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러, 의선되다-341화 (341/470)

제341화

341화

“다시 한번 그 말을 해 보아라.”

처음 비무 대회에 참가하겠다고 접수대 앞에 섰던 사람과 같은 이라고 보기에 그사이에 기세가 몰라보게 달라진 그는 열호문에서 비무 대회에 참가한 사람 중 막내인 소토운이었다.

소토운은 사형들을 따라다니면서 구경을 하기 바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비무 대회를 움직이는 커다란 손과 친절한 보살핌에 대해 깨달았고 자기도 나중에 힘을 갖게 되면 반드시 산본의가 사람들처럼 힘을 사용할 거라고 마음먹었다.

그는 다른 누구보다 도종의 승리가 특히나 기뻤는데 지나가다가 사람들이 도종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것을 듣고 참을 수가 없었다.

“아니. 왜 이러시오? 나는 그냥 생각할 수 있는 걸 말한 것뿐이오. 의술을 행하던 의원님이 하루아침에 너무 엄청난 변화를 보이고 있으니 그런 게 아니겠소?”

입을 함부로 나불대던 자는 그때까지도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었다.

“하루아침에 너무 많은 변화를 보인다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고통을 감내하면서 자신을 깎고 깎아 냈다는 말이다. 그분은 너 같은 놈과는 질적으로 다른 분이라는 말이다. 그분이 참아 낸 고통의 백분지 일이라도 느껴보게 해 주랴?”

그러면서 소토운이 검으로 그의 팔을 베려는 순간 누군가 섬전처럼 다가와 손끝으로 검면을 밀어냈다.

아진이었다.

“공…… 자님. 죄송합니다.”

소토운은 아진을 알아보고 자세를 바로 한 채 고개를 숙였다.

아진도 그 상황을 진작부터 지켜보고 있었는데 사람들이 도종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는지 좀 더 들어보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자기가 나서서 입을 막을 수도 있겠지만 다른 이들이 나서 주지 않을까 했는데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오래 걸렸다.

남을 시기하고, 남 잘되는 꼴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 이들이 그렇게나 많았던 것이다.

“죄송할 것 없습니다. 오히려 제가 고맙다고 말씀드려야 할 텐데요.”

아진의 말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의 얼굴빛이 달라졌다.

그 말은 아진이 소토운의 행동을 지지한다는 말이었고 그 자리에 있는 이들에게 화가 났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말을 함부로 하지 마시오. 내 아버님은 인품이 따뜻하시고 형님은 대범하셔서 그런 말에 일일이 대꾸하지 않으시겠지만 나는 그렇지 않소. 당신 같은 자들이 건방지게 놀리는 혀로 내 형님이 흘린 땀과 피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되게 할 생각은 없소.”

“그…… 그것이 아니라. 저는 그저…… 지금 워낙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나고 있기에…….”

도종이 환단을 먹고 이긴 게 아니냐는 말을 했던 자는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당한 것이 억울하고 창피했는지 계속해서 그런 소리를 해 대고 있었다.

아진은 그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그의 머리 위에 있는 대기를 변화시켰다.

순간적으로 강한 압력이 깃들며 평범한 사람으로서는 감당도 하지 못할 압박감이 그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그는 자기가 왜 그러는 건지 알지 못한 채 몸이 점점 숙여졌다.

남들 앞에서 바닥에 엎드리는 모습을 보이고 싶은 생각은 꿈에도 없었지만 그는 허리를 구부리다가 바닥에 손을 짚었고, 무릎을 꿇더니 마침내 완전히 엎드리고 말았다.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웅성거리다가 자기들도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다고 생각한 것처럼 조금씩 뒷걸음질을 치다 완전히 도망쳐 버렸다.

소토운은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어렴풋이 짐작했다.

손은 움직이지 않았지만 아진이 무형의 기운을 발해서 상대를 완전히 제압해 버렸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

소토운은 그것이 자신과 아진의 차이라고 깨달으며 경이로움을 느꼈다.

“제 형님을 위해 나서 주어서 고맙습니다. 소협. 이 일은 잊지 않겠습니다.”

아진이 말하자 소토운은 얼굴이 빨갛게 익어 버렸다.

