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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325화 (325/470)

제325화

325화

잠시 그들 사이에 침묵이 이어졌다.

앞으로도 그런 침묵은 자주 그들을 찾아올 터였다.

그러나 이제는 할 말을 찾는 것이 그리 어렵지만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며 하월은 마음을 놓았다.

가주와 함께 있는 시간이 점점 편해지고 있었다.

가주보다 몇십 배, 몇백 배는 더 불편하고 어려웠던 황제와도 그렇게 되고 나니 이제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고 있었던 것이다.

* * *

전서응까지 따라나설 때는 아진도 조금 난감했다.

이 녀석이 그 전에 기억을 되찾았으면 했는데 끝까지 기억이 돌아오지 않는 듯했다.

보통의 전서구와 달라서 오가던 구간이 따로 정해진 게 없이 제 주인을 찾아다녔던 것 같았는데 영물도 이럴 때는 어쩔 수가 없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아진은 녀석이 영물이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다른 걸 다 떠나서 흑주와 그렇게 잘 지내는 것만 해도,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을 찾아온 것만 해도 영물의 자격은 충분히 갖춘 것 같았다.

린린에게 그런 말을 하면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타박을 주겠지만 지금으로서는 그것이 그의 진심이었다.

“너도 이름이 필요하겠구나. 어떤 게 좋을까? 흑주가 흑주니까 너는 흑조로 할까?”

그러자 그렇지 않아도 전부터 할 말이 많았다는 듯이 흑주가 정신없이 아진의 주위를 날아다녔다.

그 이름 좀 한 번 재고해 보라는 것 같았다.

“왜 그래. 흑주야? 너는 그 이름 마음에 안 들어? 나는 되게 귀여운 느낌이라 좋은데. 그러면 너도 암천대문 아저씨처럼 좀 센 이름으로 지어 줄까?”

바로 그거라는 듯이 흑주가 아진의 앞에 딱 섰다.

마치 새 이름을 받기 전에 기대가 돼서 설렌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래애? 우리 흑주가 그런 걸 좋아했구나. 그러면. 음. 광천대명?”

흑주는 새 이름이 마음에 드는 것처럼 아진에게 슬쩍 다가오더니 어깨를 툭 치고 돌아갔다.

새 이름이 퍽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는데 아진 입장에서는 난감하기도 했다.

이름이 두 글자에서 네 글자가 된다는 게 간단한 문제 같기는 해도 작전을 수행할 때 그 이름이 바로 입에 붙지 않을 것 같았던 것이다.

“그러면 일단 네 이름은 두 개인 걸로 하자. 흑주야. 흑주도 네 이름이고 광천대명도 네 이름이야. 그러니까 흑주라고 불러도 오기는 와야 해.”

흑주는 잘 알아들었다는 듯이 온몸으로 기쁨을 표현했다.

다음은 전서응의 차례였는데 이모저모로 생각을 해봐도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새야.

그렇게 부르면 딱인데.

너무 성의 없어 보이면 독수리야.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하면 어디선가 린린이나 소청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도대체 왜 그렇게 성의 없이 이름을 짓는 거냐고.

“아! 완전 센 이름 생각났다! 동서고금 천하제일조 어떠냐. 새야? 너무 길면 천하제일조라고 부르자. 너도 네 이름이 마음에 드냐. 새야?”

이름에 대해 말을 하고 있었지만 매번 부르기는 꼬박꼬박 새라고 부르고 있었고 이제는 전서응도 새가 제 이름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새야”라고 부르지 않으면 오지 않았던 것이다.

아진은 신기하다는 생각을 감추지 못한 채 전서응을 바라보았다.

요즘에도 전서응은 평상시에 내내 풀린 눈을 하고 있다가 주위에 적이 나타나거나 아진이 임무를 내릴 때만 눈빛이 돌아왔다.

하루 대부분의 시간 동안 술에 취해 있던 아저씨가 할 일이 생길 때 반짝 힘을 내는 것과 비슷했다.

“네가 안 좋은 기억을 갖고 있었던 게 아니면 좋겠다. 그래서 그 기억을 잃은 게 아니라면. 아닌가? 잃어버려서 다시 찾을 수 없는 거면 그 기억이 안 좋은 게 더 나은 건가? 좋은 기억이었으면 더 아쉬우려나?”

어떻게 생각하는 게 더 좋은 건지 알 수 없어서 아진은 전서응을 보며 생각했고 전서응은 여전히 풀린 눈을 한 채 그의 곁을 따랐다.

광천대명과 동서고금 천하제일조!

