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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328화 (328/470)
  • 제328화

    328화

    “그래도 안 갈 거지. 오라버니?”

    린린이 아진의 표정을 걱정스럽게 살피며 물었다.

    “당연하지. 내가 거기에 왜 가. 그러면 여기는 어떻게 하라고.”

    “그래. 맞아. 우리한테도 오라버니가 필요해. 가면 안 돼. 그리고 그놈들이 잡아가려고 해도 내가 지켜줄게. 나만 믿어. 천마잖아.”

    조그맣던 만두가 어깨를 쭉 편 채 의기양양하게 말하는데 아진은 이 녀석이 얼마나 믿음직한지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린린의 도움을 받게 될 일이 생길 것 같지는 않았지만 든든하고 고마운 것은 사실이었다.

    “그런데 너 참.”

    아진이 린린을 가만히 바라보며 말했다.

    “못됐다. 생각할수록 열 받잖아. 어차피 나를 좋아하거나 기다리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너도 인정해 버리면 안 되는 거지. 그러면 나는 뭐가 되냐?”

    “그걸 이제 알았어? 천마한테 뭘 바라?”

    양심의 가책을 느껴 보라고 말을 했더니 이런 바보가 다 있냐는 듯이 하는 말에 오히려 아진만 만신창이가 되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아진은 일단 린린에게서 그런 얘기를 듣고 나자 동굴 끝에서 보였다는 곳이 정말 자기가 있던 세계와 연결이 돼 있는 건가 하며 여러 가지로 궁금증이 생겼다.

    “지금까지 여기에 온 사람들은 두 사람이 전부일까. 오라버니? 오라버니는 SSS급이었고 위도 오라버니는 S급이었다고 했지?”

    “응. 내가 알기로 S급이 두 명 더 있었어.”

    “그래? 그러면 그 사람들도 이곳으로 올 수 있었을까? 이미 왔으려나?”

    그들 중 누구도 그 답을 알 수 없었다.

    “린린. 어차피 여기에서 그런 말을 계속한다고 해도 모를 것 같은데 위도 형님이 깨어났다는 섬 있잖아. 우리 거기에 가 볼까? 거기에 가면 단서가 있을지도 몰라. 일단 비무 대회 때문에 당분간은 바쁠 것 같은데 잘못하다가는 어머니에게 잡혀서 고생만 할 거야.”

    “오라버니는 정말 천재야. 그럼 지금 가. 오라버니.”

    둘 중 한 사람이라도 정신을 차려주면 좋으련만 그들은 쿵짝이 너무 잘 맞는 게 문제였다.

    한 사람이 방방 날아 올라가면 옆에서 중심을 잡아 주기는커녕 그보다 더 높이 올라가 버렸던 것이다.

    “산본의가에서 살아온 내 경험에 비추어 보면 이럴 때 아주 조금만 망설여도 어머니한테 바로 잡혀. 빨리 와. 오라버니.”

    그리고 린린은 그대로 신법을 전개했고 흑주가 가장 먼저 알아차린 듯 아진을 향해 쫓아왔다.

    그러나 아진은 흑주를 소청에게 돌려보냈다.

    “오래 걸릴지도 모르니까 너는 여기에 있으면서 소청이를 도와줘. 우리가 돌아올 때까지 잘 지키고 있어야 한다.”

    흑주는 순순히 돌아갔고 아진은 그대로 출발하려다가 위도를 찾아 나섰다.

    위도는 막 비무 대회를 위한 준비에 돌입하려고 하다가 아진에게 붙잡혔다.

    “형님. 린린이 그러는데 이상한 곳이 열렸대요. 제대로 보지는 못했지만 다른 차원의 문이 열린 것 같아요. 그래서 형님이 살던 그 섬에 가 보려고 해요.”

    “그래. 그럼 나도 같이 가.”

    아무래도 섬에 대해서는 자기가 아진보다 더 잘 알 거라고 생각한 듯 위도가 당당하게 말했다.

    “그런데 간다고 말씀은 드렸어?”

    “잡히면 안 보내 주실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안 했는데요?”

    “…….”

    말을 하고 나자 위도가 그렇게 보는 것도 이해가 돼서 아진과 린린은 시선을 회피했다.

    “그래도 간다고 말씀은 드려야 걱정들을 안 하시지.”

    “그럴까요?”

    “너는 어쩌면 네 생각만 하냐? 너랑 린린은 어떻게 하는 생각이 그렇게 똑같은지 원.”

