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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323화 (323/470)

제323화

323화

아진은 솔직히, 이번에 하월이 보인 신의(信義)가 경이로웠다.

평화로운 시기에 보이는 충성이야 그럴 수 있다고 하지만 그의 마음이 환란 가운데에서도 변치 않았다는 게 놀라웠던 것이다.

황상을 살리기 위해서 죽이고, 목숨을 건 채로 시신을 훔쳐 달아난 하월의 공로가 아니었다면 황상은 이 자리에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일의 일등 공신이 하월이었지만 아직 황상은 거기에 대해 언급이 없었다.

하월이라면 포상에 대한 욕심이 날만도 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아진이 그에게 물었다.

“폐하께서 무엇을 갖고 싶냐고 묻지 않으셨습니까? 원하는 걸 들어 주겠다고 하셨을지도 모르겠는데요?”

그러자 하월이 고개를 저었다.

“나는 이제 황상께서 그런 말씀을 하셔도 별로 기쁘지 않습니다. 내가 황상께 속은 게 몇 번인지 생각해 보면 내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진은 결국 웃음을 참지 못했다.

정말 하월의 사연이야말로 눈물 없이는 들어줄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렇게 웃지 마시지요. 그 뒤에 공자가 있었다는 걸 모를 줄 아십니까?”

“폐하께서 그런 얘기도 다 하셨습니까? 정말 엄청나게 친해지셨군요.”

하월은 기가 막힌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런데 공자는 궁에 계속 머물 생각입니까?”

아진이 묻자 하월이 고개를 저었다.

“동창은 싫습니다. 내가 가고 싶어 한다고 해도 받아주지도 않겠지요.”

“그자들이 받아주지 않으면 공자가 만들면 되지 않습니까. 어차피 동창 제독은 이번 일로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겁니다.”

“…….”

하월도 거기까지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제 북궁세가로 돌아가고 싶었다.

너무 지쳐서 지금은 다른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아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지만 우선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공자가 동창 제독이 되면 잘 어울릴 것 같기는 합니다.”

“어울리는 것으로 하자면야 안 어울리는 게 뭐가 있겠습니까. 나는 내각대학사에도 잘 어울릴 겁니다.”

하월이 그런 말도 할 줄 아는 사람인가 하면서 다른 사람들이 피식거렸다.

둘이서 얘기를 하고 있었지만 어차피 마차 옆에서 말을 타고 가는 중이라 웬만한 거리에서는 그들의 이야기가 들렸다.

“가주님은 용감하셨습니다.”

“…….”

하월은 그 일이 있고 나서, 아직 가주와 제대로 만나 대화를 나눠 보지도 못했다.

그렇지 않아도 가문의 일이 조금 걱정되기는 했는데 그 말을 물을 사람이 없었다.

그러던 차에 아진이 얘기를 해 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공자.”

하월이 조금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은 듯 아진을 조용히 불렀다.

만약 두 사람만 나누고 싶은 이야기였다면 전음을 했을 텐데 그렇게까지 하지 않는 것을 보니 그 정도로 비밀을 요하는 일은 아닌가 보다고 생각하며 아진이 하월을 보았다.

“공자도 가주님의 친자가 아니라는 말을 들었는데 말입니다. 그 말을 들은 후에 혹시 열등감 같은 것이 느껴지지는 않았습니까?”

아진은 하월이 그런 것을 물을 거라고는 생각을 하지 못했고 그에 대한 대답도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대답을 하는데 망설임은 없었다.

“전혀요. 얼마나 대단하신 분들입니까. 친자가 아닌데도 형님과 저를 키우시는데 조금도 차별이 없었습니다. 아버님께 그 말씀을 들을 때까지 저뿐 아니라 누구도 제가 친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습니다.”

하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산본의가의 가주라면 정말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제 하월 공자는 좋으나 싫으나 북궁세가를 이어야 하지 않습니까? 이제 와서 그런 소리를 해 봤자 투정으로밖에 들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이라면 그냥 기분 좋게 하십시오.”

