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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343화 (343/470)
  • 제343화

    343화

    어느덧 사랑하는 아내와 딸, 두 소중한 사람의 삶을 책임지게 된 도종은 자기가 어쩔 수 없이 그들을 실망시키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달고 살았던 듯했다.

    세상이 두려워하고 우러러보는 두 거대한 존재가 그의 동생들이라는 사실은 한없이 자랑스러웠지만 그로 인해 아내와 딸이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곤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동생들이 원망스럽거나 시기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자기도 비슷해질 수 있었으면 했다.

    그러면 아내와 딸이 힘들어할 일도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이 동생들이 천하 제일과 제이의 자리를 나눠 가질 만한 괴물들인지라 그게 영 쉽질 않았다.

    아진이 도종에게 특훈을 시켜주는 동안 도종은 몇 번이나 사선을 넘나들었다.

    그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었다.

    실제로 두 번은 심장이 멈춰 버려 죽었고 죽은 도종을 아진이 아무렇지 않게 살려냈다.

    그들은 불가능한 일을 해 나가는 중이었고 그 고통은 고스란히 도종이 견뎌 내야 했다.

    살아 있는 상태로 내장의 기관들이 위치를 옮기고 뼈가 뒤틀렸다가 자리를 다시 잡았다.

    기혈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아진의 손길이 미쳤고 혈도의 굵기와 벽까지 새롭게 조형되었다.

    그때는 그냥 모든 걸 다 포기해 버리고 싶은 마음도 들었고 왜 하필 자기가 아진의 형님인 걸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만약 다른 이의 형으로 태어났다면 불가능한 일을 불가능하다고 받아들이는 것이 훨씬 쉬웠을 것이다.

    그런데 이 괴물은 불가능한 것을 얼마든지 가능의 영역으로 끌고 와서 그 일을 이루어냈다.

    “아진아…….”

    고맙다는 말까지는 차마 나오지 못했다.

    그 말을 하면 오열하게 될 것 같았다.

    입술이 격렬하게 떨리는 바람에 도종은 한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아진은 형님이 참아 온 마음고생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컸다는 것을 깨닫고 그를 안아 주었다.

    자신의 고통이라면 묵묵히 버텼을 텐데 그것이 아내와 딸의 몫으로 돌아갈 거라는 생각 때문에 더 괴로웠던 듯했다.

    “형님은 내가 세상에서 가장 무서워하는 사람이야. 나는 형님처럼은 못 할 거야. 내가 형님 같은 근골을 가지고 태어났으면 나는 절대로 내가 하는 대로 놔두지 못했을 거야. 다 필요 없으니까 그만하라고 나를 발로 찼을 거야. 그게 뭐라고 어떻게 그걸 견뎌.”

    마비산을 썼다면 통증을 고스란히 겪어낼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만약 도종이 원했다면 그것을 사용했을 테지만 그 과정을 도종이 직접 느낄 수 있다면 거기에서 도종이 깨달을 수 있는 것이 분명히 있었다.

    인체의 구조와 혈맥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도종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아진은 도종에게 그 사실을 알려 주었고 도종은 주저하지 않고 마비산을 포기했다.

    “그런데 이거. 내가 써도 되는 거야?”

    도종이 아진에게 묻자 아진이 후련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어쩔 수 없지, 뭐. 형님이 이걸 못 들면 고민할 필요도 없이 내가 가지려고 했는데 형님이 들었으니까 형님이 써. 나는 방주님한테 새로 만들어 달라고 졸라야지. 이걸 만드는 동안 방주님도 성에 차지 않는 게 있으셨을 거야. 그러니까 두 번째 건 더 잘 나오겠지.”

    “…….”

    그게 괜한 소리라는 것을 도종은 알고 있었다.

    “나는 검으로 싸우는 사람도 아니고…….”

    도종이 사양해 보려고 말을 했지만 아진은 단호했다.

    “내가 가르쳤는데 그런 말을 하면 안 되지. 앞으로 형님은 그런 말을 하면 안 돼. 검으로 싸우는 사람도 아닌데 그런 검술을 하고 있다는 걸 알면 검의 끝을 보려고 평생을 쏟아붓는 사람들은 죽고 싶어질 거야.”

    “아…… 그렇겠다.”

    도종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했다.

    “공력을 넣어봐. 형님. 전부 다 받아들일 수 있을 거야.”

    “그래.”

    도종은 마침내 아진의 마음을 전부 받기로 결심한 것처럼 검을 들고 서서히 공력을 밀어 넣었다.