    위도는 고개를 저으며 제선문주를 찾아갔다.

    아진은 위도가 그 이야기를 가주나 가모가 아닌 제선문주에게 한다는 게 웃겼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제선문주가 가장 적당할 것 같기도 했다.

    갑자기 아진과 린린이 위도가 나타난 섬에 간다는 이유를 설명하려면 동굴의 일을 말해야 할 텐데 동굴이 터지면서 다른 세계가 보였다고 말을 한다면 아진의 비밀을 아는 사람들은 모두 걱정을 할 수밖에 없을 터였다.

    린린이 그랬던 것처럼 누군가 아진을 데려가기 위해서 그 길을 만든 게 아닌가 하고 겁이 날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제선문주는 조금 거리를 둘 수 있었다.

    역시나 위도에게서 얘기를 들은 제선문주는 섬에서 올 때 거기서 나는 약초와 독초나 많이 캐오라고 말하고 위도를 놔 주었다.

    그때부터 섬으로 가는 동안 아진은 그 섬에서 봤던 수많은 무공 비급을 떠올렸다.

    ‘내가 못 찾은 것도 있을지 모르고 글씨가 희미해져서 볼 수 없었던 것도 있기는 했지.’

    그렇게 자기가 스쳐 지나간 것 중에 지금의 자신에게 꼭 필요한 게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그 마음은 위도가 훨씬 더 강했다.

    섬을 나온 후에 수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위도는 자기가 얼마나 나약한지 알게 됐고 섬에서 편안하게 보낼 수 있었던 시간 동안 너무 게으름을 부렸던 것을 후회했다.

    목숨을 위협받는 일을 경험하고 나니 이렇게 안주하고 있다가는 어느 날 훅 목숨을 잃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이번에 가면 무공 구결을 열심히 봐야겠어.”

    아진도 그를 응원했다.

    그들은 얼마 가지 않아 린린을 따라잡았다.

    린린이 아무리 서둘러봐야 혼자서는 섬을 찾아가지도 못할 테니 그들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섬에 가는 동안 그들은 각자 서로의 생각을 하느라 바빴고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았다.

    섬까지 쉬지 않고 신법을 펼치는 것은 처음부터 포기하는 게 좋았고 그들은 전처럼 객잔에서 머물며 하루 동안 회복을 한 후에 가기로 계획을 세웠다.

    “오라버니. 나 아직도 그거 생각나. 황성에서 과파육 먹었다고 오라버니한테 혼났던 거.”

    위도가 무슨 말이냐고 묻자 린린은 조잘조잘 그날의 일을 전부 일러바쳤다.

    “아니. 그건 말도 안 되지. 고작 과파육 하나 가지고? 그건 너무 심했네.”

    “아니. 형님. 평소 같으면 저도 안 그러죠. 그런데 돈이 없는 줄 뻔히 알면서 그걸 시키는 애가 어디 있냐고요.”

    “린린이 항상 그러는 것도 아니잖아. 그리고 아이가 그럴 때는 다 이유가 있는 거야. 마음을 알아줬으면 하는데 몰라줘서 답답하고 화가 나서 그런 걸 수도 있고.”

    “린린은 항상 그래요. 형님. 형님이 잘 모르셔서 그래요.”

    “나한테 린린 같은 동생이 있으면 먹고 싶다는 건 다 사 주고 매일 업고 다니겠다. 린린. 내가 다 사 줄 테니까 먹고 싶은 거 다 시켜.”

    린린은 아진에게 혀를 메롱 내밀고 과파육 따위는 우습게 느껴지게 하는 요리를 줄줄이 시켰다.

    “더 시켜. 린린. 이 오라버니가 다 사 줄게.”

    위도는 그동안 쌓인 게 많았나보다고 생각해서 안쓰러워하며 말했지만 린린은 많이 먹고 싶은 게 아니라 아진이 빡치는 모습을 보고 즐거워하고 싶었던 것이라서 갑자기 흥미를 잃었다.

    주위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객잔 문지방이 닳도록 그곳을 이용하면서도 그런 요리가 줄줄이 나오는 것은 보지 못했는지 신기해하며 부러운 듯 힐끔거렸다.

    린린도 아주 작정을 한 듯이 많이 시키기는 했지만 그걸 전부 다 먹을 자신도 없어서 슬그머니 아진에게 물었다.

    “같이 먹자고 할까?”

    아진은 린린이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 뻔히 다 보인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그러지 뭐. 사람들 얘기를 들어 보는 것도 도움이 되니까.”

