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7화
317화
조금만 생각해 보면 그 앞에 자신들의 죽음이 정해져 있다는 것이 뻔한데 불길로 뛰어들 수가 없었던 것이다.
서도진에 대한 소문은 익히 퍼져 있었다.
좋은 소문은 별로 없었다.
심지어 미담의 주인공으로 등장할 때조차도 그는 약간 인성이 삐끗한 것 같은 모습을 보였다.
경쟁자가 없을 정도로 강하고 한계가 없는 무위와 내공을 선보이는 서도진이 유독 가족 앞에서는 태양 아래의 눈사람처럼 살살 녹는다는 것 역시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게다가 동창 제독은 그들에게 콕 집어서 랑랑을 사로잡아 데리고 있으라고 말했다.
산본의가 대공자인 서도종의 딸이자 서도진이 눈에 넣어도 아파하지 않는다는 질녀 랑랑을.
그것은 사자 앞에서 사자 새끼들을 전부 죽이고 사자 입으로 들어가라는 것과 다른 바가 없었다.
아무리 절대적인 충성이 강조되는 조직이라고 하더라도 백치들만 모아다가 동창을 구성한 것이 아니라면 그 말을 순순히 듣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산본으로 가까워질수록 이탈은 점점 더 가속화되었다.
수뇌부는 이탈 시에 엄중히 문책하겠다고 말했지만 차라리 엄중 문책을 받고 말지 서도진의 원수가 되고 싶지는 않다는 게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그 결과 그들은 산본에 도착하지 못했다.
수뇌부 소수를 제외하고 전원이 사라져 버렸는데 뭘 하겠는가.
그리고 그 수뇌부조차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 이건 미친 짓이다.’
차라리 항명을 하고 거기에 따른 책임을 진다고 하더라도 서도진을 상대한다고 생각할 때 느끼는 두려움보다는 그게 훨씬 더 가볍게 느껴졌다.
향화문은 다른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소식을 전하고 있었고 황후가 동창을 산본에 보냈다는 소문 역시 일찌감치 전해져서 산본의가를 지키는 수많은 사람이 마을을 에워싸고 있었다.
단일 문파로는 그 수와 세가 가장 많고 강하다는 명성을 오랫동안 굳건히 지켜왔던 천마신교조차 산본의가에게는 한 수 접어 줘야 하지 않을까 할 정도로 장엄한 광경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사람들에 의해 거론되었던 독고세가는 그 자리를 굳건히 지켰다.
세가의 무인들은 그 어느 때보다 결연한 의지를 다진 채 자기들이 맡은 구역에 서 있었다.
북리세가의 무복을 입은 이들도 한 곳을 맡아 방어하고 있었고 산본무관의 무인들이 마을 입구를 지켰다.
동창은 그곳까지 오지도 않았지만 그 모습을 봤다면 오히려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걸 느꼈을 것이다.
포기하는 것이 훨씬 더 쉬워졌을 테니.
다른 것도 다른 거였지만 투지라는 면에서 동창은 절대 그들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 * *
북궁세가주는 외로운 싸움을 준비했다.
가문의 오랜 역사가 이제 곧 종말을 맞이하게 될지도 몰랐다.
자신은 그곳을 떠날 수 없었고 가문이 사람들의 머릿속에 명예롭게 기억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다른 이들에게까지 개죽음을 당하라고 할 수는 없었다.
지금의 북궁세가는 가주에게 상처투성이가 된 자식 같았다.
영화로운 시절을 잃은 후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받고 혼자 아픔을 안은 자식처럼 느껴져서 그마저 외면하고 떠날 수가 없었다.
그것뿐이었다. 그가 세가에 남기로 한 이유는.
그런데 미련한 사람들이 함께 버텼다.
게다가 미련한 이들의 수가 생각보다 훨씬 더 많았다.
북궁세가가 그동안 다른 곳처럼 지조라도 지켰다면 그것 때문에 그럴 수도 있겠다지만 북궁세가는 세상의 시류에 따라 이리저리 쉽게 마음을 바꾸면서 유지해 온 곳이었다.
그런데도 뭘 보고 남겠다고 하는 건지 가주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역사의 거대한 폭풍 속에 혼자 내쳐진 개인으로, 그는 말할 수 없는 무력감을 느꼈다.
