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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344화 (344/470)
  • 제344화

    344화

    소청의 검은 목검처럼 아주 가볍고 자연스럽게 들려져 있었지만 그 무게는 상상을 초월했다.

    마선은 두 개의 소검을 가지고 선 채 소청을 바라보았다.

    그런 경험도 낯설었다.

    눈앞의 상대를 마주 보기 위해 시선을 내려야 한다는 경험이 이제껏 얼마나 있었겠는가.

    소청은 단정하게 호흡을 이어나갔다.

    영리한 아이였다.

    자연스럽게 서 있는 것 같았지만 빈틈이 없었다.

    보통은 서로 기수식을 취하고 마주 섰을 때 빈틈이 몇 군데는 보이기 마련이었다.

    그러면 그곳을 노리고 들어가는 것으로 시작해 싸움을 시작하면 되었는데 이 어린 녀석에게서는 그것이 보이지 않았다.

    마선은 소청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노릴만한 곳을 살폈다.

    자신의 절기를 드러낸다면 소청을 쓰러뜨리는 것은 어렵지 않겠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이렇게 어린 녀석이 자신을 신경 쓰게 만들고 있다는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었다.

    소청이 먼저 검을 휘둘렀다.

    검강을 만들어 내지 않고도 자신의 키를 훨씬 뛰어넘는 검을 소청은 아무렇지 않게 휘둘렀다.

    소청이 다른 이들과 싸우는 것을 이미 여러 차례 봐 온 관중들도 그 모습을 보며 여전히 신기해했다.

    그러나 그런 감정은 오래 가지 않았다.

    소청을 어린아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은 경기장에 오르는 순간, 그리고 검을 들고 싸움을 풀어 가기 시작하는 그때까지였고 조금만 지나면 단지 한 사람의 검객으로 오롯이 서 있게 되는 것이다.

    압도적인 기량을 선보이며 상대의 빈틈을 노리고 쉬지 않고 짓쳐들어가는 사나운 짐승.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소청을 더 이상 어린아이라고 얕보지 못하게 만들었다.

    소청의 검에 푸르스름한 빛이 서리며 어느덧 검강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마선은 무덤덤한 얼굴로 바라볼 뿐이었고 들고 있던 소검으로 간단히 검강을 베어냈다.

    두 사람의 거칠고 강한 기운이 서로 맞물리면서 폭음이 일고 불꽃이 번쩍거렸다.

    한동안 그들 사이에서 우열을 가리기 어려운 공방이 벌어졌다.

    어린아이와 노인의 대결이었지만 사람들은 소청에 대해서 익히 알고 있었기에 여전히 거기까지 올라온 이변의 주인공을 마선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소청이 마선과 대등한 경기를 펼치는 것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마선을 대단하게 여겼다.

    잠시 거리를 벌리며 서로를 탐색하던 두 사람이 다시 마주 붙어 무기를 맞대자 경기장 바닥에 깔려있던 청석이 우지끈 소리를 내면서 부서지고 돌조각들이 솟아올랐다.

    진행 요원들은 관중들에게 날아가지 않도록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고 시간이 갈수록 상황은 더욱 긴박하게 치달았다.

    그러나 둘 중 누구도 경기를 제대로 풀어나가지 못하는 듯했고 시합은 지지부진하게 이어지기만 했다.

    소청은 상대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고 마선의 본신의 힘을 전부 드러내지 않은 채 자신에게 맞춰 나가려고만 해서 지금의 사태가 벌어진 것임을 알았다.

    몇 번 뚫고 나갈 기회를 엿보던 소청은 마침내 결심이 선 듯 가슴팍 앞으로 손을 들어 올리더니 그대로 마선을 향해 달려갔다.

    마선은 소청이 달려오는 것을 봤지만 거기에 곧바로 대응하지 못했다.

    달려온 소청이 생각보다 더 작아서였다.

    그러나 그것은 비무 중이었고 마선은 함부로 그런 생각에 빠지면 안 되는 거였다.

    검강을 덧입은 검이 마선의 가슴팍을 베고 지나가려 할 때 마선은 본능적으로 바람으로 변할 뻔했다.

    그러다가 수많은 사람의 앞에서 그 모습을 보일 수는 없다고 생각하며 버텼다.

    그의 가슴이 벌어지고 울컥 핏물이 솟구쳤다.

    마선의 입가에 웃음이 묻어났다.

    겨우 이런 꼬마에게 당했다는 생각에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져서였다.

    그러나 소청은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냐는 듯이 계속해서 검을 휘둘렀다.

