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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335화 (335/470)
  • 제335화

    335화

    “그런데 사조님. 우승자는 무조건 곤오철을 든 사람 중에서 나올까요?”

    “그건 나도 잘 모르겠구나. 그런데 아닐 것도 같다. 곤오철을 드는 것은 내공과 신력(身力)이 적절히 조화되어야 하는데 이번 비무 대회에서는 암기와 독도 허락된다 하지 않더냐.”

    “아아. 정말 그렇겠네요.”

    비무 대회의 시작과 함께 도박꾼들도 일찌감치 자리를 잡고 판을 벌였는데 그들이 어려워하는 것도 암기와 독이었다.

    그러면서도 산본의가의 이공자 서도진이 최종 우승자가 될 거라는 사실만큼은 모두 받아들이는 분위기였고 거기에 많은 돈이 몰리고 있었다.

    일찌감치 산본에 도착해 가주가 마련해 준 장원에서 쉬다 나온 황제는 아진을 찾았다.

    “오셨는지요. 폐하.”

    “폐하라 부르지 말거라. 짐도 신분을 감추고 편히 구경할 것이다.”

    “예.”

    아진이 웃고서 매의 눈을 하고 경기장을 지켜보았다.

    “누구를 그렇게 보는 것이냐. 아진아. 지금까지 새로운 도전자 중에는 곤오철을 들어 올린 사람이 없다고 들었는데 그렇게 열심히 볼 사람이 있는 것이냐.”

    “예. 폐하. 사실 그것은 저희가 예선을 치르지 않는 것에 대해 말이 나오지 않게 하려는 조치였을 뿐입니다.”

    아진의 말에 황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것이 무슨 말이냐. 아진아.”

    “저희는 예선전을 지켜보며, 기회를 얻지 못해 다듬어지지 않은 사람들을 찾도록 명을 받았습니다. 좋은 스승을 만나고 좋은 무공을 전수받으면 더 성장할 잠재력을 가진 사람들을 찾아내라는 것이 가모님의 명령이자 이번 비무 대회의 목표입니다.”

    “뭐라.”

    황제가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흔들었다.

    기가 찬 일이었다.

    이곳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자들이기에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했다.

    왜 자기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 그리고 자기 머릿속에는 떠오르지 않는 것이 다른 사람의 눈에는 보이고 다른 사람의 머릿속에는 떠오르는 것인가 했던 것이다.

    그거야말로 정말 필요한 일이 아니었을까 하며 고개를 끄덕이며 황제는 아진이 주시하는 청년을 보았다.

    “저자에게 자질이 있다고 보느냐.”

    “애매해 보입니다.”

    “그러면 너는 어쩔 셈이냐.”

    “애매한 자는 죽습니다. 폐하. 다른 분야라면 애매해도 그것이 삶과 죽음의 문제가 되지는 않겠지만 이곳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칼밥을 먹고 살기로 한 사람이 애매하면 그자는 죽습니다. 지금 제가 알량한 동정으로 손을 내밀면 그 손이 저 사람을 절벽에서 미는 힘이 될 수도 있습니다.”

    “네 말이 맞을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다. 짐은 그 말에 완전히 동의하지는 못하겠구나.”

    아진도 황제의 말을 이해했다.

    그래서 황제를 보며 웃음을 지었다.

    “저는 매일 매 순간, 수많은 잘못된 선택을 하고 그 잘못된 선택의 뒷감당을 하면서 살게 될 것입니다. 폐하.”

    “그래. 모두가 다 그렇겠지.”

    황제도 더 이상 아진을 방해하지 않고 아진이 걸음을 옮기는 대로 따라다니며 그가 지켜보는 예선전을 함께 구경했다.

    그러다가 아진의 얼굴이 비로소 밝아지는 것을 보았다.

    지금 단계에서는 질 수밖에 없지만 잠재력을 가진 사람을 찾아내라는 것이 가모가 내린 명령이었고 마침내 그의 눈에 그런 사람이 들어왔던 것이다.

    투로를 이해하지 못해서 공격이 들어올 때마다 매번 당황하지만 투지는 누구보다 강한 사람.

    그리고 싸움이 진행되는 동안 스스로 기술을 터득해 나가는 사람.

    같은 공격에 다시 당하더라도 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일 수 있는 사람.