    “역시 오라버니가 내 계획을 아네. 나도 그럴 생각이었어. 민심을 직접 살피는 건 언제나 중요하지.”

    주인에게 말을 해서 탁자를 붙이고 여러 사람과 함께 먹기로 하며 요리를 좀 더 시키자 사람들은 이게 웬 횡재인가 하면서 진귀한 음식들을 맛보며 좋아했다.

    “요즘은 사는 것이 좀 어떻습니까?”

    아진은 황성의 일이 이곳에도 퍼졌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물었지만 오히려 그런 이야기는 잘 나오지도 않았다.

    황성에서 황제가 뒤바뀔 뻔한 일이 있었다고 해도 그것은 남의 사정이고 그들은 자기들이 하루하루 먹고사는 일이 더 급하다고 했던 것이다.

    그 말에 아진은 조금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조금만 따지고 보면 그 말이 맞을 것 같기도 했다.

    “사는 게 많이 힘듭니까?”

    아진이 묻자 사람들이 일제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객잔에 의심스러운 사람들이 없다고 생각해서 그런 건지 목소리를 낮춘 후 누군가 말했다.

    “이런 말을 하면 무식한 무지렁이가 헛소리를 한다고 하실 수도 있겠지만 요즘 저희는 예전에 흑도와 사파가 있을 때가 그나마 살기가 좋지 않았나 하는 말도 한답니다.”

    그것은 상상도 못 할 만큼 충격적인 소식이라 아진은 깜짝 놀라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어차피 나쁜 놈들은 늘 있습니다. 관병들이 나서서 왈패들을 싹 잡아가고 나면 평화로울 것 같은가요? 아닙니다. 그 빈자리에 썩은 물이 또 흘러 들어가서 그 자리를 채웁니다. 새로 나오는 놈들은 차라리 전에 있던 자들이 나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악독한 자들이죠. 전에 흑도 방파나 사파가 있었을 때는 위에서 정해 놓은 선이라도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그런 것도 없습니다.”

    아진은 설마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정말 특이한 경우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이구동성이었다.

    “흑도 방파는 서로 견제하는 게 있었습니다. 그리고 보호비를 받으면 확실하게 지켜 줬지요. 보호해 주고 싶지 않아도 자기들 자존심을 위해서라도 그랬어요. 어디 남의 구역에 와서 설치냐는 마음이었는지도 모르지요. 그런데 요즘은 그런 것도 없습니다. 그냥 돈만 갈취해요.”

    “맞습니다. 이놈 저놈이 와서 돈을 뜯어 가고 행패를 부리고 지켜 주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그냥 전처럼 강한 흑도 방파가 몇 군데 생기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돈은 지금이 그때보다 더 들고 생활이 불안한 건 더 심합니다. 흑도 방파를 아우르는 사파가 생기면 좋을 것 같아요.”

    아진은 정말 이해되지 않는다는 얼굴로, 그러느니 정파가 나서는 게 좋지 않냐고 물었지만 그들은 고개를 저었다.

    “생각해 보십시오. 무사님. 흑도는 아주 자연스럽게 생겨납니다. 잡초처럼 누가 씨를 뿌리지 않고 물을 주지 않아도 자연히 자라나요. 그렇지만 정파는 그렇지 않지요. 아주 좁은 구역에도 그 구역을 주름잡는 흑도 무리들은 있지 않습니까. 저희는 그 흑도들을 잡아 주는 사람들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정파가 아니라요.”

    아진은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그런 말을 듣게 될 거라고는 생각을 하지 못한 탓이었다.

    그는 모두가 평화롭게,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으면서 사는 세상을 만들어 주고 싶었지만 그것은 이상에 가까웠다.

    이루어질 수 없는 현실.

    실현 불가능한 꿈.

    그 와중에 사람들은 자기들을 조금 더 살살 때리는 사람이면 좋겠다고 꿈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소박하다고 해야 할지, 비굴하다고 해야 할지.

    그러나 지금의 아진이, 자기 자신은 물론 주위 사람들도 넉넉히 지켜낼 수 있는 힘을 가졌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그 역시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삶을 살아야 했을 터였다.

    그래서인지 섣불리 그들을 비굴하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비겁하다고 말하며 화를 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하는 책임.

    자신의 삶에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들은 그들이었다.

    대신 살아 줄 수 있는 게 아니라면 그들의 고민에 대해서 쉽게 왈가왈부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충격이 상당해서 아진은 한동안 말을 제대로 하지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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