아진은 자기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되기는 한 걸까 했다.

이쪽에서는 제법 그럴듯하게 가족 관계를 만들어 냈지만 원래 살던 곳에서 진짜 가족과는 이미 한번 거하게 말아먹은 전력이 있어서였다.

그래도 하월이 그 일을 알아차리고 따지지는 않을 거라 생각하면서 아진은 목에 힘을 주고 그에게 충고를 이어 나갔고 하월은 그 일로 고민이 깊었었는지 제법 온순하게 충고를 들었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자기들이 아는 사례를 들어가면서 꼭 피를 이어받은 사람이 아니어도 나중에는 그 아들이 더 잘하기도 하더라며 하월을 격려해 주었다.

하월에게는 그런 경험이 많지 않았고 사람들이 자신의 감정을 생각하면서 도움을 주고 싶어 이런 저런 얘기를 해 주는 게 낯설고 어색했다.

그래도 그 느낌이 싫지 않았다.

그리고 어쩌면 아주 오래전부터 그런 것을 갈급해 왔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북궁세가의 내일이 기대되는군요.”

“서 공자는 언제 산본으로 가십니까?”

“돌아가야죠. 일단 내일이 되기 전에 가는 게 목표입니다. 제가 안 보이면 폐하께는 잘 말씀을 드려주십시오.”

그러자 주위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참. 공자님. 비무 대회 잊지 마십시오. 가모님께 꼭 말씀해 주세요.”

말코가 말하자 다른 사람들이 그게 무슨 얘기인지 물었고 말코는 신이 나서 떠들어댔다.

“산본의가의 사업장에 속한 사람들이라니. 말이 그렇지 그 구성이면 정말 어마어마하겠습니다.”

하월이 말하자 선이남이 멈춘 채 기다리더니 아진의 옆으로 왔다.

“그게 무슨 소리야? 비무 대회를 할 거라고?”

그 이야기는 순식간에 퍼져나갔고 가모님께 잘 말씀드려서 추진할 수 있도록 해 보라던 말이 와전돼서 산본의가에서 비무 대회가 열리는 것은 어느덧 기정사실이 되었다.

“철방에서 검 하나 정도는 부상으로 지원을 해 주겠지요?”

여기저기서 자기들의 소박한 꿈을 말하기도 했다.

“공자님. 저 이상한 전서응도 부상으로 걸면 어떠세요? 저 녀석 은근히 도움이 많이 됩니다.”

“이야아. 영물이 부상으로 걸린 비무 대회라니. 이거 아무래도 일이 커지겠는데요. 공자님?”

아진은 여기에서 처신을 잘못하다가는 다 털리겠다고 생각하며 그저 웃음만 짓고 입을 다물었다.

어느덧 그들의 앞으로 황궁이 보였고 태양이 만방을 비추고 있었다.

“돌아왔네요. 형님.”

아진이 선이남에게 말하자 그가 감격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래. 돌아오는 길이 이렇게 멀 줄은 전에는 생각도 못 했다. 그런데 오니까 좋구나. 내가 이곳을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이 좋아했나보다. 아진아.”

“다행입니다. 싫어하셨다면 죄송했을 거예요. 어차피 형님이 맡으셔야 했을 테니까요.”

선이남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남들의 인정과 존경을 받는 높은 자리를 양보하면서 그렇게 말을 하는 사람은 세상에 아진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행렬이 황궁의 정문에 도착했을 때 어떤 소란이 생길지는 말을 할 필요도 없었다.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은 사람들이 일제히 그곳을 보았고 그때까지도 설마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마차 안에 누가 타고 있는지 어느 정도 짐작하는 것 같았는데 그때 황제가 친히 마차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

위사들은 그 자리에 우뚝 멈춰선 채 어찌할 바를 알지 못했다.

그러다가 한두 사람이 황제 폐하를 불렀고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짐이 황제니라. 알기는 하는 모양이군. 그러면 이제 여기에 서 있는 짐은 어찌하면 좋겠느냐.”

