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2화
322화
“아…… 안 되겠어요. 이 일이 끝나고 나면 산본의가 가주배 그거 한 번 해요. 산본의가의 사업장에 속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해서 비무 대회를 하는 겁니다. 제가 혈천방 때나 중간이었지 이제는 그렇지 않다고요.”
아진은 그럴 듯하다고 생각하며 말코를 바라보았다.
“정말 괜찮을 것 같은데요? 제가 내려가서 추진해 볼까요?”
“아뇨. 가모님한테 말씀드려 보세요. 그런 일은 가모님이 추진을 해 주셔야 재미있습니다. 상품도 좋은 거로 거셔야 하는데 가모님이 손이 크시잖아요.”
한창 이런저런 말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데 흑주와 전서응이 같이 날아왔다.
“그런데 저 새도 정말 웃겨요. 전서응이라는 건 맞는 것 같은데 영물이라는 건 조금 의심스러워요. 저는 아무래도 아닌 것 같습니다. 아니. 무슨 영물이 눈이 저렇게 풀려 있습니까? 저거 혹시 그런 건 아닐까요? 혈교나 사파에서 주술로 만든 그런 거요. 공자님은 그런 얘기 못 들어 보셨어요?”
아진도 언젠가 들어 본 적이 있기는 했다.
까마귀 같은 것을 잡아다가 사술을 걸어서 감시해야 하는 대상이 머무는 곳으로 날리면 그 까마귀의 눈을 통해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과 그곳에서 나누는 말까지 전부 알 수 있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정말 그런 것 같기도 하다고 생각하면서 새의 눈을 들여다봤더니 말코가 먼저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그건 아닌 것 같네요. 얘는 그냥 맛이 간 것 같아요.”
말을 마친 두 사람은 지붕 위에서 일어섰다.
흑주가 그곳에 나타났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리기도 했고 그들도 기척을 알아차렸던 것이다.
“흑주는 이제 밥 먹을 때가 아니면 안 오는 거냐?”
아진이 말하자 흑주가 아진의 어깨 위에 둥둥 떠서 대기 상태로 들어갔다.
전서응도 그 곁에서 대충 자리를 잡았다.
평소에는 맹해서 흑주가 데리고 다니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는데 일단 적이 나타나면 그때부터는 무섭게 돌변했다.
바로 지금처럼.
키야아아악-!
황후가 황자들을 노릴 거라는 것은 특별히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언제 그 일이 일어나겠는가 하는 문제만 남는 거였는데 황제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이 점점 더 많아지면서 황후가 압박감을 느낄 거라는 것도 쉽게 예상할 수가 있었다.
흑암단으로 다른 곳이 충분히 통제되고 있었기에 아진을 비롯한 몇몇 사람들은 황자들의 처소를 지켰다.
그리고 드디어, 그들이 기다리던 손님들이 들이닥친 것이다.
“무슨 일…….”
일어나서 근엄하게 꾸짖으려 하던 말코는 할 말을 잃었다.
무슨 일이냐. 여기에 나타난 이상 이제부터 벌어질 일들은 모두 네놈들의 책임이다.
그것으로 시작해 일장 훈계를 하려던 말코를 두고 전서응이 먼저 날아가 장원으로 들어오는 자의 머리를 낚아채 높이 올라갔던 것이다.
짧은 비명이 들리다가 금세 멈췄다.
그리고 그 뒤를 이상한 소리가 이어받았다.
우걱, 우걱-.
저 멀리, 아주 아득한 곳에서 기이한 소리가 들렸다.
자객들은 전각 지붕에 아진과 말코가 있는 것을 보았고 그 피 말리는 대치 상태에서 함부로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하늘에서 붉은 비 같은 것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게 피라는 것을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러고도 우걱우걱 거리는 소리는 한동안 더 이어졌다.
“…….”
누군가, 더 이상 호기심에 이기지 못한 채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을 보며 아진은 몸을 날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들 사이에 거리가 제법 있었는데 그가 언제 그렇게 다가와 버린 건지 알 수 없던 자객들은 헛숨을 들이쉬었다.
전서응이 일으킨 파장은 컸다.
그들은 처음의 기개는 전부 다 사라진 채, 혼몽에 빠진 것처럼 헤맸다.
지독한 두려움과 긴장감에 사로잡혀 손은 제대로 움직이지도 않았다.