이제 아진에게는 그럴듯한 동료도 생겼다.

하나는 이름만 바꾼 거지만 일단 이름을 바꾸고 나니 뭔가 있어 보이고 자꾸 웃음이 났다.

“흑주야. 너도 돌아가고 싶었지? 으으으으. 이렇게 오래 걸릴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그렇게 말한 아진의 신법이 슬금슬금 빨라졌다.

흑주는 도중에 지쳤는지 아진의 품속으로 쏙 들어 가버렸지만 제일조는 지치지 않고 아진을 따라왔다.

마침내 산본이 아래로 내려다보였을 때 아진은 말할 수 없이 벅찬 기분을 느끼며 제일조에게 말해 주었다.

“저기야. 저기가 산본이야. 저기 저 커다란 장원 보이지? 저기가 산본의가야.”

저기가 산본의가야.

누군가에게 그곳을 자랑할 때는 언제나 자부심이 넘쳤다.

그리고 자기가 그곳을 얼마나 아끼게 됐는지 새롭게 느끼곤 했다.

“아진 공자님. 아진 공자니이이임.”

그를 발견한 사람들이 달려왔고 아진은 자신의 표정이 얼마나 밝아지는지도 모른 채 환하게 웃었다.

* * *

아진이 돌아간 그때 린린은 역천마의와 함께 벽력탄을 만드는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사이에 사소한 일이 하나 더 있기는 했는데 그건 정말 사소했다.

혈교 잔당의 토벌.

그동안 신교에서 뻗어 나가 온갖 사특하고 기이한 짓으로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어 신교에서도 늘 고민이 많았는데 일이 되려고 해서 그런 거였는지 혈교주와 잔당들을 일망타진할 수가 있었다.

이미 폭천의가 빠져나간 순간부터 숱한 위기에 봉착했던 그들은 한 곳에서 오래 정착하지 못한 채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녀야 했는데 그러다가 향화문의 정보망에 걸려들었다.

폭천의가 있을 때는 그가 가끔 발휘하곤 하는 힘 때문에 유지가 되던 조직이 폭천의 한 사람이 사라졌다고 크게 휘청였다.

남아 있던 사람들은 그동안 혈교가 유지될 수 있었던 것도 혈교주 때문이 아니라 폭천의 때문이었다는 것을 서서히 깨달아 갔다.

혈교주가 폭천의의 힘을 적절히 이용해 그에게 명령을 내리고 교의 세력을 유지해 왔던 것이다.

신교의 규모가 워낙 크고 각계각층에서 지도부에 불만을 가진 이들이 아예 없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앞으로도 그런 조직이 얼마든지 생겨날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오랫동안 앓던 이가 빠진 것처럼 속 시원한 쾌거였다.

혈교로 유입된 사람 중 상당수가 역천마의 체제를 인정하지 못하고 거기에 대해 불만을 가졌던 사람들이었던만큼 혈교가 역사에서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신교도들은 더욱 결집했다.

“지존. 요즘에는 밥을 안 먹어도 행복하고 기분이 좋아요. 제가 잘 할 수 있는 걸 한다는 게 그렇게 중요한 것 같아요.”

역천마의는 가끔 그런 말을 했는데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그렇다는 걸 알 것 같았다.

“벽력탄은 성공한 것 맞지?”

“네. 그럼요.”

역천마의는 폭천의 따위가 성공한 거라면 자기도 할 수 있는 게 당연하다고 의욕을 보였다가 번번이 좌절에 부딪히면서 그동안 마음고생이 대단했다.

절대로 실망시키고 싶지 않은 지존을 실망시켰다는 것도 그렇지만 폭천의가 한 걸 자신은 계속 실패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느끼는 분노도 상당했다.

그래도 특유의 근성으로 계속 매달려 역천마의는 마침내 벽력탄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일단 벽력탄을 만들려고 시도하다가 성공해서 만든 것이라 벽력탄이라고 부르고 있기는 하지만 도중에 조금씩 변형이 가해져서 그걸 벽력탄이라고 부르는 게 조금 무리가 있을 수는 있었다.

그것은 이미 폭천의가 만들었던 벽력탄의 성능을 두 배 이상 뛰어넘었던 것이다.

“역천마의. 그걸 어디에서 해 보는 게 좋을까? 성능이 너무 뛰어나서 잘못 하면 주위가 다 날아가 버릴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린린이 못내 걱정된다는 듯이 말하자 역천마의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 지존. 잘못하면 신교 전체가 피해를 볼 수도 있어요.”

