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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320화 (320/470)

제320화

320화

“폭천의. 짐을 실망시키지 말아라. 짐은 너를 믿고 있다. 그리고 기대하고 있다. 네가 짐을 위해 이 일들을 해 주면 짐은 너를 버리지 않을 것이다.”

폭천의는 그중 몇 마디를 알아들었지만 감동적이기는커녕 역겹기만 했다.

“그 재료가 어디에 있는지 너는 알고 있느냐.”

“예.”

폭천의는 그 말을 똑똑히 알아들은 듯했다.

그것은 입술을 읽어서 안 것도 아니었지만 귓가에 생생히 들려온 것처럼 느껴졌다.

그럴 수가 없는데도 그렇게 느껴졌다.

“어디냐.”

“천마신교가 있는. 십만대산입니다.”

폭천의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의외였다.

그것이 사실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는데 정작 태자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게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냐는 말을 들었을 때 폭천의는 그동안 전혀 머릿속에 떠오른 적 없던 생각 하나를 떠올렸다.

모든 열패감의 근원이 되었던 그곳.

만일 자신이 이곳을 빠져나가지 못하는 신세가 된다면 그들도 전부 끝을 맞이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을 저승 동무로 데려갈 수 있다면 죽음이 외롭지 않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폭천의는 순간적으로 너무 기뻐서 웃음이 나올 것 같았는데 그런 모습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썼다.

태자가 그걸 안다면 폭천의가 자신을 이용해 뭔가 사익을 도모하려는 것을 깨닫고 그의 말을 들어 주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태자는 그런 대우를 받는 것에는 아주 이골이 나 있었고 폭천의 따위에게까지 그런 취급을 당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폭천의가 한때 신교에 가담했다가 그 후에 혈교도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그 말이 그럴듯하게 들렸다.

처음에 벽력탄을 만들면서 주변에서 재료를 찾았을 것이고 십만대산에 그런 게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어디인지 정확한 위치를 아느냐.”

신기했다.

그 전까지는 눈에 불을 켜고 입술을 봐도 뭐라고 하는 건지 잘 알 수가 없더니 이제는 그가 하는 말이 귀에 바로 들리는 것처럼 이해가 됐다.

“예. 폐하.”

폭천의는 신교의 중심 세력이 모여서 살던 곳을 떠올렸다.

어렸던 그는 언젠가 자신이 신교의 중심이 되어 그곳에서 살기를 소망했다.

그런 일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그들에게 깊은 상처를 주고 싶었다.

그는 명문 마가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을 알려주었다.

마침 그 인근에 광산도 있었기에 태자를 속이기에는 아주 좋을 것 같았다.

“그곳이라는 말이냐. 그곳에 가서 네가 말한 것을 가져오면 벽력탄을 만들 수 있느냐.”

“예. 폐하.”

그러면서 폭천의는 거의 틀을 갖춘 벽력탄을 보여 주었다.

“그것만 있으면 폐하의 앞에서 이것들의 위력을 보여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 그렇구나. 좋다. 그러면 그리 하도록 하지. 먼저 네놈의 귀부터 어떻게든 해 놔야 하겠구나. 네놈의 면상을 마주하고 있는 것도 고역이다.”

폭천의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참았다.

“신교는 어찌하기를 바라느냐.”

태자의 말이 이어졌다.

폭천의가 자기를 위해 그렇게까지 해 주었는데 그 정도 부탁은 들어줘도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전부 없애 주십시오. 폐하.”

“천마신교의 교도들이 수만 명에 달한다고 들었다.”

“예. 폐하. 그 수만 명을 모두 없애 주십시오.”

그러자 태자가 폭소를 터뜨렸다.

“너란 놈도 어지간히 꼬였구나.”

그러나 그는 그 말이 마음에 들었다.

“그러겠다. 폭천의. 앞으로도 너는 네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는 걸 보게 될 것이다. 짐에게 충성을 다 바치기만 하면 말이다.”

태자는 폭천의를 놔두고 밖으로 나갔다.

폭천의는 뒤에서 소리 없이 문이 닫히는 것을 느꼈다.

“으흐흐흐…….”

웃음이 나왔다.

그 웅장하던 전각들이 쓰러지는 모습을 상상하자 말할 수 없이 기쁘고 황홀했다.

