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4화
324화
환관과 궁녀들은 그가 들어오는 것을 보면서도 감히 태자에게 고하지 못했다.
황제가 돌아온 이상 태자는 그곳을 무단으로 검거하고 있는 불법 침입자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까지 태자에 대한 충성심을 보이려고 하는 바보는 없을 터였다.
그 자리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이 얼마나 적응력이 대단한 족속인지, 그리고 얼마나 시류에 편승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인지 어느 정도 나타내는 것이 아니던가.
황제를 뒤따르는 이들의 얼굴에 조금씩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러나 아진은 그 상황에서 홀로 여유가 넘쳤다.
좋지 않은 결말을 돌이킬 힘.
그런 힘을 가졌다는 것이 그를 편안하게 만들었다.
황제의 걸음이 침전으로 옮겨지는 동안에도 그곳에서는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침전 앞을 지키고 있다가 화등잔만 해진 눈으로 황제를 보고 놀란 궁인들이 기겁했지만 그들도 안에 대고 말을 하지는 못했다.
황제는 익숙하게 그곳으로 들어갔다.
문이 열리고 그가 들어가는 동안에도 태자는 잠을 자고 있었다.
예민하고 불안해해서 잠을 깊이 이루지도 못하는 사람일 줄 알았는데 성격과는 달리 푹 잘 자고 있었다.
황제는 태자가 누워있는 곳을 향해 멈추지 않고 다가갔다.
“…….”
나중에는 마침내 태자도 기척을 느낀 듯 눈을 뜨고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키더니 황제를 바라보았다.
흡사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얼굴이었다.
“부, 부황 폐하…….”
그의 얼굴에 핏기가 사라진 채 입술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보며 황제는 검을 들어 태자의 턱을 눌렀다.
“할 말이 있느냐.”
“부황…… 폐하. 그것이…… 그것이 소자는 아무 잘못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어마마마께서 시키신 일입니다. 소자는 황위에 관심도 없습니다. 부황 폐하께서 잘 다스리고 계신 데 소자가 감히 무엇을 바랄 수가 있겠습니까. 소자는 아무것도 욕심내는 것이 없습니다. 부황 폐하께서 돌아오셔서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폐하께서 돌아오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태자는 급히 서둘러 말했고 황제의 얼굴에는 싸늘한 웃음이 퍼졌다.
“재미있는 소리를 하는구나. 태자. 그래. 그렇다는 말이지.”
말은 여유 있게 하면서도 그의 검은 자비를 두지 않고 태자의 목으로 내려갔다.
검 끝이 살에 닿았다가 여린 살을 찢고 들어가자 태자의 눈이 흰자위만 남을 것처럼 흔들렸다.
“폐, 폐하…… 폐하…… 제발…… 제발…….”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순간의 유혹과 탐욕을 이기지 못했다.
폭천의.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름은 그것이었다.
폭천의만 아니었다면.
벽력탄에 대한 꿈만 아니었다면.
자기에게 그 엄청나고 압도적인 군대가 생겨날 거라는 생각만 아니었다면 여기에서 이런 일을 당하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에 태자는 부들부들 떨었다.
이미 죽어 버린 폭천의를 다시 끌어다가 죽이고 싶을 만큼 그는 분노로 끓어올랐다.
그러나 황제는 태자의 생각이 어떤지 전혀 궁금해하지 않았다.
“네 동생들을 죽이고 싶었던가 보더구나. 이 애비도 보기가 싫었던 듯하고. 우리가 같은 하늘 아래에서 살 수 없는 존재들이라면 정해진 것은 하나가 아니겠느냐. 누군가는 죽어야겠지. 그리고 짐은 아직 염마를 만날 생각이 없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검신의 길이가 짧아지면서 사라진 검신은 태자의 목으로 들어갔고 목을 꿰뚫은 채 그 뒤에서 나왔다.
태자는 죽음을 맞이하고 스르르 무너졌다.
죽음에는 각자의 삶이 묻어났고 그 색이 있었다.
누군가의 죽음은 장엄하고 장렬했고 살아남은 이들에게 떨림을 주었지만 태자의 죽음은 그저 옹졸하고 탐욕스러운 한 개인의 역사가 끝을 맺었다는 의미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황제는 검을 돌려 빼냈다.
그러자 곁에 시켜서 있던 하월이 황제에게서 검을 받아들었다.
“짐이 봐야 할 사람이 한 사람 더 있을 것 같군. 아직 소식이 퍼지지 않았기를 바란다만 그럴 리는 없겠지.”
