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6화
316화
“공자. 고생했소. 정말 애썼소.”
선이남은 그 말을 한 후에 황제가 깨어나기를 기다렸다.
너무 늦은 것은 아니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그들은 멈춰 버린 것 같은 시간을 버텼다.
이제부터는 황제가 스스로 해야 했다.
그러나 하월이 도울 수는 있었다.
“폐하. 구결을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명령을 내리시는 것입니다. 처음에 폐하의 명령에 복종했던 심장과 내장 기관이 이번에도 폐하의 명령에 따를 것입니다. 돌아오십시오. 폐하.”
하월이 말을 했지만 황제에게서는 아무런 변화도 감지되지 않았다.
그때 하월에게 암살당했다가 귀식대법으로 살아난 적이 있던 사람이 슬그머니 하월의 옆으로 다가왔다.
“저…… 제 생각에는 공자가 설명을 너무 추상적으로 해서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은데 내가 한번 해 보면 어떻겠는지요?”
하월은 기가 차고 자존심도 좀 상했지만 지금이 그런 것을 내세울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가 황상의 귀에 대고 말했다.
“폐하. 저는 방향을 찾지 못해서 가장 애를 먹었습니다. 방향을 먼저 찾으십시오. 그리고 그곳을 시작으로 해서 폐하께서 나오셔야 할 길을 보시면 됩니다. 집중해서 보시면 희미한 하얀 불빛이 보일 것입니다. 그것을 따라 나오시다 보면 조금씩 감각이 돌아올 것입니다. 그때에야 구결이 떠오를 것입니다. 구결은 제가 불러드리겠습니다. 폐하.”
그러면서 그는 황제가 지금 자신의 말을 듣고 따라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속도를 맞추어 구결을 외웠다.
모두가 숨을 죽인 채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한참이 지나도록 아무런 변화가 느껴지지 않자 실패한 건가 하는 불안한 마음이 그들을 괴롭혔다.
그때였다.
“아앗! 폐하께서 손가락을 움직이셨습니다!!”
암천대문의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크게 들리는 바람에 몇 사람이 동시에 귀를 막았다.
그야말로 귀청 떨어질 뻔했다는 말이 저절로 나올 정도였다.
그들은 황상의 손을 보았고 거기에서 미미한 움직임이 나타나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제부터는 선이남도 황상을 도울 수 있었다.
“폐하. 선 부정입니다. 이제부터는 소신에게 맡겨 주시면 됩니다. 폐하. 잘하셨습니다. 정말 잘 하셨습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선이남의 목소리가 감격으로 젖어 들었다.
선이남은 남이천에게 눈짓을 했고 남이천은 황제의 손과 다리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주위에 사람들이 많았기에 각자 팔다리를 하나씩 잡고 피가 다시 통하도록 열심히 주물러 댔다.
“혈색이 돌아오고 있다.”
선이남이 감격한 얼굴로 말하자 하월도 그제야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그때부터는 그동안 귀식대법으로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과 비슷한 모습이 보였다.
“폐하. 정신이 드시는지요. 정신이 드시면 눈을 떠 보시겠습니까?”
남이천이 간절한 소리로 말했다.
“소신의 목소리가 들리는지요. 폐하.”
“시끄럽다. 남이천. 짐은 이제 정신을 차리고 있는데 너무 많은 걸 시키지 말아라.”
“폐하…… 폐하!!!”
남이천은 너무 흥분하고 감격해서 황제를 와락 끌어안아 버렸다.
다른 사람들은 그 마음이 이해되기는 하면서도 지존의 옥체에 손을 댔다는 사실에 긴장했다.
평소의 황상이라면 그 죄를 용서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남이천은 슬그머니 손을 뗐다.
어차피 눈을 감고 계셨으니까 어쩌면 누가 그랬는지 모를 수도 있다고 깜찍한 생각까지 했다.
“남이천.”
그러나 황제는 곧바로 그의 이름을 불렀고 남이천의 얼굴은 보랏빛으로 변했다.
“짐이 이번 한 번만 봐주는 것이다. 죽었다 깨어나서 특별히 봐주는 것이야. 어디 짐의 존귀한 옥체에 손을.”
사람들의 얼굴에 가득 웃음이 지어졌다.