태자가 그렇게 말을 했으면 황군은 원 없이 보낼 거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여기에 온 걸 불평만 할 게 아닌지도 모르겠다.’

폭천의는 어느새 그런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자기가 가진 힘만으로는 꿈꿀 수 없던 일을 태자의 힘을 이용해 이룰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웃음은 그리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느닷없이 그의 앞으로 그림자 하나가 나타났던 것이다.

그러나 폭천의가 놀란 것은 그림자 때문이 아니었다.

단 한 번 봤을 뿐이지만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얼굴.

그 얼굴이 악귀처럼 그의 앞에 드리워져 있었다.

“폭천의.”

아진의 음성이 공간에 퍼졌다.

그러던 아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꼴이 왜 이래?”

그러더니 아진은 폭천의의 몸에 손을 댔다.

진맥을 하는 모양이었다.

“태자가 이런 건가? 내 말이 들리지도 않겠군. 다리에 두 귀에 한쪽 눈까지. 나는 대단한 걸 받고 벽력탄을 넘기고 있는 줄 알았더니 뭐야. 왜 네가 줬어? 뺏겼어? 태자도 정상은 아니네.”

아진은 못 볼 꼴을 봤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폭천의는 자신이 언제부터 떨고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

함께 있었던 기억은 길지도 않았는데 폭천의는 아진의 잔혹성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와…… 그런데 좀 대단하기도 하네. 존경스럽기도 하고. 여기에 올 때까지만 해도 나는 너를 어떻게 해야 할지 솔직히 마음을 정하지 못했거든. 네가 여기에 있을 것 같아서 우선 한 번 보러 오기는 했어도. 일단은 납치 정도나 할까 했는데 이렇게 나를 도와주네? 네가 하는 말을 듣고 나니까 내가 갈등했다는 게 부끄러워진다. 폭천의.”

폭천의는 미친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오히려 아진이 이상하다는 듯이 폭천의를 바라보았다.

“뭐야. 내가 하는 말을 알아들었다고? 귀는 들리지 않을 텐데? 눈으로 보고 그랬다고? 적응력 하나는 빠르네.”

아진이 웃었다.

폭천의는 그렇게 끔찍하고 무서운 웃음을 본 적이 없었다.

“신교도를 죽여? 내 동생이 누구인 줄 알고 그런 소리를 지껄인 거지? 네가 죽고 싶어서 환장한 거군.”

어느새 폭천의의 눈에서는 실핏줄이 터졌고 그는 미친 듯이 고개를 저으며 아진을 붙잡으려 했다.

“사, 살려…… 살려 주십시오. 한 번만…… 한 번만 살려주십시오. 저를 데려가세요. 그러면 소협은 천하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제가 벽력탄을 만들 수 있다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폭천의가 소리쳤다.

처음에는 그냥 한 소리였는데 말을 하고 보니 그럴듯했다.

벽력탄을 만들 수 있는 자신을 옆에 둔다는 것은 서도진에게도 혹할만한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폭천의는 아진에게 매달렸다.

그러나 폭천의의 손은 아진에게 간단히 붙잡혔다.

“태자는 이걸 부술 수 없었던 모양이야.”

아진의 말과 함께 폭천의가 끔찍한 비명을 터뜨렸다.

폭천의의 손가락이 부러지고 부서졌다.

피가 흐르면서 뼈가 가루가 되었다.

폭천의는 제정신으로 그 고통을 다 참을 수가 없었고 저도 모르는 사이에 의식을 잃었다.

그렇게 영영 다시 눈을 뜨게 될 일은 없을 터였다.

하고 많은 곳 중에 신교를 지목한 탓에 그렇게 된 거였다.

폭천의의 손을 부순 아진이 이번에는 폭천의의 목을 쥐었을 때, 문이 벌컥 열리고 사람들이 들어왔다.

폭천의를 잘 감시하라는 특별한 명령을 받고 있었는데 혼자 있던 곳에서 갑자기 비명이 들려 놀라서 와 본 것인데 그들의 눈앞에서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포, 포…… 폭천의를 어쩔 셈이냐!!”

누군가 소리치자 아진이 웃었다.

그리고 폭천의의 목을 쥔 손에 그대로 힘을 주었다.

그곳에 있던 누구도 사람의 목이 부러지면서 내는 소리를 그렇게 생생하게 듣지는 못했을 것이다.

