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9화
319화
황자들이 사는 저택마다 비밀리에 정의맹의 고수들이 머물면서 지키고 있었는데 황자들은 조만간 태자와 황후의 강요로 결정을 내려야 할 터였다.
어딘가에 부황이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믿음을 안은 채, 혹은 태자에게 이 나라를 맡길 수는 없다는 생각에 태자를 거스를 수 있는 황자가 얼마나 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어쩔 수 없을 거라고, 두려울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황제의 마음은 그것 때문에 초조해졌다.
“내가 평범한 사람으로 태어났다면 내 우유부단함은 그저 한 집안을 힘들게 하는 것으로 끝이 났겠지.”
황제의 자조적인 말에 아진은 아무런 위로의 말을 해 주지 못했다.
그날 이후 황제는 생각할 것이 많은 듯 보였고 아진도 덩달아 많은 것을 생각했다.
그리고 희한하게도, 태자가 황제에게 한 짓을 보면서 원래 살던 세계에 두고 온 가족이 자주 떠올랐다.
그들 정도면 나쁘지 않았던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기운 빠진 황제는 기분 전환을 위해서였는지, 흑주가 데려온 전서응의 간호를 도맡았다.
흑주는 어차피 따로 할 일도 없고 자기 때문에 기억을 잃은 것 같은 전서응이 기억을 되찾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그 옆에 자주 머물렀다.
황제는 전서응에게 먹이를 주면서 신기하다는 마음을 금치 못했다.
되는 사람은 뭘 해도 된다더니 아진이 그랬다.
전서응을 본 사람들은 모두 그 전서응이 전설의 영물이 맞는 것 같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지금 당장은 초점 잃은 눈을 하고 있어서 이 녀석이 뭘 할 수 있다는 건지 상상이 되지 않았지만 본모습을 되찾으면 어떻게 될지 기대가 됐다.
기억을 찾은 전서응이 주인을 찾아가면 어쩌나 하고 걱정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것은 그때 문제고 어쨌거나 전설의 영물을 길을 가다 주운 것처럼 데려오는 걸 보니 기가 막혔던 것이다.
“흑주야. 아진이는 산본으로 돌아가라고 하고 너는 짐이랑 황궁에서 살지 않으련?”
전서응의 주위를 뒹굴뒹굴 구르며 놀고 있던 흑주는 별말을 다 들었다는 듯이 황제에게서 거리를 벌렸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붕 떠서 날아가 버렸고 전서응마저 황제를 놔두고 날아가려 하는 바람에 황제는 황급히 흑주에게 사과해야 했다.
“거참. 야박하긴. 농담이다. 농담. 농담도 모르는 것이냐! 하여간 제 주인을 빼다 박아서는.”
그래도 그런 의미 없는 말이라도 하는 것이 지금의 그의 정신상태에 상당히 도움이 된다는 것을 황제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웃음조차 지을 일이 없게 된다면 그 틈을 타고 분노가 켜켜이 쌓였을 것이고 그럴 때 군주의 분노는 때로 자연재해보다 더 처참한 결과를 불러일으키곤 했다.
“흑주야. 그걸 아느냐. 네가 살린 사람이 수백 명은 될 거라는 것을.”
황제는 흑주를 보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
* * *
태자는 그동안에도 성격이 유순했던 적이 없었지만 지금은 그 어느 때와도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포악한 상태였다.
황상이 승하하셨다.
북궁 하월이 황상의 시신을 훔쳐 달아났다.
서도진이 황상을 다시 살렸다.
그런 이야기들은 아무리 누르고 밟아 놓아도 어느 틈엔가 다시 번졌다.
사람들은 태자를 두려워했지만 뭔가를 기대하는 것 같기도 했다.
황상의 승하 후에 해 나가야 할 절차가 남아 있지만 황후와 그 가문이 건재했기에 어려움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곳곳에 존재하는 암초를 너무 과소평가한 거였다.
살아생전 황제가 그렇게나 애지중지하며 힘을 키워 놓았던 내각대학사가 드디어 문제를 일으켰다.
그는 황상이 붕어하기 전 특별히 건강에 이상이 없었다는 이유를 들며 황위의 계승에 앞서 황상의 사인을 먼저 규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내각대학사는 내각대학사였다.