깨어나기만 하고 성격이나 그런 것들은 확 달라졌거나 그러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는데 그런 걱정도 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던 것이다.
몸이 제 기능을 다시 시작하면서 출혈도 시작되었다.
선이남은 서둘러 검상을 치료했다.
“폐하. 이제는 소신이 내공을 불어넣어 드리겠습니다. 그러면 회복이 좀 더 빨라질 것입니다.”
선이남이 말하자 황제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급할 것 없다. 천천히 자연스럽게 회복해도 될 것 같다. 괜한 힘을 낭비하지 말거라. 짐이 여기에 있는 동안 선 부정이 짐을 지켜야 하지 않느냐.”
황제의 말에 선이남이 웃음을 터뜨렸다.
“폐하. 이제 정말 완전히 돌아오신 것 같아서 정말 기쁩니다.”
황제는 하월을 불렀다.
“어찌 됐느냐. 하월. 있었던 일을 하나도 빠뜨리지 말고 전부 소상히 말하여라.”
“예. 폐하.”
그것은 하월도 원하던 바였다.
그는 자기가 방에 들어가기 전에 밖에서 들었던 황후와 태자의 이야기까지 전부 해 주었고 황제의 표정은 점점 굳어 갔다.
“짐의 시신을 찾느라 난리가 났겠구나. 이럴 것이 아니다. 하월이 북궁세가로 갔을 거라고 생각했을 테니 그곳이 위험하겠구나. 짐은 이제 무사하니 북궁세가로 가 보아라.”
황제가 다급하게 외쳤을 때 창문으로 신형 하나가 들어왔다.
어찌나 자연스럽게 들어오는지 그곳이 출입문인가 할 정도였다.
“서 공자님!”
황제의 말을 들으면서 정말 그렇겠다고 생각하며 북궁세가로 향하려던 하월은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아진을 발견하고 고함을 질렀다.
일이 다 끝나고 나서 온 것이겠지만 이제는 슬슬 아진이 괜찮은지 걱정이 되던 참이었기에 반가움을 감출 길이 없었다.
“아진이가 아니냐. 때맞춰 잘 왔다. 너에게 할 이야기가 정말 많다만 우선은 북궁세가로 가서 짐의 원수를 갚아다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폐하?”
아진이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묻자 선이남과 남이천이 그의 양팔을 잡았다.
“지금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 동창 제독이 폐하를 시해하라고 명을 내려서 하월 공자가 시해하고 이제 간신히 깨어나신 거야. 하월 공자가 시신을 이리로 모셔오지 않았으면 폐하는 영영 눈을 뜨지 못하셨을지도 모르는데 사람들은 하월 공자가 폐하의 시신을 모시고 간 곳이 북궁세가라고 생각할 거야.”
아진이 자기가 제대로 이해한 게 맞는가 하는 얼굴로 하월을 보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제가 맡겠습니다.”
아진의 신형이 사라진 것을 보며 황제는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진도 이제 완전히 회복한 것 같군.”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었던 하루가 아직 끝을 맺지 못한 채 이어지고 있었다.
* * *
하월이 황제의 시신을 안고 사라지고 그 뒤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게……!”
그러나 그들은 하월이 황제의 시신을 기를 쓰고 훔쳐간 이유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설마하니 황제가 귀식대법을 했을 거라고는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하월 저놈이 산본의가에 황상의 시신을 모시고 가려는 모양이구나. 불쌍한 놈. 서도진이 죽은 사람도 살려낸다는 말은 들었다만 살리지 못한 사람이 더 많다고 하지 않더냐.”
황후는 갑자기 서도진에 대한 얘기가 떠오르며 기분이 이상해져서 물었다.
그러나 태자는 황후의 말에 대꾸나 해 주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태자는 그런 뜬소문까지 다 믿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며 밖으로 나갔다.
“멍청한 놈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놈들!”
그는 하월에게 당해 쓰러져 있는 이들을 걷어차며 걸음을 옮겼다.
바닥은 이미 사람들이 흘린 피로 흥건했다.
태자가 나가고 황후는 급히 아버지와 동창 제독을 불러들였다.
동창 제독은 하월의 뒤를 쫓도록 사람들에게 지시를 내려놓고 뒷수습을 하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었는데 황후의 부름을 받고 급히 달려왔다.