    초식을 펼칠 때는 필연적으로 그 사람의 성격이 묻어날 수밖에 없었다.

    아진과 린린은 도종이 검에 공력을 불어넣은 후에 검식을 펼치는 것을 보았다.

    온화하고 수려하고 차분하고 정순했다.

    패도적인 린린과도 달랐고 일방적인 아진의 검과도 달랐다.

    도종의 검은 부드럽게 말을 거는 듯했다.

    너는 이제.

    죽었다고.

    * * *

    그 시간이 세 시진이나 이어질 거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도종이 검식을 펼치는 것을 보면서 린린이 먼저 검을 들었고 도종은 자연스럽게 대련을 시작했다.

    거기에 아진까지 가세하자 세 사람은 서로가 서로의 적이 되어 전력으로 검을 휘둘렀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절초 중의 절초를 꺼내 들어 전개하는 동안 몇 번은 위기를 느꼈고 그사이에 끊임없이 해답을 찾아냈다.

    처음에는 도종이, 그다음에는 린린이 무아지경에 빠져들었고 어쩌다 보니 아진은 그들의 호법을 서는 신세가 되어 있었다.

    그러는 동안 그들의 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버렸고 때마침 불어온 바람이 그들의 곁을 머물며 땀을 식혀 주었다.

    “사고님을 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진의 말에 바람이 잠시 멈칫하는 것 같더니 그들의 몸을 식혀 주고 사라졌다.

    린린이 먼저 무아지경의 상태에서 빠져나왔고 아진은 린린에게 도종을 맡기고 먼저 철방으로 돌아갔다.

    기뻐하면서 검을 주었는데 검의 주인이 바뀌었으니 그 사실을 가장 먼저 방주에게 알려 줘야 할 것 같아서였다.

    방주는 그렇게 될 거라는 걸 어느 정도 예상하였는지 곤오철을 제련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방주님.”

    아진이 다가가 부르자 방주가 그를 보고 웃었다.

    “도종 공자님께 드리고 오셨습니까.”

    “예. 형님이 그 검을 들었습니다.”

    “그러면 그 검의 주인은 도종 공자님이었던 거지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번에는 진짜 공자님의 것을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서운하지는 않으십니까?”

    “왜 서운하겠습니까? 오히려 좋았습니다.”

    그러더니 그가 잠시 손을 멈추고 아진을 바라보았다.

    “이제껏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없습니다만.”

    그리고 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당대에 만들어진 명검 중 두 개가 제 손에서 나왔답니다. 그 사실을 자랑스러워한 때가 있었지만 이제는 그 이름을 입에 올리지도 않게 됐지요. 모두가 명검이라고 부르고 보검이라 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검을 만든 대가는 참혹하더군요.”

    씁쓸한 표정이 그의 얼굴에 짙은 그늘을 만들어 냈다.

    “예쁜 꽃을 보면 꺾어서 곁에 두고 싶어 하고 희귀한 새를 보면 날개를 부러뜨려서라도 눈에 보이는 곳에 두려는 사람들이 있지요. 재능을 가진 사람이 힘이 없으면 그런 꼴을 당하게 됩니다. 어느 날 공격을 당하고 정신을 차렸더니 심산이었고 그곳에서 2년 동안 감시를 받으면서 몇 개의 검을 만들었지요. 밖으로 나갈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건 먹을 걸 가지고 오던 사람이 더 이상 오지 않아서였는데…… 그러다 우연히 이곳에 발이 닿았군요.”

    아진은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듣고 당황해서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알지 못한 채 그를 보았다.

    “다시는 망치를 들고 화로 앞으로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천직인지 운명인지……. 그래도 처음의 그 마음을 다시 가질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달라지더군요. 사람들이 산본의가, 산본의가 하고 떠들어 대기에 이곳에 오면 내 마음도 고칠 수 있을까 했는데. 고쳐지더군요. 공자님.”

    그가 웃었다.

    어느 날 무슨 일을 당한 건지도 모른 체, 자기가 어디에 있는 건지도 모른 체 2년여의 시간을 도둑질당하고도 그는 지금 웃고 있었다.

    타인을 보며 문득 그 모습을 통해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는 순간이 있는데 그때가 바로 그랬다.

    방주는 뭔가 말을 하려다가 머뭇거리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공자님. 재능을 가진 이들을 아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울타리가 돼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건 저희에게…… 정말 큰 거거든요.”

    “……제가 드릴 말씀입니다.”