“당연히…… 당연히 안으로 드셔야…….”

그들은 난감한 듯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살아 돌아온 황제를 막을 권한은 없었다.

그들이 그동안 태자나 연석영을 대우했던 것은 황제가 죽었다는, 그래서 황위가 비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었던 거였는데 황제가 나타난 이상 상황이 완전히 달라진 탓이었다.

소문은 빠르게 퍼졌다.

슬슬 입궁을 서두르던 사람들이 그곳에 도착하고 있었고 혼란은 들불처럼 번졌다.

“폐, 폐하……!”

그들의 양상은 분명하게 나뉘었다.

태자의 체제로 새 시대가 도래했다고 생각하며 그에게 빌붙으려고 했던 사람들에게는 황제의 모습이 야차와도 같아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황제를 기다리던 사람들은 황제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눈물이 맺힌 눈을 하고 달려와 그의 앞에서 엎드렸다.

황제는 그동안 누가 어떤 행동을 하고 무슨 말을 해 왔는지 알고 있었기에 그들을 판단할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 짐이 돌아왔다. 오래 참고 오래 기다렸다. 잘 하였다. 그리고 장하다.”

“폐하……!!”

여기저기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에게는 황제가 돌아왔다는 그 사실이 큰 선물이자 상이 되는 것 같았다.

아진은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깊이 깨달아지는 바가 있었다.

자신에게도 그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을 거라는 사실이었다.

“그럼 이제 안으로 들어가도록 하자. 내가 만나봐야 할 사람들이 많이 있지 않으냐. 태자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

그러자 누군가 다가와 공손히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장원에서 폭발 사고가 일어나고 바깥의 경비는 허술해서 위험하고 걱정이 된다 하시며 궁으로 들어와서 생활하고 계십니다.”

“그래. 궁 중에 어느 곳에 머물고 있는지도 말을 해 보아라.”

“그것이…….”

선뜻 대답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답이 되었다.

황제는 고개를 끄덕인 채 걸음을 옮겼다.

태자가 황제의 궁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어떤 후폭풍을 가져올지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때까지 어느 정도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 같던 황제였지만 그 순간 표정이 바뀌었다.

싸늘하게 바뀐 그를 보면서 이제는 누구도 감히 다가가거나 쉽게 감격에 빠지거나 말을 하지도 못했다.

황제는 다시 마차에 타는 대신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하월이 말을 타고 달려가 제가 타던 말을 그에게 주었다.

하월이 타던 말은 제법 기품이 넘치고 위풍당당했고 황제를 태우고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안으로 들어가는 동안 제 역할을 제대로 해냈다.

“폐……하……!”

미리 궁에 와 있던 사람들은 황제의 행차를 뒤늦게 알아차렸고 그대로 그 자리에 굳어 버린 것처럼 멈춰 서고 말았다.

황제는 그들을 보면서 표정의 변화를 보이지도 않았고 입을 열어 말을 하지도 않았다.

그는 그렇게 태자가 있는 곳을 향해 빠르게 걸어갔다.

소식이 전해진다고 해서 태자나 황후가 도망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끓어오르는 분노 때문에 자신이 제어되지 않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이놈을…… 이놈을……!”

황제는 자신의 궁 앞에 이르자 말에서 미끄러져 내리며 옆을 돌아보았다.

그가 검을 찾는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다시 하월이 그에게 가서 검을 건네주었다.

그리고 선이남과 남이천이 동시에 황제의 곁으로 갔고 암천대문 등은 그때부터 부지런히 움직여 원래 자기들의 자리였던 곳으로 돌아갔다.

자기들이 주인이었지만 피치 못할 사정으로 떠나 있어야 했던 곳.

그곳으로 사람들이 가자 그 자리에 버티며 태자의 비위를 맞추던 사람들은 얼굴이 흑빛으로 변한 채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하며 망연자실해하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폐하를 부르는 이도 없었다.

황제가 들고 있는 검이 어느 순간 자기들의 목을 노릴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

짙은 적막감 속에 황제의 발걸음 소리만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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