자기가 만든 물건에 대한 대단한 자부심으로 역천마의가 말했지만 린린은 그래도 설마 그 정도까지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그럼 그것보다 일단 성능이 좀 약한 걸로 다시 만들어봐. 십 분지 일 정도로 약하게. 할 수 있지?”

린린은, 온갖 어려운 것을 주문해 놓고 그 뒤에 그 말을 아주 간단하게 덧붙이곤 했다.

‘할 수 있지?’

그런데 그 말을 들으면 역천마의는 어렵겠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지존이 자기를 믿고 맡긴 일인데 그렇게 말한다는 것은 대단한 불충이라는 이상한 사고방식 때문이었다.

“당연합니다. 지존.”

그리고 역천마의는 사서 고생을 했고 린린이 요구한 것을 결국 만들어 냈다.

“된 거야?”

“네. 지존. 지존께서 말씀하신 물건이 정확합니다.”

성능을 대폭 낮춘 벽력탄.

마침내 그것이 린린의 손에 들어왔고 두 사람은 고민 끝에, 십만대산의 한 봉우리에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동굴에서 그것의 성능을 시험해 보는 것으로 했다.

천마동이 먼저 물망에 올랐고 교주의 개인 연무실도 어떨까 했지만 역천마의는 그것들이 전부 간단하게 부서져 버릴 거라고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게 부서지면 사람들은 약간 의문을 품을 수도 있어요. 주군.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공간이라고 믿었는데 그곳이 무너졌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래. 그럴 만도 하군.”

그래서 동굴로 향했고 그곳에서 두 사람은 긴장된 얼굴을 한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린린은 역천마의가 성공할 거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 믿음의 근거에는 늘, ‘폭천의도 해냈는데……’ 라는 생각이 기저에 깔려 있었다.

“해 봐. 역천마의.”

“네. 지존.”

역천마의는 일단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동굴 끝을 향해 벽력탄을 던졌다.

불을 붙이지 않아도 커다란 충격이 주어지는 것만으로 터지도록 만들어졌는데 실수로 떨어지는 정도로는 터지지 않고 확실한 충격이 가해질 때 터지도록 세심하게 조절을 해 두었다.

쿠콰콰콰쾅-!!!

이윽고 천지를 뒤흔드는 요란한 소리가 나고 돌조각이 엄청난 속도로 날아들었다.

린린은 겹겹의 검막을 만들었다.

하나면 될 거라고 생각하고 만들었다가 그게 너무 간단하게 찢어지는 바람에 깜짝 놀라 급히 두 겹의 검막을 더 만들어 내야 했다.

천장이 무너져 내릴 것에도 대비하고 있었는데 그런 일까지는 일어나지 않았다.

“이상하긴 이상하네.”

다른 것 때문이 아니라 린린은 오히려 그 동굴 때문에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역천마의도 비슷한 기분을 느꼈는지 린린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그날의 성과는 벽력탄보다 그 이상한 동굴을 발견했다는 것에 있을지도 몰랐다.

폭발은 생각보다 빠르게 멈췄다.

역천마의와 린린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동굴 안쪽으로 들어갔다.

린린은 혹시 동굴이 터져나가 버린 건 아닐까 했는데 심상치 않은 빛이 들어오는 것을 보면서 그 생각은 조금씩 더 굳어졌다.

“지존…….”

그들이 마침내 동굴 끝에 다다랐을 때 한낮의 태양 빛이 그곳을 향해 눈부시게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그들이 있던 곳이 동굴이라는 사실을 떠나서 생각하더라도 그것은 이상했다.

그들이 들어온 동굴 밖은 이제 새벽의 여명이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린린은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이 밀려드는 것을 느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손에는 이미 검이 들려 있었다.

싸움이 제대로 시작되기 전에는 검집에 손도 가져다 대지 않는 린린인 것을 생각하자면 그것은 상당히 의아한 일이었다.

그러나 역천마의는 린린이 그러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동굴 바깥쪽의 대기가 동굴 쪽으로 들어오고 있었는데 이질감이 그들을 당황하게 했다.

대기가 품은 자연의 기운이 완전히 달랐던 것이다.

린린과 역천마의의 시선이 마주쳤다.

“닫아야겠어. 역천마의. 여기를 봉쇄한다.”

“예, 지존!”

린린의 말에 역천마의가 동굴 바깥쪽으로 몸을 날렸다.

린린 역시 그 뒤를 따라 나가 검에 공력을 힘껏 퍼부었다.

‘아니지. 오라버니? 오라버니가 살던 곳이 열려 버린 건 아니지?’

린린은 뒤늦게, 불안의 실체를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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