아무리 그를 총애하던 황제가 죽었다고 해도 그동안 그가 받아 왔던 존경이 있어서 그랬는지 사람들은 그가 하는 말에 대놓고 반발을 하지 못했다.
그를 설득하지 못하면 내각대학사를 존경하고 따르는 수많은 사람이 어떻게 나올지 알 수가 없었다.
힘으로 찍어누르는 것은 가능하겠지만 그러면 민심은 영 수습 곤란한 처지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태자는 민심 따위야 어떻든 내각대학사를 치워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 같던 외조부 연석영이 조금씩 태도를 바꿨다.
태자에게는 뭘 잘 모른다는 듯이 말을 하며 실권을 장악하려는 움직임까지 보였던 것이다.
태자는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오히려 태자가 인생의 황금기에 서 있었고 연석영은 노쇠했는데도 권력에 욕심을 부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머니라고 해서 별반 다르지 않았다.
태자는 이러다가 남 좋은 일만 시키겠다고 생각하며 마음이 점점 조급해졌다.
뭔가 확실하게 자신의 힘을 각인시킬 필요가 있었는데 그동안 그에게는 그럴 기회가 거의 주어지지 않았다.
괜히 존재감을 부각시켰다가 부황에게 황위를 노리는 것이냐는 말을 들을까 하며 조용히 자숙하며 살아 왔던 것이 이럴 때는 악재가 되었다.
그는 급히 저택으로 돌아갔다.
생각 같아서는 주인을 잃은 부황의 처소를 자기가 차지하고 싶었지만 어머니까지도 그것은 시기상조라며 말렸다.
시기상조라고 하는 것이 정말 자기를 위한 말인지, 아니면 은근슬쩍 그를 배척한 채 외가 쪽에 유리한 권력 구도를 만들려고 그러는 것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이제는 누구도 믿을 수가 없다고 생각하며 태자는 지금 상황에서 자기가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찾아갔다.
폭천의가 그 사실을 안다면 전혀 좋아하지도, 감동하지도 않겠지만 어쨌건 태자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폭천의는 어찌하고 있느냐.”
그는 처소에 들어서자마자 곁에 시립해 있던 자에게 가장 먼저 그것부터 물었다.
“벽력탄의 연구에 집중하고 있는 듯합니다.”
“먹을 것은 제대로 먹이고 있느냐.”
“예. 폐하.”
폐하.
더 이상 전하가 아니었다.
폐하라는 말의 울림이 심장을 간질이는 것 같았다.
태자는 그 말을 조금 음미해 보다가 눈앞의 무인을 바라보았다.
“상처는 치료했느냐. 좋은 의원을 붙여주어라. 폭천의는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자다.”
“예. 그렇게 하기는 했습니다만…….”
그는 말을 가렸다.
태자가 워낙 폭천의의 몸을 함부로 다뤄서 치료해 봐야 한계가 있었다고 말을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폭천의를 먼저 봐야겠다. 그자를 불러오너라. 아니다. 놔두어라. 폭천의를 번거롭게 할 필요가 없지. 내가. 짐이 가도록 하겠다.”
태자가 말을 하고 서둘렀다.
폭천의는 벽력탄을 만들기 위해 모든 방법을 궁리하고 있었다.
재료가 그렇게 빨리 모일 거라고는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그 일이 간단히 해결돼 버렸다.
황후의 가문은 생각보다 유능했고 모든 불가능한 것들을 아주 간단하게 가능한 일로 만들어 버리는 듯했다.
그동안 자기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애쓰고 아등바등 살았던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동굴에서 화탄의 재료를 구하자고 쥐새끼들을 잡으려고 설치던 것이 떠올랐다.
‘따지고 보면 다 그것 때문이잖아.’
그것들이 아니었다면 벽력탄을 터뜨릴 필요도 없었고, 벽력탄이 터지지 않았으면 서도진 일행이 그곳에 나타나는 일도 없었을 것이며 태자의 심복들도 그렇게 빨리 폭천의를 찾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모든 게 그 죽일 놈의 쥐새끼들 때문이라니…….’
자신의 인생을 꼬이게 만든 게 아주 대단한 영웅이거나 강호에 한 획을 긋는 자 때문이었다면 이렇게까지 제 처지가 처참하게 느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단 폭천의는 화탄 몇 개와 벽력탄을 거의 완성품의 단계까지 만들었지만 아직 마감은 하지 않고 있었다.