폭천의는 소리도 내지 못하고 죽었고 아진은 시신이 되어 버린 폭천의의 몸을 그대로 놔 버렸다.

태자에게 받은 수난부터 시작해서 봐 주기 어렵던 모습을 하고 있던 폭천의가 죽었다.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두려움을 느꼈다.

무서운 것도 무서운 거였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폭천의는 그렇게 죽어서는 안 되는 존재였던 것이다.

태자가 폭천의에게 얼마나 많은 기대를 걸고 있었는지, 그곳에 서 있던 사람 중에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한순간에 끝나버린 것이다.

“아아. 뭔지 알겠네. 태자가 알면 가만 놔두지 않을 것 같아서 그런가 보네.”

아진의 말에 그자들은 자기들의 처지를 더욱 확실히 깨달은 듯했다.

누군가 비척거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이 자리에서 자기들이 아진과 싸워 기적같이 아진을 죽인다고 해도 죽은 폭천의를 살릴 방법은 그들에게 없었다.

폭천의를 살릴 수 없다면 조금이라도 기회가 있을 때 도망치는 게 낫다고 생각하며 그들은 미친 듯이 도망쳤다.

아진은 그들의 뒷모습을 조금 더 보다가 폭천의의 주위에 있던 것들을 보았다.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곧 완성될 단계의 벽력탄과 화탄.

아진은 잠시 그것을 내려다보다가 손으로 불길을 만들어 폭천의의 몸을 태웠다.

그러나 그가 의도한 것은 폭천의의 몸을 태우는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쿠콰콰콰쾅-!

천지가 요동하는 것 같은 굉음을 내고 공간과 전각이 동시에 터져나갔다.

아진은 폭발이 시작되기 전에 전각을 빠져나왔지만 폭발의 여파는 생각보다 컸다.

그는 단순히 삼사 장 정도만 떨어져서 봐도 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완성된 제품이 아니라고 해도 위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특히나 연석영이 사람들을 시켜 구해다 놓은 폭발 물질이 연쇄적으로 터지는 바람에 지옥이 열리는 듯했다.

일이 그렇게 되었는데 태자가 끝까지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러나 아진은 더 이상 그곳에서 지켜보는 대신 그대로 몸을 날렸다.

아직은 태자와 부딪힐 때가 아니었다.

그것이 황제의 뜻이었다.

전각 하나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허망하게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어쩐지 그것이 태자의 미래를 보여 주는 것 같아서 아진의 입가에 웃음이 지어졌다.

‘신교를 건드려? 멍청한 놈. 그런 말만 안 했어도 하루 정도는 헛된 꿈을 더 꿀 수 있었을 텐데.’

아진은 그곳을 조금 더 바라보다가 완전히 돌아섰다.

주홍빛 불길이 일렁이며 그의 등에 환한 그림자를 연신 만들어대고 있었다.

* * *

내각대학사가 붙잡혔다.

연석영의 명령에 의해서였다.

그 일은 대낮에, 그리고 황군에 의해 이루어졌다.

살수를 동원해서 은밀히 한 일도 아니었다.

사람들에게 끌려온 내각대학사의 바지가 벗겨지고 그의 몸이 강제로 엎드려졌다.

“지금이라도 태자 전하께서 선황제 폐하의 적장자로서 황위를 계승할 자격을 가지셨다고 말하라.”

연석영이 소리쳤지만 내각대학사는 굴하지 않았다.

사람들의 눈앞에서 그런 수치를 당했지만 지금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침묵하고 있는 자들이라고 생각했기에 그는 당당했다.

“그렇게 떳떳하다면 나에게 그 말을 요구할 필요가 없을 것이오.”

내각대학사의 말에 연석영의 이마에 핏줄이 돋아났다.

차라리 그냥 납치해서 조용히 묻어 버리는 것이 나았을까.

황후는 내각대학사가 속을 알 수 없는 자라며 그렇게 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고 했었다.

그러나 연석영이 반대했다.

그동안 황제가 저에게 주었던 수치를 생각하면 그렇게 편안히 죽게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사라져서 나타나지 않으면 사람들 가운데는 오히려 그를 추앙하는 사람들이 생겨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고고한 학자였으니 내각대학사라면 그런 수치를 당하는 것을 참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면서 벌인 짓인데 어쩐 일인지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사람들이 고개를 돌렸고 내각대학사는 끝내 당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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