황제는 말을 마치고 그대로 돌아섰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그가 황후전으로 향하는 것을 알고 그 길을 예비했다.
황후전까지 이르는 동안 황제는 서두르지 않았다.
가는 길에 마주친 수많은 사람을 보면서 하나하나를 눈에 일일이 담아두는 듯했다.
그 시간에 황후전의 근처를 서성이고 있다는 것만 보더라도 그들의 성향은 이미 어느 정도 드러났다고 봐야 옳았다.
“폐하……!”
궁인들이 허리를 꺾을 듯이 숙이며 외치자 황제가 웃었다.
“그렇게 해서 안에 있는 네 윗전에게 짐이 왔음을 알리려고 하는 것이냐. 제법 발칙하구나.”
황제의 말에 궁인들이 벌벌 떨면서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섰고 황제는 성큼성큼 걸어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가 안으로 들어가서 본 것은 목을 매달고 죽은 황후의 모습뿐이었다.
황제가 다가오는 발소리.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지독한 공포와 절망을 안겼고 시시각각 목을 조여온다고 생각한 듯했다.
결국 황후는 그 공포를 참지 못한 채 스스로 목을 끊는 방법을 택한 것 같았다.
황후를 보려고 들어갔다가 못 볼 모습을 본 황제는 곁에 서 있던 선이남을 바라보았다.
“죽음을 확인하라. 선 부정.”
“예. 폐하.”
선이남은 매달린 황후에게 다가가 그녀의 맥을 짚었고 그녀에게서 생명의 빛이 완전히 꺼졌음을 확인했다.
황제는 선이남의 표정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연석영까지는 처리를 하고 나서야 짐의 일을 시작할 수가 있겠구나.”
연석영을 찾기 위해 궁 밖에 있는 그의 저택으로 사람을 보낼 필요도 없었다.
태자가 황제의 궁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연석영 역시 궁 하나를 차지하고 그곳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누리고 있었던 것이다.
연석영은 곧 황제의 앞으로 끌려 나왔다.
“참으로 질긴 인연이 아니었던가.”
황제는 여전히 표정을 찾기 어려운 얼굴로 연석영을 보며 말했다.
그는 어떻게든 빠져나가고 싶은 듯 그 모든 것이 자기가 원한 것이 아니었으며 태자와 황후가 시키는 것을 어쩔 수 없이 한 것뿐이라고 말했다.
그런 이야기밖에는 나오지 않을 거라는 것을 황제도 모르지는 않았을 테고 그는 곧 지루하다는 표정을 지은 후 손짓을 했다.
연석영은 말을 하던 도중에 목이 잘려나갔다.
“그러면 이제 남은 일은 어찌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느냐. 짐은 이미 한 번 용서해 주었다. 말을 하면 행동을 돌이킬 거라고 생각하면서 그리했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었느냐. 너희가 친히 짐의 어리석음을 일깨워 주려고 이리 한 것 같은데 짐이 너희의 충정을 헤아리지 못한다면 그것 또한 큰 잘못이 아니겠느냐. 사람이 같은 실수를 반복해서도 안 될 테고 말이다.”
그의 결정은 단호했다.
황제 시해 사건.
천만다행으로 다시 살아나기는 했지만 태자의 세력이 황제 시해에 성공한 것은 분명했다.
그 사건의 처리는 그렇게 하나하나 진행되어 나갔다.
대규모의 숙청이 자행되었고 한동안 궁에서 피비린내가 그치지 않을 듯했지만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황제는 그러면서도 조급하게 굴지 않았고 자기가 사라진 동안 핍박을 당하면서 마음을 지킨 이들을 중용하고 그들을 위로하는 일도 잊지 않았다.
아진은 가끔 황제가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알았다.
가까이 불러두고 얘기라도 하고 싶은 것 같았지만 우선은 먼저 해야 할 일이 많아서 그러지 못하는 듯했다.
그때마다 아진은 웃어 보였고 황제도 아진과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산본의가에서 태어났으니 망정이었지 제가 만약에 황궁에서 태어났으면 어쩔 뻔했어요?”
아진이 말하자 말코가 웃었다.
“공자님. 저는 이제 제자리로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 공자님이랑 놀아 드리는 것도 힘드네요. 그래도 재미있었습니다. 공자님.”
말코를 시작으로 하나둘씩 아진의 곁을 떠났다.
일상으로의 복귀.