그러나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던 그 순간에 가문을 같이 지키기로 마음먹고 그의 곁에서 버티고 선 사람들을 보며 말할 수 없는 기분을 느꼈다.
눈시울이 붉어졌다.
눈물이 나오려는 것만큼은 가까스로 참았다.
그런데 가슴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
살아오는 동안 숱한 감정을 느꼈고 환희에 찬 순간도 있었다.
그러나 그 어떤 감정도 지금의 것보다 나은 것 같지는 않았다.
‘내가 잘못 산 것은 아닌가 보구나.’
그는 먼저 간 두 아들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죽고 나면 이름도 부를 수 없을 테니.
그때 바깥의 사정을 살피던 외당 무사가 말을 타고 급히 달려왔다.
“황군이 밀려옵니다. 가주님!”
그 말에, 남아 있던 세가의 무인들은 숨을 골랐다.
이제 시작이었다.
외당 무사가 소식을 전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수백 명의 황군이 말을 타고 밀려들었다.
선두에는 황궁 고수라 불리는 이들이 느긋한 표정을 하고 가주를 바라보았다.
“가주. 이렇게 보게 돼서 나도 안타깝소. 그런데 폐하의 지엄하신 명이 있어서 나도 어찌할 수가 없소.”
“폐하의 명이라니. 누구를 말하는 것이오!”
가주는 검파에 손을 얹은 채 물었다.
“누구긴 누구겠소. 하늘 아래에 폐하가 몇 분이나 되신다고 생각하는 것이오. 폐하께서 북궁 하월의 목을 가져오라 하셨소. 훔쳐간 선황제 폐하의 시신도 가져오라 하셨고 말이오.”
그제야 가주는 그들이 말하는 폐하가 태자를 말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
가주는 더 이상 말을 나눌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며 검을 뽑아 들었다.
“내가 모신 황제 폐하는 한 분이오. 그분과 운명을 같이 하겠소.”
“자식들이 멍청한 것이 모두 아비를 닮아서 그런 모양이군.”
한 사람이 말하자 주위의 모든 이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앞으로 듣게 될 조롱에 비하자면 어쩌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닐 터였다.
가주는 이제 단 한 가지만을 소망했다.
북궁세가의 마지막에 대한 얘기가 후세에 어떻게 전해질지.
그것이 이제 오직 그들에게 달려 있었던 것이다.
“북궁인들이여.”
가주의 목소리가 조용하게 울렸다.
“함께해 주어 고맙다.”
승리를 위해 싸우자거나 목숨을 걸라는 말 같은 것은 나오지 않았다.
다른 목표를 위해 전진하자고 독려하는 것보다 오히려 지금의 그들에게 고맙다고 말해 주고 싶었다.
“나는 자랑스럽다. 내 어리석음으로 세가를 잘못 이끌어온 순간이 많았지만 지금은 다시 처음의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 같구나. 나는 가장 영화로웠던 그 순간의 북궁인으로 죽을 것이다.”
“가주. 재미있는 얘기를 해 주겠소. 우리는 여기에 있는 숫자가 전부가 아니오. 우리 뒤에 삼백여 인마가 따라오고 있소. 폐하께서는 이곳에서 승리를 거둬오라고 하신 게 아니라 잔인한 도륙을 명하셨소. 사람들이 북궁세가에서 벌어진 일을 알 수 있도록 말이오. 그래서 폐하가 어떤 분인지 알 수 있도록 하라 하셨소.”
그의 입에서 광소가 터져 나왔다.
함께 있던 자들도 그 말을 듣고 큰 소리로 웃었다.
그 광포한 말을 하고도 아직 충분치 않은 듯 말이 이어졌다.
“북궁인들의 몸은 젓을 담는 생선처럼 발리고 저며진 채 바닥에 차곡차곡 채워질 것이고 이곳은 개방될 거요. 사람들은 북궁인들의 시신에 침을 뱉고 발로 밟으며 조롱하고 모욕할 것이오.”
“닥쳐라. 이노오옴!”
노호성과 함께 가주의 곁에 있던 무사가 달려나가 검을 휘둘렀다.
그 앞의 자들은 말에서 내려오지도 않은 채 클클거리며 무사의 가슴팍을 발로 찼다.
“너야말로 북궁세가를 욕보이는구나. 북궁세가가 어찌 이 꼴이 되었다는 말인가. 가주. 부끄럽겠소. 그렇지 않소?”