“당장 산본의가로 사람을 보내 서도진을 잡아야 합니다. 서도진이 멋대로 움직이지 못하도록 가족을 인질로 잡고 본보기로 그곳 사람들을 죽여 목을 거리에 내던지라고 하세요. 황상을 살리면 가족들을 전부 죽일 거라고 하시고요. 그 일만은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황후는 광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알겠습니다. 마마.”
연석영이 동창 제독과 함께 나가면서 그 일을 의논했다.
그들은 정신이 없었지만 그래도 그 문제만 처리되면 다른 것은 모두 저절로 해결될 거라고 믿었다.
황상이 죽었다.
드디어 그 황상이 죽어 버린 것이다.
“기가 막히는 일이 아닙니까. 그 서도진이라는 자 말입니다. 그자가 했다는 일이 사실이라고 믿으십니까?”
동창 제독은 죽은 사람을 살리는 일이 어떻게 가능하다는 건가 했다.
그 말로 인해 기쁨과 환희를 누려야 할 이 시점에 이러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일이 잘못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이오. 도망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고 말이오. 그런 길이 보인다면 그 길이 아무리 험하고 비좁아서 실제로 그곳으로 갈 사람이 없을 것 같다고 해도 봉쇄하고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거요.”
연석영은 그 말을 마치고 다른 곳으로 사라졌다.
그는 황후의 아버지였다.
그러나 이제는 황제의 외조부가 되는 것이다.
한때는 황후의 아버지라는 사실에도 만족할 만했으나 이제는 그런 것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었다.
황제가 갑자기 변해 버리지만 않았다면 그것도 할만했을 텐데 황제의 변심을 예상할 수 없다는 게 문제였다.
‘그런데 그렇게 따지자면 태자 전하야말로…….’
연석영은 불안한 마음이 솟아나려고 하는 걸 애써 막았다.
‘아니다. 심성은 착하신 분이다. 그러니 이리 된 것이다.’
* * *
평소에는 그런 일에 동원되지 않던 동창이 산본으로 향했다.
금의위도, 구문제독도 황제에게 장악됐다는 생각에 그들을 움직이는 것이 영 불편해서 황후가 그리 명령을 내린 것인데, 황제 시해의 일을 기획한 장본인이 동창 제독이었다는 사실도 명을 내리는 데 한몫했다.
동창 제독은 이 일만 마무리 되면 앞으로는 인생이 완전히 달라질 거라는 생각에 매 순간 구름 위를 걷는 것 같았다.
그러나 막상 산본으로 가는 이들의 마음은 그렇게 한가하지 않았다.
동창 소속의 서규창은 동료인 임대운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산본의가는 단순한 의가가 아니라던데. 산본의가를 지키는 무인만 해도 그 수가 상당하다고 하고. 대공자의 처가 북리세가 사람이고 독고세가는 산본의가에 일이 생기면 세가원의 마지막 사람까지 목숨을 바쳐서 도와줄 거라고 공언을 했다던데. 그런데 괜찮은 건가?”
“나도 그 이야기는 들었네. 중원의 고수들은 차라리 천마신교를 치지 산본의가는 건드리는 게 아니라고도 한대. 천마신교는 마교고 산본의가는 정파를 추구할 텐데도 말이야.”
“우리가 아무래도 악귀를 건드리러 가는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그들만이 아니었다.
다른 이들도 산본의가로 가는 길이 내키지 않았다.
그동안 수많은 임무를 수행해 왔지만 이번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은 처음이었다.
악귀를 그냥 건드리기만 하는 게 아니라 악귀의 자존심과 성질을 있는 대로 긁어대는 일이 아닌가.
산본의가의 사람들을 죽이고 가족을 인질로 삼으라니.
그들의 불안은 갈수록 가중되었고 그것은 희한한 방식으로 나타났다.
대열이 잠시 행진을 멈추고 쉴 때마다 사람들이 사라졌던 것이다.
동창이 되면 다른 사람이 누릴 수 없는 권력을 가질 수 있었고 환관이라는 특성 때문에 그들 상호 간에 느끼는 유대감도 두터웠다.
없는 사람들끼리 연민을 느끼면서 서로 다독여 주는.
뭐, 그런 거였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동창의 자긍심과 동지애도 산본의가의 악귀를 상대하라는 명령 앞에서는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