그 말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가 있는지, 그것을 얼마나 바라 왔던지 그때까지만 해도 제대로 깨닫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제 자리를 찾아가고 선이남이 아진의 곁으로 다가왔다.
“어떻게 할래. 아진아? 폐하께서는 당분간 더 이런 시간을 보내셔야 할 것 같은데. 그런데 산본을 너무 오래 비워 뒀잖아. 우선 내려가 있어. 네가 있어야 마음이 든든한데 그건 산본의가도 마찬가지잖아. 나는 네가 옆에 있으면 좋은데 지금 산본의가에는 누가 있는 건가 하는 생각에 늘 불안해.”
선이남의 말에 아진은 그때까지 그 말이 나오기만 바라고 있었던 것처럼 고마워했다.
“그러면 폐하께는 형님이 말씀을 잘 드려 주세요.”
“그래. 걱정하지 마라. 그렇게 할 테니까.”
그렇게 당당하게 말을 하더니 정작 황제가 아진을 찾았을 때는 자기도 아진이 어디에 갔는지 잠시 잊어버리고 헤맸지만 어찌 됐건 그렇게 해서 아진은 황성을 떠날 수 있었다.
폭천의로 야기된.
그 전에는 혈교에서부터 먼저 야기된 일이 길고 긴 여정을 마치고 있었던 것이다.
* * *
북궁세가는 전과 크게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으면서도 더 이상 전과 같은 곳이 아니었다.
하월은 희한하다고 생각하면서 가주전으로 향했다.
가주는 오랜만에 본 하월이 반갑고 안심이 돼서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와 하월을 덥석 안았다.
“무사했구나. 이 녀석아.”
“…….”
가주에게 그런 대우를 받아본 적은 없는 것 같아서 하월은 뻘쭘해진 채 가주에게서 빠져나왔다.
“이번에 네 공이 컸다고 들었다. 네 공이 큰 게 문제가 아니라 화를 잘 피해 간 게 다행인 거지. 얼마나 많은 가문이 몰락했느냐. 이 애비는 이제 정말 강한 건 끝까지 살아남고 버티는 거라는 생각이 드는구나. 너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나이가 드는 모양이야.”
그러고 보니 가주와 그런 이야기를 나눌 일도 거의 없었다.
가주만 탓할 것도 아니었고 거기에는 자신의 잘못도 많이 있었다.
가주 쪽에서 손을 내밀고 다가오면 일부러 튕기기 일쑤였는데 이제는 그러지 않겠다고 다짐을 해 보았다.
“도대체 그게 다 어찌 된 일이냐. 말을 해 줄 수 있느냐. 하월아.”
“예. 아버님.”
가주는 하월이 그렇게 순순히 나오는 것도 나름대로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에게는 후회되는 것들이 많았다.
아들을 환관으로 만들어 궁에 보내 버린 것도 그랬다.
가주는 하월에게 양자를 들이도록 말을 해 볼 생각을 했는데 그가 그 말을 꺼내자 하월이 한참 멍하니 있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환관으로 들어갔으니 스스로는 후계를 잇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게 당연했는데 이제는 가주에게도 진실을 말해 줘도 좋을 듯했다.
“저는 반쪽짜리 환관입니다. 환관이지만 다른 환관들과 같지는 않습니다. 폐하께서 배려해 주신 덕에 그리되었습니다.”
“그, 그게…… 무슨 말이냐. 하월아? 그러면 네…….”
고추가 무사하다는 말이냐,라는 말은 차마 입 밖에 꺼내지 못하고 그가 입술만 달싹거렸다.
“예. 아버님.”
“세상에. 어떻게…… 어떻게 이런 일이 있다는 말이냐. 나는 모두 포기하고 있었는데.”
가주는 진심으로 기뻐했고 하월은 낯설게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누군가 자기에게 일어난 일로 인해 진심으로 기뻐하는 일.
이제는 그에게도 그런 경험과 기억이 제법 쌓여 있었다.
“다행이다. 다행이야. 그러면 너는 언제까지 궁에 있을 생각이냐. 이제 나와서 가문의 일을 돕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
가주의 말에 그렇지 않아도 하월은 거기에 대해 생각할 것이 많아서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그래. 그래. 서두를 게 뭐가 있겠느냐.”
진심을 보여 얻어낸 신뢰.
포기해야 했던 곳에서 다시 시작하는 관계.
그것들이 하월에게도 더 이상 어렵게만 느껴지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