아마도 그들은 평소의 기량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을 것이다.
전서응은 마치 노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들 주위로 내려와 낮게 날면서 자기가 차지한 사람의 몸을 우걱우걱 씹어댔다.
“으으으아아악!”
목을 잃은 몸이 바닥으로 떨어지자 그것을 본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고, 안에 있던 사람들은 건물로 더욱 깊이 들어가 꼼짝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네놈들이 이곳에 와서 저지르려고 한 짓을 생각하자면 좀 더 잔인하게 죽이는 것이 맞겠으나 아래에 어리신 황자 전하가 계시니 이 정도로 하는 것이다. 고맙게 여겨라.”
아진이 말하고 검을 휘둘렀다.
사람을 죽이기 위해 그들에게 다가가는 것도 아니고 그저 허공을 베는 것뿐이었는데 그의 검에서 날아간 검영이 놈들의 몸을 노렸다.
말코는 혹시라도 아진이 놓치는 사람이 나타날까 해서 대비하며 기다렸고 흑주는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러 날아들었다.
흑주가 날뛰는 것을 보고 신이 났는지 전서응 역시 한 놈을 더 노리고 날아왔다.
“으아아악!”
아진의 검에 당하는 게 더 무서운지, 흑주에게 진기를 빨리는 게 더 무서운지, 그도 아니면 독수리에게 잡혀 하늘로 날아올랐다가 거기에서 떨어지는 게 더 무서운지.
그들은 도저히 가늠되지 않는 공포에 잠식된 채 죽음을 맞이했다.
“공자님이랑 같이 다니는 거 정말 재미있습니다. 사람들이 왜 그렇게 공자님과 다니고 싶어 하는지 알겠습니다.”
말코는 일이 순식간에 끝나자 시원하게 웃으며 말했다.
“저는 내려가서 황자 전하를 뵙고 안심시켜 드리겠습니다.”
“예. 공자님. 다른 놈들이 더 올 것 같지는 않지만 오더라도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
말코보다는 흑주와 전서응이 더 미덥기는 했지만 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진이 몸을 날려 바닥에 착지하자 전각 안의 긴장감이 더욱 짙게 느껴졌다.
“저는 서도진이라 합니다. 황자 전하. 황상 폐하께서 저를 이곳으로 보내셨습니다. 폐하께서는 전하의 안위를 걱정하고 계십니다. 아무도 전하를 해치지 못할 것이니 강건히 계십시오.”
아진이 말하고 돌아서려 하자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고 자박자박 마룻바닥을 밟고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부황 폐하가…… 부황 폐하가 보내셨다는 말씀이 사실입니까?”
고개를 들고 그렇게 묻는 아이는 이제 대여섯 살 정도밖에 안 돼 보였다.
“예. 전하. 황상 폐하께서는 건강한 모습으로 모처에 머물고 계십니다.”
“정말…… 정말 부황 폐하가 건강하십니까?”
어린 황자의 눈에 순식간에 눈물이 맺혔다.
아진은 웃음을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황자 전하. 전하들을 그리워하고 계십니다. 걱정이 많으십니다.”
아진은 어린 황자의 모습을 보며 흐뭇해진 와중에도 자기가 좀 전에 했던 말로 인해서 혈풍이 불 수도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 급히 말을 덧붙였다.
특별히 한 사람만 걱정하고 그리워한 것이 아니라 황자‘들’을 그리워하고 있다고 말한 것이다.
황자를 따라 나온 수행들은 아진이 한 말을 알아차린 듯했지만 황자는 그런 것은 상관없다는 듯 여전히 감격한 채 울먹이고 있었다.
“그런데 저 사람들은 누구예요?”
“태자 전하와 황후 마마가 보낸 자들일 것입니다.”
“……예?”
황자는 놀란 얼굴로 물었고 황자의 곁에 있던 여인이 표정을 굳혔다.
“도와주신 것은 고마우나 그런 말씀을 함부로 하는 것은 좋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도 황자의 이모뻘이 되는 사람일 터였다.
황자의 어머니가 자신의 여동생에게 황자의 보호와 양육을 맡겼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런 말을 듣게 하지 않는 것보다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 더 좋겠지요. 그런데 그 일이 이미 일어나 버렸습니다. 황자 전하께서는 독초와 약초가 함께 자라는 숲을 거니시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독초에 상하시지 않으려면 어떤 게 독초인지 먼저 아는 것도 중요하지요.”
