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러, 의선되다-332화 (332/470)

제332화

332화

어차피 이곳에서는 일을 못 구해서 먹고 살 수 없다는 말은 통하지 않았고 몸만 성하면 할 일이 지천에 깔려 있었다.

그들에게도 그 돈은 부담되는 액수가 아니었고 좁은 지역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고, 갈 곳이 없어서 생겨난 일이었다.

그러니 일단 집을 만들어 놓으면 집이 빌까 봐 걱정할 일은 없을 터였다.

벌목뿐만 아니라 개간까지 허락해 주었다면 황제도 생각한 바가 있었겠다고 여기며 아진은 그때부터 일을 크게 만들기로 했다.

“린린. 소청아. 먼저 공터를 크게 만들고 사흘 안에 나무를 전부 잘라서 거기를 채우는 거다.”

“산 밑에 만드는 게 좋겠지? 이동 시간을 짧게 하려면.”

“좋아요. 스승님. 황제 폐하를 깜짝 놀라게 해 드려요.”

소청은 의지로 불타올랐다.

그러자 린린이 사악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좋아. 잘할 수 있어. 다음에 폐하가 여기에 내려오실 때는 길을 못 찾으실지도 몰라. 길을 잘못 들어섰나보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고.”

세 사람은 의기투합했고 그 후에 일어난 일은 모두의 상상을 넘어섰다.

나무를 자르고 개간을 하고 나서야 그들은 단순한 야산으로 보였던 곳이 현 하나에 해당할만한 공간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세 사람은 주어진 사흘 동안 끼니도 거의 챙기지 않고 벌목과 개간에 열중했는데 황제도 설마 그렇게까지 할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터였다.

사흘이 지나고 그곳에 미령보다 훨씬 더 넓은 평지가 생겨나는 것을 보고 가모조차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을 정도였다.

“폐하께 정말 좋은 선물을 받았구나.”

가모는 비무 대회의 준비가 한층 더 원활해질 수 있겠다고 생각하며 흐뭇해했다.

* * *

“아진아. 린린. 아이고. 우리 소청이까지. 너희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게냐. 왜 이리 반쪽이 된 것이냐.”

소식을 듣고 온 북리의천은 다른 때처럼 신법을 펼쳐 오다가 자기가 잠깐 정신을 판 사이에 다른 길로 들어선 줄 알고 왔던 길을 되돌아갔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산본의가가 나오기 전에 보여야 할 산이 보이지 않고 웬 허허벌판 나대지가 나타났던 것이다.

그는 익숙한 곳까지 돌아갔다가 거기에서부터 다시 왔는데 그러고 나서야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차렸다.

“……! 이 녀석들. 도대체 무슨 일을 해 놓은 것인가.”

북리의천은 웃음이 터지는 것을 참지 못한 채 산본의가에 갔고 그곳에서 홀쭉해진 세 사람을 발견했던 것이다.

“폐하께서 사흘 동안만 벌목과 개간을 허락하신다고 해서 사흘 동안 하느라고 식사를 걸렀습니다. 스승님.”

아진의 미련한 소리에 북리의천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이고. 이 녀석아. 폐하께서 그렇게 말씀을 하셨다고 해도 그냥 하루 이틀 더 베고 폐하의 말씀대로 했다고 하면…….”

되는 것이 아니냐고 하려는데 옆에서 소청이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북리의천을 바라보았다.

“큼. 곤오철이나 보자.”

“예. 스승님.”

아진이 먼저 철방으로 안내해 곤오철을 보여 주자 북리의천은 긴장되는 걸음으로 다가갔다.

방주는 무슨 일인지 알아차리고 일을 멈추었다.

“그럴 것 없네. 다들 나는 신경 쓰지 말고 하던 일들이나 하게.”

제발 그래 달라고 바짓가랑이라도 붙들고 애원을 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그들은 괜찮다며 모두 일손을 멈추었다.

쇠를 두드려 대는 소리가 끊이지 않던 철방에 적막감마저 감돌았다.

제발 개의치 말라고 하고 싶은 것을 참으며 북리의천은 한쪽에 기대 서 있는 곤오철을 만졌다.

“일부는 떼어낸 것입니다. 대협.”

방주는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했다.

저희 공자님은 그것보다 더 큰 걸 섬에서 신법으로 가져오셨다고 자랑을 하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해지는 그였다.