그러면서 선두에 선 자가 검을 휘둘러 검풍을 일으켰다.
그러나 가주가 만들어낸 검막이 그것을 상쇄했다.
“뒤로 물러서라.”
가주가 말하고 그때부터 적들을 향해 달려나갔다.
싸움은 생각보다 일찍 끝나게 될지도 몰랐다.
그래도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지는 말자고 생각하며 검을 든 그의 귀에 거대한 폭음이 들려와왔다.
정문이 부서져 나가는 듯 귀청을 찢을 것처럼 큰 소리가 나더니 잠시 바닥이 요동쳤다.
후발대가 따라붙은 듯했다.
가주는 패배에 대한 두려움이 밀려들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그가 다시 달려나갈 때 근처에 있던 전각이 터져나갔다.
날카로운 나무 조각이 사방으로 날리며 그것이 마치 암기처럼 사람들을 노리고 들어갔다.
그런 공격으로는 적군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피해를 줄 수밖에 없었지만 전각을 부순 자는 그런 것이야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듯이 하얀 이를 드러내고 광소를 흘렸다.
“재미있어 보이는군. 그래. 이 자들을 일일이 베는 것은 오히려 재미가 없겠어.”
그러면서 누군가 바닥에 검을 휘두르자 바닥에 깔린 돌이 부서져 나가다가 허공으로 치솟았다.
그 창보다도 더 날카로운 끝이 사람들을 노리며 날아왔고 가주는 겁에 질려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사람들을 대신해 검을 휘둘렀다.
수련을 게을리한 것은 몸이 가장 먼저 알았다.
지금의 가주에게는 그것이 가장 한탄스러웠다.
세가에 새로 들어온 어린 무인이 입을 벌린 채 두려움에 떠는 모습이 보였고 다른 사람들이라고 크게 다르지도 않았다.
힘의 균형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고 처음부터 싸움이 되지 않았다.
일각을 버티면 오래 버티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런 상황에서 무엇을 바랄 수 있을까.
어린 무인을 향해 돌무더기가 날아가는 것을 보며 누군가 비수를 던졌다.
캉 소리를 내고 돌이 방향을 틀었고 어린 무인은 간신히 목숨을 건졌지만 여전히 정신이 돌아오지는 않는 것 같았다.
퍼벅-.
불길한 소리와 함께 누군가 옆으로 쓰러졌다.
그의 뒤통수는 뭉텅이로 잘려나가 있었고 그 옆에 피가 묻은 돌조각이 나뒹굴었다.
가주는 이를 악물고 검을 휘둘렀다.
수십, 수백 번을 휘두르며 검막을 만들고 사람들을 구하려 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놈들은 날아가는 돌조각에 죽는 게 누가 되건 상관치 않은 채 곳곳에서 비슷한 공격을 계속 감행했다.
“죽여라. 전부 다 죽여라!”
그런 면에서 그들은 태자에 딱 어울리는 사람들 같기도 했다.
다시 한번 바닥이 울렁거리고 돌조각이 허공으로 치솟았다.
패배할 거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손도 쓰지 못한 채 당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가주는 차라리 이대로 죽음을 맞이하겠다고 생각하며 검을 휘둘렀다.
그렇게 하는 동안 그는 아직 적을 제대로 공격한 것도 아니었다.
그들의 장난을 전력으로 막느라 힘을 소진하고 있을 뿐.
가주를 바라보는 이들도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알았다.
조롱거리밖에 되지 않을 참혹한 죽음.
목숨을 노린 날카로운 돌조각이 이제 다시 떨어지면 또 수십 명이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한 채 쓰러져 죽을 것이다.
그런데 처참한 운명을 목도하듯 허공에 뜬 돌을 바라보던 사람들은 그것이 떨어질 때가 지나고도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
처음에는 그것을 몰랐다고 하더라도 나중에는 다른 이들도 그것을 알아차렸다.
왜 이렇게 된 건가 하면서 그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한 사람의 등장으로 전세가 완벽하게 역전될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은 그때까지 깨달을 일이 없었다.
“너희는 태자의 군사들이냐.”
소리가 들려온 것은 전각 지붕이었다.
사람들은 일제히 소리가 나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한 남자가 서 있었고 그의 어깨 옆에는 묵빛을 짙게 발하고 있는 구슬이 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