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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329화 (329/470)

제329화

329화

이게 필요할 거라고, 이게 좋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챙겨 주었는데 정작 그것이 사람들에게 맞지 않았고 사람들은 그 전의 상황이 나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식사를 마치고 연거푸 고맙다고 말을 하며 나갔다.

“사파에는 사파 나름의 용도가 있었던 거네.”

린린이 말하자 아진은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그랬던 건가 하는 생각에 머릿속이 말할 수 없이 복잡해졌다.

“사도련이 워낙 잔인하고 패악무도한 짓을 해서 그때는 사파의 순기능을 못 본 건가?”

린린은 아진이 혼란스러워하는 것이 이해되고 불쌍하기도 한 듯 옆에서 말을 걸어 주었다.

“네가 본 사파는 어땠어. 린린?”

“어떤 자들은 대단했지. 흑도 무리들이 생각하는 게 다 거기서 거기지만 그래서 이해하고 추측하는 게 쉽기도 했고. 그자들은 자기들보다 약한 자들을 등쳐먹겠다는 일념으로 살잖아? 그러면서 다른 조직들에 무시당하고 싶어 하지 않고 자기 조직을 확실하게 키워 내고 싶어 하고. 자기들이 누리는 걸 오랫동안 지키고 싶어 하면서.”

그 목표가 맞아떨어지면 비록 숭고한 마음으로 시작한 게 아니더라도 민초들의 삶을 편하게 할 수도 있는 모양이었다.

통행세를 요구하는 강한 산적이 존재하고, 통행세만 내면 일정한 구간은 안전하게 지나다닐 수 있게 된다면 사람들은 기꺼이 통행세를 내고 갈 의향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상황은 산적을 악으로 규정하고 황실 차원에서 나서서 없애 버린 탓에 산적이라고 이름 붙이지 않은 온갖 왈패들이 산에서 튀어나와 전보다 더 많은 돈을 뜯기면서도 정작 안전은 보장받지 못한다는 것 같았다.

치안을 유지하기 위한 인력이 충분하기만 하다면 그런 문제는 저절로 해결되겠지만 그게 불가능하다는 것이 문제였다.

“이렇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뭐든 자연스럽게 하는 게 좋은 것 같아. 그렇다고 오라버니의 노력이 아무 의미가 없었다고 생각하지도 않아. 사도련이 사라지는 걸 봤으니까 흑도들도 일정한 선은 지킬 거야.”

“안 지킨다잖아.”

“그건…… 걔들이 머리가 나빠서 그런 거고.”

“…….”

린린은 위도를 보며 잘 위로해 보라는 듯이 눈짓을 했지만 위도는 그런 건 린린보다 훨씬 더 못할 자신이 있었다.

“문제는 언제나 생길 수밖에 없어. 오라버니. 오라버니가 그 일을 전부 다 해결할 수도 없는 거고. 일일이 마음 쓰지 마. 그러고 보면 참 오지랖도 넓어. 내가 오라버니 같은 상황이면 다른 생각은 할 틈도 없었을 텐데.”

린린의 말에 아진도 피식 웃어 버렸다.

그 말이 맞았다.

린린이 봤다는 그 이상한 빛이 뭔지는 몰라도 지금은 그가 생각해야 할 중요한 것들이 많았다.

“어쨌거나 아진아. 네가 더 강해지면 되는 거야. 내가 더 강해지면 되는 거고. 그러면 누구도 우리가 원하지 않는 걸 강제로 하도록 만들지 못할 거야. 나는 그거면 된다고 봐.”

위도의 말에 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의 자신은 다른 사람들보다는 압도적으로 강하지만 충분히 강한 것은 아닌지도 몰랐다.

아직 그를 긴장하게 만드는 적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지 나중에 그런 이들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다음날 섬을 향해 출발할 때까지 그들은 방에서 충분한 휴식을 취했다.

“린린. 너는 아직 가 본 적이 없는 거지?”

아진이 묻자 린린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거 서른 번쯤 들은 것 같아.”

“그래? 다섯 번만 더 하자. 갔다 오고 나면 이제 못 묻잖아.”

“왜? 물을 수는 있지. 대답이 달라지겠지만.”

“너는 이 오라버니가 왜 묻는 거라고 생각하는데? 가 본 적 없다고 말하는 너를 보면서 우월감을 느끼려고 그러는 건데 갔다 온 후에 내가 뭐 하러 묻겠냐?”