연석영은 계속 사람을 보내서 폭천의를 주시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면서 폭천의는 자기에게 방법이 생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태자와 직접 싸우는 것은 불가능할지 모르지만 만약 연석영이 탐욕을 부리고 태자를 견제하려 한다면 그 사이에서 틈을 찾을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누구의 손을 잡는 것이 좋을지, 그리고 연석영의 손을 잡는다면 어떻게 될지 마음을 정하기 전에 최대한 시간을 끄는 것이 좋을 듯했다.
그러면서도 아주 늑장을 부리지 못한 것은 태자의 폭력성 때문이었다.
폭천의가 상념에 사로잡히고도 손은 계속 움직이며 일을 하고 있을 때 밖에서 사람들이 들어왔다.
그러나 폭천의에게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태자가 안으로 들어갔을 때도 폭천의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문이 열리면서 찬 바람이 들어왔기에 누군가 들어왔나보다고 깨달을 수는 있었지만 누구인지는 알지 못했고 자기가 하던 일을 멈추고 돌아봐야 할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렇지. 이 자는 듣지 못하는군.”
태자는 폭천의를 그렇게 만든 사람이 자기 자신이면서도 그런 소리를 하고 있었다.
“모두 나가서 일을 보도록 해. 나는 여기서 좀 더 머물겠다.”
태자가 말하자 그를 수행했던 이들이 일제히 포권을 취하고 사라졌다.
폭천의는 자신의 앞으로 드리워지는 그림자를 보고 고개를 들었다.
태자였다.
폭천의는 고개를 숙여 그에게 예를 갖추었다.
“어찌 지내고 있었느냐. 지낼 만은 하더냐.”
태자는 폭천의가 만들어 놓은 것들을 보며 물었다.
그가 보기에도 완성품은 아니었다.
그러나 근접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구나.”
그러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짐이 하는 말을 듣지 못하였느냐.”
그러나 이번에도 폭천의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태자는 자기가 폭천의의 고막을 찢게 한 것을 뒤늦게 떠올렸다.
“귀찮군. 말을 알아듣지 못하면 어떻게 하라는 것이냐.”
폭천의가 그 말을 들었다면, 그러게 고막을 그렇게 만들면 어떻게 하라는 것이냐고 따질 수라도 있었겠지만 폭천의는 그 말도 듣지 못했다.
“더 서두르도록 해라. 완성품은.”
태자는 말을 하다가 폭천의의 턱을 사납게 움켜쥐고 제 입을 보게 했다.
그리고 제 입 모양을 보면서 알아듣게 하려고 천천히 발음했다.
“완성품은 언제쯤 나올 것 같으냐.”
폭천의는 그가 하는 말을 정확히 알아들을 수는 없었어도 아마 그것을 묻고 싶지 않을까 하면서 중얼거렸다.
“가장 중요한 재료가…… 없습니다. 전하.”
“폐하라고 부르거라. 짐은 황제니라.”
“예. 폐하.”
폭천의는 온갖 욕설을 다 퍼붓고 싶었지만 그것은 그냥 속으로만 하기로 했다.
“무엇이 없느냐. 그것은 어디에서 구해야 하는 것이냐. 그게 뭔지 말을 하면 다 구해올 것인데 왜 아직도 없는 게 있다는 것이냐.”
폭천의는 미리 생각해 두었던 것을 말했다.
“폭약심을 만드는 재료가 다릅니다. 제가 말한 것과 다른 것을 가져왔습니다. 그걸로 만들면 제대로 터지지 않는 것도 많을 것이고 불이 붙기까지 시간이 걸립니다.”
태자가 뭐라 호통을 쳤는데 폭천의가 아무리 집중을 하고 그의 얼굴을 봤어도 뭐라고 하는 건지 다 알아듣지는 못했다.
그래도 지금쯤 이런 말을 하고 싶겠거니 하며 대충 찍어서 대답하곤 했다.
결론은 중요한 재료가 없어서 완성품을 만들고 있지는 못한다는 거였다.
태자는 폭천의를 노려보았다.
생각 같아서는 몸이라도 걷어차 버리고 싶은데 자기가 해 놓은 짓이 있어 폭천의의 꼴이 말이 아니었다.
지금부터는 폭천의를 아주 조심해서 다뤄야 했다.
폭천의는 다른 사람에 비해 태자를 우월하게 해 주는 유일한 존재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