북리의천은 시간을 오래 끌어 봐야 누더기만 되겠다고 생각하고 공력을 불어넣은 후에 곤오철을 집어 들었다.

“……훗.”

북리의천의 얼굴에 가볍게 웃음이 지어졌다.

아진은 그 모습이 너무 재미있었다.

그는 스승이 그것을 아무 문제 없이 잘 들 거라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는데 걱정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라는 것을 깨달아서였다.

“사조님은 역시 쉽게 드실 줄 알았어요.”

소청이 자랑스럽다는 듯이 다가와 북리의천의 손을 꼭 잡았다.

“그래.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지. 나는 또 뭐. 얼마나 대단한 건가 했다. 이런 건 두 개도 포개서 들 수 있겠다.”

“해 보시지요. 대협. 세 개가 있으니 확인해 보시면 됩니다.”

방주가 말하자 북리의천이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저자가 나에게 억하심정이 있나.

“아닙니다. 스승님. 하나만 드실 수 있으면 됩니다. 그리고 스승님께 이걸 들어보시라고 한 건 곤오철로 만든 검을 스승님이 사용하실 수 있는지 알아보려는 뜻이었습니다. 스승님께 드릴 검에는 다른 금속을 최소한으로만 섞고 곤오철의 비중을 늘리면 좋을 듯합니다. 이렇게 강한 광석인데도 다른 것과 함께 섞여야 더 단단해진다고 하니 신기하지 않은지요. 스승님.”

“아진아. 정말 이걸 나에게 줄 거라는 것이냐.”

아진이라면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곤오철의 명성을 생각하자면 결코 쉽게 받을 물건이 아니었다.

그러나 아진은 북리의천에게 어떤 것도 아깝지가 않았다.

“당연합니다. 스승님. 스승님이 저에게 주신 것에 비하면 새 발의 피도 안 됩니다.”

북리의천은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꼈다.

지금까지 살면서 아진처럼, 남에게 받은 도움을 오래오래 기억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런 아진을 제자로 두었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복을 받은 사람인지 알게 해 주었다.

“그런데 사고님은 안 오셨는지요. 스승님?”

“이건 비밀로 하라고 했다만 소영은 지금 아주 바쁘단다. 아직 소영의 무공이 다 회복되질 않았지 않으냐. 그래도 소영은 자기가 반드시 산본의가 비무 대회에 참가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단다. 산본의가에 속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참가해야 하는 게 아니냐면서 의욕이 대단하지. 그때까지 기량을 끌어 올려서 남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모습을 보이겠다고 각오가 대단하다.”

그 말을 하는 북리의천의 얼굴에 독고소영을 향한 애정이 줄줄이 묻어났다.

“사고님은 어떠십니까. 스승님? 그렇지 않아도 여쭤보고 싶었는데 지금이 기회가 좋은 것 같기도 합니다. 사고님이 곁에 안 계셔서요.”

다시 돌아온 독고소영은 다른 사람의 마기로 채워져 있었다.

독고소영이 원래의 심법을 사용해 다시 내공을 쌓으려고 한다는 것을 들었는데 아진은 그사이에 사고가 한 번 정도는 필시 깊은 고민에 빠질 거라고 생각했다.

사고의 몸에서 느껴진 마기는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을 정도로 자유로웠다.

그것은 린린에게서 느껴지는 마기와도 달랐다.

그런 마기를 포기하기가 결코 쉽지만은 않을 거라는 생각 때문에 진작 그 얘기를 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확실히 두 가지 힘을 두고 고민을 하는 것 같기는 하다. 나는 조급해하지 말고 신중히 판단하라고 했다. 마기도 잘 통제할 수만 있다면 꼭 포기해야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북리의천의 말을 듣던 아진의 표정이 굳어지기 시작한 것은 그때였다.

“스승님!”

“오라버니?”

아진은 자신이 그 마기를 어디선가 느낀 적이 있었다는 것을 순간적으로 깨달았고 지금 잘만하면 그게 언제였는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북리의천이 먼저 이상한 분위기를 알아차리고 린린과 소청을 말렸다.

“가만있어 보거라. 아진이 생각할 수 있게 해 주어라.”

사고의 몸에 흐르던 마기.

그것과 비슷한 마기…….

한동안 검미에 깊은 주름을 새긴 채 혼란에 빠져 있는 것 같던 아진의 눈이 갑자기 떠졌다.