린린은 하여간 유치하다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 댔고 위도는 또다시 자기에게도 린린 같은 여동생이 있으면 좋겠다며 웃었다.

“형님. 린린 같은 여동생이 있으면 좋겠다고요? 그거 정말 잘 생각해 보고 말해야 되는 거예요. 저나 되니까 린린한테 존경받으면서 이렇게 오라버니 노릇을 의젓하게 잘하는 거라고요.”

린린은 더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이 신법을 전개했고 위도와 아진까지 그 뒤를 따랐다.

섬에 도착할 때까지 내려가서 쉴 곳도 없고, 이제 이대로 끝까지 신법을 전개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건데 도중에 누군가 내공의 부족을 느낀다면 자칫 심각한 상태가 생길 수도 있었다.

이번에는 흑주도 없었기에 린린과 위도에게는 긴장감이 느껴졌다.

여차하면 바다로 뛰어들어서 헤엄치면 된다고 위도가 린린에게 이야기하자 린린은 그걸 왜 자기에게 말하냐고 했다.

자기는 내공이 남아돌 거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면서.

그러나 린린은 그 말을 한 것도 무색하게 도중에 바다에 퐁당 빠져 버렸다.

내공이 부족해서 그런 것 같지는 않았는데 아무래도 동굴에서 본 빛 때문에 정신이 분산돼서 내공 운용에 실패한 듯했다.

깜짝 놀라는 위도를 먼저 섬으로 보내고 아진이 린린을 건져 업고는 섬을 향해 신법을 펼쳤다.

린린은 굴욕적이라면서 구시렁댔고 아진은 계속 웃었다.

이로써 두고두고 린린을 놀려먹을 말이 생겨서 그렇게 만족스러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들이 섬에 도착했을 때 아진은 전보다 훨씬 더 많아진 너구리들을 보고 비명을 질렀다.

“야. 너희들!! 사이가 엄청 좋은가 보구나? 도대체 얼마나 낳아 놓은 거야?”

너구리들은 아진을 기억하고 있었던 듯 아진에게 마구 달려왔다.

함께 지냈던 것으로 하자면 위도와 더 오래 살았던 것 아니냐고 린린이 물었지만 위도는 너구리의 애정은 자기도 사양한다며 부지런히 약초를 뜯고 다녔다.

아진은 섬을 다니면서 혹시 차원 이동과 관련된 내용이 적혀 있지 않은지 샅샅이 훑고 다녔다.

린린도 아진을 따라다니다가 이게 왜 여기에 있느냐면서 비명을 지르는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뭔데? 좋은 거야?”

“응. 수백 년 전에 실전됐다는 무공인데 이게 여기에 있네?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거지? 신교 역사상 다섯 손가락에 든다는 천마님이었는데 그분이 마지막에 여기에 계셨다는 말인가? 오라버니는 어떻게 생각해?”

“그러게. 천마가 다른 사람에게 전수하지 않았으면 천마가 쓴 게 맞는 거겠지?”

“다른 것들도 놀라운 게 많아. 우리한테 당장 도움이 되고 안 되고를 떠나서 그 사실만 해도 충분히 이상한데? 여기에 무공을 적은 사람들이 전부 이 무공의 창시자였다면…… 누가 그 사람들을 여기로 데려온 걸까? 그 사람들이 스스로 온 건가? 스스로 왔다면 그건 또 어떻게 알고 온 건데? 이건 같은 시기의 무공도 아닌 것 같은데?”

무공, 특히나 마공에 대한 지식은 린린이 아진을 압도했고 그 때문에 린린은 아진이 미쳐 알아차릴 수 없었던 사실을 깨달은 듯했다.

아진은 뒤늦게 그럴 수 있겠다는 것을 떠올렸다.

누가 기록한 건지 확실히 알 수 없는 무공 비급.

영초가 채소처럼 자라고 있는 환경.

웬만한 공력을 가진 사람은 접근도 할 수 없는 거리에 홀로 떨어져 있는 섬.

그런 것을 생각하자면 이 장소는 누군가에 의해 엄선된 것 같았다.

“여기가 그런 장소일 수도 있을까? 내가 발견한 동굴 같은 곳. 그 반대의 곳인 거지. 오라버니와 같은 이유로 여기에 온 사람이 자기가 살던 곳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무공을 연마하고 자기가 찾은 것들을 여기에 모아 둔 거야.”