    황제는 아진을 보다가 린린과 소청도 각자 다른 경기장을 지켜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위도와 하월도 각자의 경기장을 맡아 지켜보고 있었고 북리의천과 독고소영도 그랬다.

    그들의 눈은 무서우리만치 빛나고 있었다.

    황제는 어떤 사람들이 선택을 받게 될지 알 것 같았다.

    그 사람들은 비무에서 패하고 자신에 대한 실망을 삭이지 못하지만 우선은 그것을 감추고 상대에게 예를 갖추고 축하해 주었다.

    그들에게는 비무가 끝난 후에 진행 요원이 다가가 그들을 한쪽으로 데려갔다.

    황제는 그들이 어떤 처우를 받는지 궁금해서 그곳으로 향했다.

    다른 때 같으면 선이남이나 하월이 그림자처럼 따랐을 텐데 이 두 사람이 모두 비무 대회에서 우승을 하겠다고 정신이 팔려 있는 바람에 북궁세가주가 그를 수행했다.

    “이곳은 정말 웃기지 않소. 가주? 어찌 짐을 이렇게 방치할 수 있냐는 말이오.”

    “폐하께서는 폐하를 위험한 상황에 두는 분이 아니시지요. 이곳이 안전하다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면 폐하께서는 이런 불평을 하지도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자 황제가 북궁세가주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제가 폐하를 모르겠사옵니까.”

    그가 능구렁이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

    “그래도 지금 짐이 듣고 싶은 말이 뭔지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좀 맞춰 주면 안 되오?”

    “그런 것을 싫어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폐하.”

    여전히 웃으며 하는 말에 황제는 괜히 말을 꺼냈다고 생각했다.

    그러는 동안 두 사람은 진행 요원의 안내를 받아 간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가모와 몇 사람이 앉아 있다가 황제를 발견하고 놀라며 일어섰다.

    “폐하. 여기는 어쩐 일이신지요.”

    “짐이 있다는 것을 신경 쓰지 말고 하던 일을 계속하시오. 가모.”

    “…….”

    “부탁하오. 보고 싶어서 그러오. 짐도 배울 것이 있으면 배우고 싶고 말이오.”

    “폐하께서 무엇을…….”

    “그런 말을 하면서 저 사람들을 기다리게 하지 마시오. 자기들을 왜 불렀는지 알지 못한 채 얼마나 긴장이 되겠소.”

    그들은 이미 가모가 그를 폐하라고 부른 순간부터 얼어 있었다.

    황제는 편하게 구경을 하겠다며 옷을 평범하게 입고 있어서, 폐하라고 불리지 않는다면 그가 황상이라는 사실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가모는 그것이 황상의 진심이라는 것을 깨닫고 자리로 돌아갔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단계에서 제안할 수 있는 것은 몇 가지가 있습니다. 고향을 떠날 수 있는 상황이라면 본가에서 운영하는 산본무관에 들어와 배워도 되고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면 고향과 가까운 무관에서 배울 수 있도록 그 돈을 대 주도록 하겠습니다.”

    가모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런데 왜 그런 친절을 베푸신다는 것인지…… 저는 졌습니다. 가모님.”

    “알고 있습니다. 지금껏 살면서 나도 숱하게 졌습니다. 그런데도 내가 여기에 있을 수 있는 이유는 다시 기회를 얻어서였습니다. 다시 기회를 얻을 수 있으면 끝나는 게 아니지요.”

    “…….”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중에는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울지 않으려고 끝끝내 억누르다가 그것이 터져 나왔을 때는 더 이상 참아지지 않는지 끅끅 소리를 내며 고통스럽게도 울어댔다.

    “다시 출발선에 설 수 있는 기회는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다시는 주어지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임해 준다면 좋겠군요.”

    “그렇게 하면 가모님께 무엇이 좋습니까?”

    누군가 물었다.

    도전적으로 묻는 것이 아니라 가모님에게, 산본의가에도 도움이 되는 게 있기는 한 거냐고 물으려는 것 같았다.

    그러자 가모가 웃었다.

    “그런 사람들의 삶을 보면 그걸 보는 것만으로도 힘이 나고 용기가 전해집니다. 나도 다시 그렇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지요.”

    그러는 동안 한 무리의 사람들이 다시 들어왔다.

    먼저 왔던 이들은 감정을 가라앉힌 채 다른 곳으로 가서 다음 절차를 밟아야 했다.

    황제는 자기가 오랫동안 잊고 있던 어떤 감정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자신과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을 믿고 기회를 주고 격려하며 키워주는 것.