“폭천의입니다. 스승님. 폭천의의 몸속에도 사고님의 몸에 있던 마기가 있었습니다.”

“그게…… 그게 무슨 말이냐.”

북리의천이 깜짝 놀라며 아진을 바라보았고 그의 얼굴에는 불쾌한 기색마저 서렸다.

폭천의에게 있던 마기가 소영에게 있다는 말에 기분이 상했던 것이다.

아진은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 건가 하며 그 이유를 알아보려 했다.

“마선이 폭천의를 살린 거야.”

린린이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고 다른 사람들의 눈은 경악으로 치떠졌다.

“왜?”

“폭천의가 어떤 놈인지 몰랐겠지. 죽어 가는 사람은 무고한 희생자처럼 보이기도 하잖아.”

뜻하지 않게 마선이 복잡하게 엮여 있었다는 것을 깨달으며 그들은 생각에 잠겼다.

“너라면 어떻게 하라고 말하고 싶으냐. 린린. 소영의 마기가 마선의 것이라면 그것을 포기하라고 하고 싶으냐, 아니면 그것을 바탕으로 계속 정진해 보라고 하고 싶으냐.”

그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마선은 독고소영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마기를 준 것일 뿐 독고소영이 심법을 전수받은 것은 아니었다.

마선의 마기가 아직까지 독고소영의 몸에 남아 있었던 것은 마선의 심법과 마기가 자연의 기운을 이용한 특별한 것이라 그런 거였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것은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독고소영이 마기를 사용하고 싶다고 해도 심법을 익히지 못한다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섬에서 본 심법이 떠오르기는 했지만 린린과 아진은 독고소영에게 그것을 알려 주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자칫하다 죽음에 이를 수도 있는, 그럴 가능성이 아주 다분한 심법을 그녀에게 알려주어서 다시 위험을 무릅쓰게 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들의 복잡한 생각은 하월이 오면서 끝이 났다.

하월은 그들에게 오자마자 야산이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다.

그 역시 북리의천과 똑같은 실수를 했던 것이다.

이제 다 왔다고 생각하면서 한참 신나게 신법을 펼쳤는데 익숙한 산 대신 허허벌판이 드러나자 이상하다고 여기고 길을 되돌아갔다가 산이 사라진 것을 깨달았다.

“미령으로는 너무 좁아서 조금 넓히려고 그랬습니다.”

하월의 표정을 봐서는 황제가 하월에게도 알리지 않고 내린 선물인 것 같아서 아진은 구체적인 얘기는 하지 않은 채 그 정도로만 말을 했다.

“하월 공자도 우선 곤오철을 들어 보게. 세 개를 한 번에 들지 못하면 섬에 갈 필요도 없네.”

북리의천이 겁을 주자 하월 공자는 당황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사람 저 사람에게 하도 속아 와서 그런지 하월은 이제 그런 말을 들으면 저절로 주위부터 두리번거리게 되는 것 같았다.

“어서 들어 보세요. 공자님.”

소청도 하월 놀리기에 재미가 들린 것 같았고 철방의 누구도 하월에게 사실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하월은 천천히 다가가서 곤오철 하나를 집어 들었고 바로 얼굴이 굳었다.

하나만으로도 버겁다는 생각이 든 듯했다.

“이걸…… 다른 분들은 전부 세 개 다 들 수 있었다는 거지요?”

“예. 그렇게 들지 못하시면 섬으로 가실 필요도 없다고 하네요.”

방주의 말에 하월은 두 개를 같이 들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러나 일단 두 개를 겹치자 땅에 붙기라도 한 것처럼 곤오철은 꿈쩍을 하지 않았다.

“……!!”

하월은 크게 당황한 채 아진을 보았다.

“이, 이걸 꼭 세 개씩 들고 와야 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씩 나르면 되지 왜 꼭 세 개씩 날라야 한다는 겁니까?”

하월은 절대 포기할 수 없다는 듯이 화를 냈다.

“아니. 왜 화를 내요?”

아진이 큭큭거리자 하월은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린 듯했다.

“너무 억울해할 것 없네. 하월 공자가 오기 전에는 나도 당했으니 말이네.”

북리의천의 말을 듣고 하월은 설마라고 생각하다 억울하다는 듯이 고개를 저어 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