    마선은 상황을 바로잡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릴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한 번 잘못 내디딘 발이 그로 인해 계속 그를 수렁으로 깊게 인도하는 것 같았고 그 후로는 실수가 이어졌다.

    공력을 실은 소청의 검이 다시 한번 그를 노리고 들어오자 마선이 두 소검으로 급히 막다가 팔을 벴다.

    굉음과 함께 섬광이 번쩍거렸다.

    소청의 검이 잔상을 그려내며 쉴 새 없이 허공에서 춤을 추었고 마선은 결국 한 가지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자신의 힘을 드러낼 것인가.

    아니면 이대로 이 조그만 쥐방울 같은 녀석 앞에서 무릎을 꿇을 것인가.

    마선이 생각할 시간은 길지 않았다.

    그리고 소청이 다시 검을 휘두른 순간 마선의 모습이 사라졌다.

    “……!!”

    사람들은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 하며 눈을 부릅떴다.

    사라졌던 마선의 신형이 소청의 뒤에서 다시 나타났다.

    “언제 저기로 간 거지? 신형이 완전히 사라진 것 같았는데.”

    “저건 무슨 보법이지? 도대체 어떤 사문에 저런 보법이 있는 거지?”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동안 소청은 전혀 긴장하지 않은 채 그때까지 줄곧 자기가 해 왔던 대로 공방을 이어나갔다.

    그러나 마선이 바람의 힘을 드러낸 이상 소청은 마선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마선은 소청에게 이제 끝이라는 것을 알려 주려는 것처럼 소청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그가 들고 있던 소검은 이미 사라진 후였고 그의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랬기에 사람들은 그가 뭘 하는 건지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오직 소청만이 피 분수의 한가운데에 서서 붉게 젖어 들고 있었다.

    그런 일을 당하면서도 소청에게서는 비명 한마디 터져 나오지 않았다.

    어깨 밑과 옆구리, 허벅지와 팔에 구멍이 생기고 그곳에서 피가 솟구치는데도 소청은 어느 정도 예상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놀란 심판관이 아진을 바라보자 아진이 고개를 저었다.

    일단은 모든 것을 소청에게 맡길 생각이었던 것이다.

    마선은 여전히 소청의 등 뒤에 서 있었다.

    굳이 등 뒤에서 공격한 것은 세상이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해 주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그런 것쯤은 소청도 이미 질릴 만큼 알고 있었다.

    소청은 제 상처를 바라보았고 제 몸을 뚫고 나온 것이 검이나 창이 아닌 무형의 기운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마선은 그 자신이 바람과 흙으로 변할 수 있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것들의 힘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고 했는데 지금 소청의 몸을 관통한 것은 바람의 기운이 응집한 결정체인 듯했다.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알게 된 이상 그리 무섭지는 않았다.

    소청은 제 몸을 점혈해 피를 멈추게 하고 마선을 향해 마주 섰다.

    그리고 다시 검에 공력을 불어넣었다.

    그렇게 소청이 검을 들고 마선을 향해 달려 나가려 할 때였다.

    소청의 앞으로 불쑥 청석 조각들이 솟구쳐 날아올랐다.

    마선이 바닥을 조종해 터져 오르게 하자 그 위에 덮여 있던 청석 조각이 솟아오른 것이다.

    “……!”

    그것만으로는 소청이 포기하기 어려울지 모른다고 생각한 듯 마선은 소청의 주위로 그를 포위하듯 흙먼지를 솟구치게 했고 그 안으로 바람 칼을 날렸다.

    흙먼지로 가려진 시야 속에서 다시 한번 피 분수가 터졌다.

    마선은 진행 요원을 바라보았다.

    멈추라고 하면 멈출 용의가 있다는 듯 말이다.

    그리고 흙먼지를 스스로 치웠다.

    소청은 놀란 얼굴로 서 있었다.

    “제가…… 졌습니다.”

    압도적인 힘의 차이에 결국 소청이 말했다.

    억울하거나 분하다는 생각도 들 틈이 없는 듯했다.

    “너는 아직 어리다. 네가 나서기에 세상은 잔인할 정도로 험하다. 나는 네가 두려움을 느낄 줄 알았으면 한다.”

    마선 자신도 자기가 왜 그런 말을 중얼거리는 건가 했다.

    그리고 그 사실을 깨달은 듯 심판관을 바라보았고 그가 승리를 선언하자 급하게 경기장을 빠져나갔다.

    아진이 다가와 소청을 치료해 주었다.