    “제가 만든 검의 진가를 알아보는 사람을 만나는 것도 큰 기쁨이지만 욕심을 접을 수 있는 사람을 보는 건 더 어려운 일입니다. 공자님의 검은 기대하셔도 좋을 것입니다.”

    “기대하겠습니다. 방주님. 그리고 다시는 그런 좋지 않은 일에 휘말리시지 않도록 지켜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공자님.”

    두 사람 모두 말을 하는 것에는 크게 재능이 없는 듯했고 이야기는 그 정도로 마친 채 헤어졌다.

    이제는 곳곳에서 바람이 불었다.

    마선은 아진이 자신의 존재를 알아차린 후에 대놓고 아진을 따라다녔다.

    그러면서 아진이 듣는 이야기를 같이 듣곤 했다.

    아진이 먼저 말을 걸어 보기도 했지만 마선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일도, 대답하는 일도 없었다.

    그러면 말하고 싶지 않은가 보다고 생각할 뿐 아진도 더 이상 재촉하지 않았다.

    새 검을 얻은 후 도종은 잠시도 쉬지 않으며 연무장에서 수련을 거듭했다.

    일찌감치 탈락한 사람들이 주위로 모여들어서 도종에게 도움이 될만한 얘기들을 해 주었고 특히나 북리의천은 자신이 창안한 검식을 보여 주기도 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가장 도움이 되는 건 흑주였다.

    흑주는 도종이 지칠 것 같으면 그의 등 뒤로 날아가서 명문혈에 붙어 기운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 때문에 도종은 계속 수련을 해 나갈 수 있었다.

    “흑주가 아니면 어쩔 수 없어서라도 쉴 텐데. 큰오라버니는 흑주가 원망스러울지도 몰라.”

    그러자 도종이 린린을 보며 웃었다.

    “아니야. 린린. 흑주 헷갈리게 하지 마. 흑주한테 얼마나 고마운데.”

    흑주는 그때부터 더 자랑스럽게 기운을 채워 주었다.

    * * *

    4강전이 재개되고 대진표가 발표되었다.

    소청이 마선과 붙고 아진이 도종과 붙었다.

    마선은 아진이 도종에게 일부러 져 줄 거라고 생각하며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다는 건지 의문을 품었다.

    랑랑의 동심을 지켜 주기 위해 수많은 사람이 힘을 합하고 아진은 곤오철로 만든 명검까지 도종에게 양보했다.

    그렇게 해서 랑랑이라는 아이의 마음에 아버지란 존재에 대한 믿음을 줄 수는 있겠지만 그런 믿음이 깨지기까지는 어차피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도 않을 거였다.

    세상이 그렇게 만만한 것도 아니고 말이다.

    마선은 그들이 벌이는 일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잠깐 동안은 같이 웃어줄 수도 있겠지만 마선은 그들이 현실을 외면하려고 앵속을 찾는 사람들 같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냉정한 현실이 사라지는 것도 아닐 텐데.

    그들이라고 해서 그것을 모르는 것도 아닐 텐데 왜 그러는 걸까 했다.

    그리고 생각이 그렇게 이어진 후에는 자기도 모르게 그 말이 입술에 매달렸다.

    ‘하여간 위선적인 정파 놈들이란.’

    그러나 우선 급한 것은 소청과의 싸움이었다.

    마선은 자신의 상대가 아진이기를 바랐다.

    소청 같은 아이를 압살해 버리는 건 그에게도 유쾌한 일이 아니었고 도종 같은 초보를 이겨도 크게 기쁘지 않을 듯했다.

    소청과 도종이 아니라고 해도 강한 자들이 많던데 왜 하필 이런 식으로 남은 건지 마선은 그것도 불만이었다.

    그러나 그곳에 있는 이들이 전부 그들의 실력으로 올라온 거라는 것을 부정할 만큼 제멋대로인 건 아니었다.

    예선전은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졌지만 4강전은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갖는 만큼 차례대로 열렸다.

    마선과 소청의 경기가 앞서서 이루어졌다.

    마선과 소청이 경기장으로 올라가자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예선전 초기에는 마선을 응원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지만 이제는 마선에게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많았다.

    눈독을 들이는 거라고 하는 게 더 적합할지도 몰랐다.

    백수 검객 송파운.

    비무 대회가 끝나고 나면 그 이름은 강호를 호령하게 될 터였다.

    그가 어느 문파에 소속되느냐에 따라서 그 문파의 명성이 단번에 오를 것이다.

    그런 그에게 사람들이 집중하는 것은 당연했다.

    심판관의 신호에 맞춰 두 사람이 서로에게 예를 갖추고 서로를 바라보며 기수식을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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