아진은 별로 그럴 것 같지 않았지만 상상은 자유이기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고만 말을 해 주었다.

린린은 아진에게서 반응이 별로 나오지 않자 다시 무공들을 읽으며 다녔다.

그러다 어느 곳에서 우뚝 멈춘 린린이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이건…… 마선구검식 같은데?”

“마선구검식?”

아진은 돌아보지도 않은 채 물었다.

“응. 이건 그 심법이고. 심법은 그런대로 온전히 남은 것 같은데 검식은 지워졌어. 이건…… 다른 거랑은 좀 달라 보이는데? 지워진 방식이. 그렇지 않아? 사람이 손으로 때려서 지운 것 같아. 엄청난 장력이야.”

아진은 그동안 린린이 지치지도 않고 많은 추리를 해 왔지만 그중에 그럴듯하다고 생각된 건 별로 없었기에 이번에도 그냥 자기가 보던 거나 집중해서 보고 싶었는데, 린린이 와서 기어이 끌고 가는 바람에 터덜터덜 걸어가 그 앞에 설 수밖에 없었다.

“봐봐. 내 말이 맞지?”

그러면서 보여 준 바위에는 아진이 본 적 없던 것이 새겨져 있었다.

“전에는 없었는데?”

아진은 그것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린린이 말한 마선구검식 사이에 있던 두 개의 무공은 아진의 머릿속에 분명하게 기억이 남아 있었는데 마선구검식을 본 적은 없었던 것이다.

아진도 바위를 보고 린린이 말한 게 얼추 맞아 떨어지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다른 것들이 세월의 흔적에 의해 서서히 깎이고 사라졌다면 이것은 누군가 그것을 지우기 위해서 강한 장력으로 훼손해 버린 듯했기 때문이다.

“그럴 거면 심법도 지우지 왜 심법은 놔둔 거야?”

“이건. 말이 안 돼서 그러는 것 같은데?”

심법이 적힌 곳 앞에서 한동안 그걸 유심히 보고 서 있던 린린이 단정적으로 말했다.

“이건 어떤 못된 사람이 이걸 믿고 따라 하는 사람을 죽게 만들려고 써 놓은 것 같아.”

설마 그러겠냐 했지만 린린의 옆에서 심법을 본 아진은 곧 그 말을 이해했다.

“이런 식으로 하면 상단전이 버티지 못하고 터질 거야, 린린.”

“그러게 말이야. 그런데 이걸 보고 그렇게 될 거라는 걸 알아차리려면 우리 정도는 돼야 한다는 게 문제인 거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은 기연을 만났다고 생각하면서 이 심법을 믿고 시작하려고 했을지도 몰라.”

“세상에는 정말 이상한 놈들이 많아.”

아진은 갑자기 화가 났다.

자기와 린린은 그게 위험하다는 걸 알고 있으니 거를 수 있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 중에는 그걸 보고 따라 하다가 죽음에 이를 사람도 있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진짜 못된 인간이네!”

아진은 그걸 놔두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손에 공력을 불어넣었다.

“여기까지 올 사람이 누가 있다고 그래?”

린린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아진을 말리지는 않았다.

린린은 이 섬에 있는 바위가 특별하다는 것을 이미 눈치채고 있었고, 그 강하다는 묵철의 강도도 월등히 뛰어넘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섬에는 온갖 이상한 일들이 넘쳐나는 것 같았는데 이런 돌에 글씨를 새겨넣을 수 있다는 것도 보통 사람에게는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아진은 린린이 말을 끝내자마자 손으로 바위를 내리쳤다.

그러자 바위에 아진의 손자국이 찍혔다.

밀가루 반죽에 손바닥을 내리쳤다고 해도 그보다 더 선명하게 나오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린린은 잠시 할 말을 잃은 채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는 않았다.

“이게…… 뭐지?”

남아 있는 글씨도 아주 안 보이게 만들려고 했던 아진은 린린이 갑자기 바위 앞으로 얼굴을 들이미는 바람에 깜짝 놀라 허겁지겁 손을 치웠다.

하마터면 내공이 격발해서 진탕될 뻔했을 정도로 위험했던지라 아진은 화가 나서 버럭 소리를 지르려고 했다.

그러나 린린을 놀라게 한 게 뭐였는지 아진도 곧 알아차렸다.

“이게…… 뭐냐?”

손자국이 난 돌이 뚝 떨어져 나가더니 그 속에서 다른 돌이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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