    무엇이 자랄지, 어떤 것의 씨앗인지 모르는 채로 심고 물을 주는 것.

    그리고 그것이 자라기를 기다려 주는 것.

    얼마나 오래전에 포기한 일이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 일을 오랜만에 목도한 것이다.

    전율이 일었고 황제는 그 감동을 쉽게 잊어버리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는 동안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모두 동시에 알아차렸다.

    “곤오철을 든 사람이 나온 모양입니다!”

    황제도, 북궁세가주도, 가모도.

    주인공이 누구인지 보고 싶어서 급히 달려 나갔다.

    “으하하하하. 제가 해냈습니다! 제가요. 으하하하!!”

    큰 소리로 웃어 대는 사람은 남이천이었다.

    남이천이라면 그럴 만도 하다고 생각하며 산본의가의 의원들이 그 주위에 빙 둘러서서 남이천을 축하해 주었다.

    “이번 비무 대회에서 백 명의 최강자 안에 들어 산본 백성에만 들어도 강호 백대 고수보다 더 인정받을 수 있다는 소문이 파다한데 사형께는 산본 백성이 따 놓은 당상입니다.”

    산본 의학당 출신의 의원들은 특히나 더 신이 난 모습이었다.

    도종 일행의 축하는 한층 더 열렬했다.

    도종과 하명준, 허우종은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 접수처가 있는데도 아직 접수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가서 접수하고 곤오철을 들어 올리고 싶었는데 아직 성공하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을 보며 자꾸만 현실을 자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남이천이 성공하는 것을 보니 괜히 자신감이 생겼다.

    “이 기를 이어받아서 그러면 제가 한번 해 보겠습니다.”

    그러면서 허우천이 접수를 마치고 당당히 곤오철 앞으로 나섰다.

    그 모습을 보면서 기대를 하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설마라는 생각이 많았던 것이다.

    이변은 없었다.

    “으윽!”

    곤오철을 끌어안은 허우천은 그대로 그것을 들어 올리려 했지만 곤오철은 바닥에 딱 붙은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으으으으윽!!”

    그가 부들부들 떨면서 힘을 썼지만 그래도 마찬가지였다.

    포기를 모르고 곤오철을 과하게 오래 끌어안고 버티려는 사람이 처음 나온 것도 아니라 진행 요원이 허우천을 말렸다.

    “여기까지입니다. 실패입니다.”

    “…….”

    허우천은 한 가닥 희망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깨달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도종의 목으로 침이 꼴깍 넘어갔다.

    도종과 하명준은 그때부터 서로 사양지심을 발휘했다.

    “형님이 먼저 해 보시지요.”

    “아니다. 먼저 해 봐.”

    도종은 결국 곤오철의 앞으로 나섰다.

    어느새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그중에는 아진도 있었다.

    “큰오라버니가 할 수 있을까?”

    린린이 갑자기 옆에서 묻는 바람에 아진은 깜짝 놀랐다.

    이 인간이 또 일부러 기척을 숨기고 나타났다는 것을 알고 노려보았지만 린린은 아진을 보고 있지도 않았다.

    도종은 긴장이 되는 듯 연신 손에 난 땀을 옷에 문질러 닦고 있었다.

    “아버지. 힘내요!”

    어디선가 앙증맞은 소리가 들려왔다.

    북리소은의 손을 꼭 잡고 있는 랑랑이었다.

    도종이 랑랑을 돌아보고 손을 한 번 들어 주었다가 자기를 보려고 서 있는 수많은 인파를 발견했다.

    차라리 안 보는 게 좋았을 텐데 그 모습을 보자 더욱 긴장이 돼 버리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할 수 있어요. 랑랑이가 응원할게요.”

    랑랑이도 참…….

    아버지라고 괴력을 가진 사람은 아닌 건데.

    아진은 도종이 지금 참 난감하겠다고 생각했다.

    도진 자신도 아버지에 대해서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아버지라면, 원하기만 한다면 언제든 괴력을 발휘할 수 있을 거라고.

    그러나 자기가 어른이 되자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

    그때는 그냥 좀 민망했었던 것 같았다.

    도종의 발은 바닥에 단단하게 붙었고 두 팔로 곤오철을 빈틈없이 안은 후에 천천히 일어섰다.

    ‘일어…… 섰어?’

    아진의 눈이 동그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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