정작 제가 한 일이 너무 허술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혼자서 성을 들고 옮길 수 있는 사람이 수레바퀴 하나를 들어 주었다고 고맙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아닙니다. 공자님. 제가 한 게 뭐가 있습니까. 그리고 이 자들이 대공자님에게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함부로 떠들어 대는 것이 화가 나서 그랬습니다. 대공자님이 뼈를 깎는 고통을 견디면서 지금에 이르셨다는 것은 저희가 잘 압니다. 같은 시간을 버텨 온 사람들이라면 알 것입니다. 그러니 대공자님께서도 혹여 이런 말을 들으셔도 기분 상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시간을 버텨 온 사람.

그 사람들이라면 알 거라는 말을 듣고 나자 뭔가 답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진짜 중요한 것은 그런 사람들의 평가라는 생각이 들며 도종이 그런 사람들에게 인정받아 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소토운은 아진을 향해 고개를 숙여 보이고 자리를 떠났다.

하마터면 수습하기 어려운 일을 저질러 버릴 뻔했는데 때마침 나타난 공자 덕분에 그렇게 되기 전에 멈출 수 있어서 다행스러웠다.

* * *

4강전을 앞두고 며칠간의 휴식이 주어졌다.

그동안 숨 쉴 틈 없이 달려온 사람들을 위한 꿀 같은 시간이기도 했고 누가 최종 우승자가 될지 예상하면서 기대감을 끌어모으며 재미 요소를 극대화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 시간 동안 각 문파에서 자신들의 장기를 내보이기도 하고 무인들 간에 교류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잔치가 열렸다.

그 시간은 비무 대회에 참가한 무인과 구경하러 온 사람들을 위한 휴식 시간인 것과 동시에 개최자인 산본의가에도 잠시 숨 돌릴 시간이 되어 주었다.

그 시간동안 아진은 황제를 비롯해 여러 사람과 자리를 마련해 오랜만에 긴장을 풀고 다과를 들며 대화를 나누었다.

마선과 도종도 초대했지만 그들은 완곡한 말로 사양했다.

도종은 그 시간에 수련을 하고 싶었을 터였고 마선은 그런 자리에 끼고 싶은 마음이 없었을 것이다.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마선이 누구인지 궁금증이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황제와 선이남, 하월과 북리의천 등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숨길 것이 없던 아진은 마선에 대해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말해 주었다.

“백수 검객이라는 분은 한때 신교를 풍미했던 고수가 아니신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비무 대회에 참가하실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이유가 있었던 모양이지요. 지금까지 보이신 행동으로 미루어 짐작하자면 우승을 노리고 계신 것 같습니다. 돈이나 명예가 중요한 분은 아닐 텐데 왜 그러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북리의천도 마선이 소영을 살린 존재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래서 혹시 그가 소영에게 접근할까 해서 긴장한 채 지켜서고 있었는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마선은 독고소영이 자기가 살려낸 인물이라는 것을 알아냈지만 바람으로 변한 채 그 주위를 맴돌며 살펴본 결과 폭천의와 같은 일을 일으킬 염려가 없겠다는 것을 알고 그때부터는 완전히 신경을 끈 후 비무 대회에만 열을 올리고 있었다.

“도종 의원의 약진은 짐에게도 놀라웠다. 아진이 네가 작정을 하고 누군가를 바꿔 놓으려고 한다면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는 하다만 이번에는 정말 놀랍더구나.”

황제의 말에 아진은 고개를 저었다.

“제가 형님을 바꾼 것이 아닙니다. 형님이 바뀐 것입니다. 폐하. 이남 형님도, 하월 공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바꾼 것이 아니라 스스로 바뀐 것입니다. 폐하도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폐하 역시 마찬가지였으니까요.”

황제는 자신의 말을 반박하는 아진을 보며 전혀 화가 나지 않았다.

아진이 하는 말을 들으면서 그때를 돌이켜보고 결국 아진이 한 말이 맞다는 것을 깨달았을 뿐이었다.

자신이 아진에게 전해 받은 것은 내공과 무공 몇 가지였는데 그것을 견디는 것만 해도 얼마나 괴로웠던가.