“…….”
괜히 아진과 대립하려고 한 말은 아니었는지 그녀도 더 이상은 말을 하지 않았다.
“황자 전하. 전하께서는 영민하시니 훌륭한 분으로 자라실 것입니다.”
아진은 그 정도로 말하고 인사를 한 후에 전각 지붕으로 올라갔다.
“오늘쯤일 것 같지 않습니까, 공자님?”
말코의 말을 들으며 아진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황후가 무슨 일을 도모했는지 확실해진 데다 더 이상은 개인 병력에 의존해서 황자들의 경호를 맡기는 게 위험하다는 것도 알았을 것이니 오늘쯤 황상이 중대한 발표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신호이기라도 한 것처럼 장원으로 금의위사들이 들어섰다.
태자가 일을 벌인 후에 일제히 사라졌던, 황상의 사람들이었다.
“황자 전하를 보호하라는 황상 폐하의 명을 받고 나왔습니다.”
우렁찬 그 목소리는 황상의 복귀를 말하고 있었다.
* * *
향화문의 안가.
그 일이 일어난 후부터 계속 황제가 머물렀던 곳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황제는 용포를 입고 있었다.
그가 궁으로 돌아가기 위한 모든 준비를 마쳤다는 생각에,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은 감격을 금치 못했다.
황제의 감격도 그들에 못지않았다.
황제가 감격에 겨워 한동안 말을 시작하지 못했다는 것은, 그를 알고 있던 모든 사람에게 놀라움을 안겨주었다.
“짐은……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큰 빚을 졌다.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으나 한편으로 희망을 갖고 짐의 나라에 기대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그대들 덕분이었다. 황후에게도, 태자에게도 배신당했다는 생각은 오히려 오래 들 틈도 없었다. 그대들과 같은 충직한 신하를 갖고 있으면서 다른 일로 불평을 할 수가 없었다.”
그곳에 자리하고 있던 이들은 서서히 번지는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황상이 자신의 마음을 그렇게 솔직하게 드러내는 적이 거의 없었기에 그들이 느낀 감동은 더욱 컸다.
그들 중에는 황상이 그곳에 올 때부터 함께 있었던 하월과 선이남도 있었고 거의 마지막에 합류한 내각대학사도 있었다.
황제는 길게 더 말을 이어 가는 대신 그들 한 사람 한 사람과 눈을 맞추었다.
그들에게는 그럴 자격이 있었다.
모두의 눈에 벅찬 감격이 퍼졌다.
“그대들도 함께 짐의 나라를 기대해 주기를 바란다. 그대들이 새로운 나라의 주역이 될 것이다.”
그것은 그냥 흔히 하는 다짐이나 약속이 아니었다.
새로운 나라의 주역.
썩은 뿌리를 도려내고 나면 그곳에 다른 것을 심지 않으면 안 되었고 황제는 그들에게 그 자리를 제안하고 있는 거였다.
그러나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그 약속보다 황제가 자기들을 믿어 주고 그 미래에 초대해 주었다는 사실에 더 감동하는 듯했다.
“황궁으로 돌아갈 것이다. 수행하거라.”
“만세, 만세, 만만세. 황제 폐하 만만세!”
자리한 이들이 엎드려 외치자 황제의 얼굴에 온전한 웃음이 지어졌다.
* * *
천공의 주인이 바뀌는 시각.
아진은 황제가 그 시각을 택해 황궁으로 돌아가기로 한 것에 그런 안배도 있었을지 궁금했다.
하월도 그 생각을 했는지 혼잣말처럼 말했다.
“이제 곧 태양이 뜨겠습니다.”
여명이 밝아오는 곳을 바라보며 하월이 말하자 다른 이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따지고 보면 이 일은 벽력탄에서 시작된 듯합니다. 벽력탄을 손에 넣고 힘을 가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태자 전하가 그런 일을 벌이지는 않았을 테니 말입니다.”
“않았을 거라는 말은 틀리고, 못했을 거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진이 정정해 주자 하월도 이내 수긍했다.
“그렇군요. 탐욕으로 치자면 준비는 언제든지 되어 있었으니까요.”
아진이 하월을 힐끔 바라보았다.
말코와도 그랬지만 하월과의 만남을 생각하면 이 사람이야말로 정말 파란만장하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