    아진의 손이 닿는 곳마다 상처는 아물었고 피가 멈췄지만 이미 피에 젖은 옷은 그대로 붉게 얼룩져 있었다.

    “정말 대단했어요. 스승님. 세상에는 제가 모르는 게 아직도 많아요. 정말 신나요.”

    아진은 소청이 겁에 질려 한동안 검을 들지도 못하는 게 아닌가 하고 걱정을 했다가 어린 제자에게서 나온 말을 듣고 멍해졌다.

    “더 열심히 수련하고 다시 비무를 해 달라고 해야겠어요.”

    소청은 정말로 신이 난 듯 들썩거렸다.

    “너를 어쩌면 좋을까.”

    아진이 웃어 버리자 어느새 다가온 린린이 소청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누가 오라버니 제자 아니랄까 봐 소청이도 특이해.”

    소청은 졌지만 마선에게 본신의 힘을 사용하게 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다.

    * * *

    아진과 도종의 비무가 열리기 전 잠시 휴식이 주어졌다.

    관중들도 마선과 소청의 비무 때문에 너무 긴장해서 피로감을 호소했다.

    다음 순서를 기다리면서 린린이 멍하니 앉아 있을 때 그녀의 옆으로 다가온 사람이 있었다.

    “고명하신 선배님께 이제야 인사를 드립니다.”

    린린이 예를 갖추자 마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멀리서 본 적이 있지. 패월악.”

    “서이린입니다. 이 삶이 좋아서 이 이름이 좋습니다.”

    “그렇군.”

    “차 한잔할 시간은 있을 것 같은데 제가 대접하겠습니다. 객청으로 가시지요.”

    “그러면 사양하지 않겠네.”

    몇몇 사람이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들이 생각하기에는 린린과 마선 사이에 접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결승전이 끝나는 대로 마선에게 접근해서 그를 포섭하려 하고 있던 사람들은 혹시 산본의가에서 린린을 내세워 먼저 백수 검객에게 손을 뻗은 건가 하고 발을 동동 구르며 아쉬워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관심도 두지 않은 채 두 사람은 객청으로 자리를 옮겼다.

    “좋아 보이는군.”

    “선배님도 좋아 보입니다. 혹시 다르게 부르기를 바라신다면.”

    “아니. 그게 좋군.”

    “예.”

    마선은 신기하다는 듯이 린린을 보았다.

    패월악이었을 때 본 적이 있었기에 지금의 모습을, 특히나 린린에게 깃들어 있는 이 여유를 상상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염마를 만났나.”

    “예.”

    린린은 염마와의 일화를 들려 주었고 아직 염마를 만나지 못한 채 긴 삶을 이어 오고 있는 마선은 부럽다는 듯이 린린을 바라보았다.

    “선배님도 도전해 보세요. 해 볼 만 한 것 같습니다.”

    “그래 보이는군. 조만간 염마를 봐야 할 거라고 생각하기는 했는데…….”

    “그런데 저는 아주 운이 좋은 편이었고 선배님도 저처럼 운이 좋을 거라는 보장을 하기는 어려울 거예요.”

    “악담을 하는군.”

    “그런데 그게 사실이지 않습니까.”

    소청에게 세상의 쓴맛을 미리 알게 해 주겠다면서 기어이 꾹꾹 밟아 놓는 마선이나, 환생이 쉬운 게 아니라며 재를 뿌리는 린린이나 오십보백보였다.

    “독고소영을 잘 아는가.”

    “예. 오라버니의 사고님입니다. 선배님이 살려 주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정말 깊이 감사드립니다.”

    “그 여자를 살려냈다고 칭찬을 받을 줄은 몰랐는데 잘한 것 같군.”

    “다른 사람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본다고 뭐가 좋을까 했는데. 좋더군요.”

    “…….”

    마선은 그 말이 잘 와 닿지 않았다.

    “비무 대회가 끝나고 나면 어디로 가실 생각이신지요. 선배님?”

    “정해진 곳이 있겠나. 쉽게 죽기도 힘든 인생이라 그냥 여기저기 떠돌 뿐이지. 지금까지는 내 오지랖 때문에 원치 않는 문제를 일으키고 그 일을 수습하면서 살아왔는데 이제는 그런 것도 전부 다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세상에 귀를 닫고 살고 있네.”

    그가 얼마나 고달픈 삶을 살아왔는지 알 것 같아서 린린은 마음이 좋지 않았다.

    “여기서 같이 머무시면 어떠시겠습니까. 선배님?”

    마선은 대답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렇게 청해 준 것이 고맙기는 했다.

    게다가 그 사람이 패월악이어서 더욱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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