그에게는 늘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다.

더 이상 못 견디겠다고 생각했다면 그만하라고 하고 포기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다시는 그 기회를 얻을 수 없을 거라는 생각 때문에 죽을 각오를 하면서 버티고 또 버텨 왔던 것이다.

그렇게 지금의 모습을 갖게 된 것이 아니던가.

‘다시 하라면 절대로 못 하겠지.’

황제 스스로 그렇게 생각할 정도였기에 다른 이들이 어떤 과정을 참아 냈는지, 지금의 도종이 얼마나 위대한지 알 것 같았다.

“그래. 그 말이 맞구나. 아진아. 짐이 실언하였다.”

황제가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이야말로 대단한 변화라는 것을 알고 있는 아진은 고개를 숙여 보였다.

“비무 대회가 열릴 거라는 말을 듣고 짐이 생각했던 것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산본의가가 그동안 이루어 왔던 것을 사람들에게 과시하고 이곳에 모여드는 사람들을 통해 인맥을 더욱 넓히고 그것을 사업의 확대에 이용하려 하는 거라고 생각했지.”

황제가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다른 이들도 모두 그 정도로 상상하는 것이 맞았을 거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번에도 산본의가는 짐의 생각을 뛰어넘더구나. 이번 대회를 통해서 산본의가는 독고세가와 같은 혈맹을 수도 없이 얻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열호문의 제자들과 같은 사람들로 말이다. 그 사람들에게는 이곳에서의 시간이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순간이 될 것이다. 그리고 산본의가 역시 그들에게 그런 존재가 되겠지.”

아진은 환하게 웃음을 지었다.

“저도 놀랐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께서도 놀라신 것 같습니다. 어머니는 그런 것을 계산하지 않고 하셨고 거기에 따라 나오는 부수적인 결과에 누구보다 놀라고 계십니다.”

“그래. 그게 가모의 장점이지. 노리고 했다면 얄미웠을 텐데 그게 아니지 않으냐. 가모는 그저 자신이 어려웠을 때 힘들었던 것을 생각하며 그걸 바탕으로 사람들의 상처를 들여다보는 것 같더구나. 그리고 그 상처가 자극되지 않게 열심히 약을 발라 주고 낫게 해 주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누군가는 그런 손길을 평생 잊지 않는 법이지.”

황제의 말이 맞았을 것이다.

흐뭇하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어느덧 대화는 일상의 주제로 돌아갔다.

그러다 곤오철에 대한 이야기가 조금 오갔고 아진은 린린과 함께 섬에 갈 때 객잔에서 들은 얘기를 해 주었다.

“참. 그렇지 않아도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폐하께 그 말씀을 드려보고 싶었습니다. 제가 이상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 이야기가 오래 머릿속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아진은 사람들이 사파가 다시 생기기를 바란다고 했던 말을 했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충격에 빠진 얼굴로 아진을 바라보았다.

죽을힘을 다해 목숨을 걸고 그것을 해치워 줬더니 그때가 좋았다고 말한다는 건가 해서 선이남은 화를 내기까지 했다.

황제는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그 역시 화가 나는 듯했지만 생각이 깊어지는 듯했다.

황제가 그렇게 나오니 다른 이들도 억지로 화를 가라앉히는 수밖에 없었다.

생각하는 시간은 점점 더 길어졌다.

“아진이 너는 어떻게 생각했느냐.”

“그 사람들의 말을 듣고 나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서로 먹고 먹히는 관계로 존재하는 여러 짐승들이 있는데 그중 하나를 제거하면 장기적으로 영향을 끼칠 수 있겠지요.”

“뱀에게 잡아먹히려는 개구리를 살려 주었더니 그 개구리 때문에 잠자리들이 몽땅 죽게 됐다는 이야기인 모양이구나.”

“예. 폐하. 생각하지 못한 결과가 사람들을 힘들게 한 것은 분명한 듯했습니다. 물론 그 일을 가장 이상적으로 해결하려면 사파가 아닌 관의 행정력으로 사람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치안을 유지해야 하겠지만 그러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거기에서 대안을 찾는 것 같습니다.”

모두의 표정이 점점 더 복잡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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