은 연막용이었고 아진의 시선이 거기에 집중된 틈을 타서 배변 작용을 관장하는 혈을 집중적으로 자극해서 아진을 궁지에 몰아넣은 거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처음에는 애들 장난같이 유치하다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깨달았다.
아진은 비무에 나오면서 겹겹이 옷을 껴입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침술을 할 때처럼 옷을 들어 올리고 맨살을 대 주고 있었던 게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정확히 그 혈 자리를 찾아서 침을 날린다는 것이 절대로 쉽지 않을 거라는 것을 그도 알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