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5화
315화
“전부 모였습니다. 가주님.”
총관이 말하자 가주는 사람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향했다.
“모두 듣거라. 가문의 기나긴 역사가 이제 종말을 맞이할 듯하다.”
가주의 느닷없는 말에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그게 무슨 소리라는 말인가.
그러나 가주는 그들의 소란을 조용히 가라앉혔다.
“며칠 내에 본가의 건물은 모두 무너질 것이고 돌 하나도 겹쳐지지 않게 초토화가 되어 버릴지도 모른다. 일이 그렇게 될 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아무것도 모르는 너희를 그냥 둘 수가 없었다. 각자 짐을 꾸려 이곳을 떠나거라.”
“…….”
사람들은 웅성거리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가주님이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가 하면서 동동거렸다.
그러나 가주는 설명을 하지 않은 채 가주전으로 돌아갔다.
총관과 수뇌부가 그를 향해 달려갔다.
“무슨 일인지요. 가주님.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가주는 그들에게 짧게 말했다.
“폐하께서 서거하셨네.”
상상도 하지 못한 적막감이 그곳을 가득 채웠다.
* * *
폭천의는 미친 것처럼 웃던 태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사실 그가 떠올리려고 한 것은 아니었는데 저절로 머릿속에 떠올라 버렸다.
“해냈다는구나. 동창 제독이 정말 그 일을 해냈다는구나. 부황께서 돌아가셨다. 폭천의. 네놈이 나에게 복을 가져왔구나. 이 소식이 먼저 전해졌다면 네놈의 눈 하나도 그냥 놔둘 것인데 그랬다.”
그때의 태자는 영락없이 미친 것처럼 보였다.
두 눈 중에 어떤 눈이 더 잘 보이냐고 묻더니 오른쪽 눈이 더 잘 보인다고 하자 그럼 왼쪽 눈은 없어도 되겠구나 했다.
그리고 한눈을 앗아 갔다.
그게 전부 계산된 행동일 거라고는 생각하기가 힘들었다.
다른 것은 그렇다 치자고 생각했다.
그런데 눈이라니.
한쪽 눈을 잃는 것이 사물을 보는 것을 얼마나 불편하게 하는지 모른다는 말인가.
그러고는 벽력탄을 만들 준비를 해 놓으라 하고 사라졌다.
만약 그런 일까지 일어나지 않았다면 폭천의는 지금쯤, 태자가 없는 기회를 노려 탈출을 꿈꾸었을지도 몰랐다.
그의 몸은 어쨌거나 한 번씩 이상한 힘으로 가득 차곤 했으니까.
태자가 돌아오기 전에 한 번 정도만 그 힘이 돌아와도 이곳을 도망칠 수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태자에 의해 몸이 엉망이 되자 저절로 포기가 되어 버렸다.
이 몸이라면 그 힘이 돌아온다고 해도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을 것 같았다.
‘기가 막히는군. 벽력탄을 만들 수 있게 됐다고 좋아할 일이 아니었어. 이제 평생 이 몸을 해서 저 미치광이 태자를 위해 벽력탄이나 만들어야 한다는 건가?’
태자.
이제 더 이상 그의 신분은 태자가 아닐지도 몰랐다.
새로 만나게 되는 그는 황제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러나 조금도 설레지 않았다.
황제의 곁에서 영화를 누리고 권력을 나눠 갖지 않아도 좋으니 그저 건강한 두 다리를 다시 돌려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그의 마음에 간절하게 쌓였다.
잃기 전에는 절대로 생각해 보지 못했던 바람이었다.
* * *
폭천의를 두고 나오면서 태자는 그를 놓치면 안 된다고 무인들에게 몇 번이나 당부했다.
그리고 저택을 지키는 병력의 절반을 이동시켜 폭천의를 지키라고까지 명령했다.
폭천의와 그의 벽력탄이면 그는 강호도 두려워하지 않고 제 발아래에 무릎을 꿇릴 수 있었다.
기쁜 마음을 금치 못한 채 황궁에 이르렀을 때 부황의 시신 곁에는 모후가 미리 와 있었다.
“어마마마.”
“왔느냐. 태자.”
그녀는 지극히 편안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자애로운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곁에 가서 앉는 태자의 손을 가만히 잡아 주기까지 했다.
생전 안 하던 행동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로 낯설었다.
태자는 그런 것이 어색하고 불편해서 손을 빼냈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가증스러웠다.
어쩌다 그가 날린 화살이 한 번 과녁의 정중앙에 날아가 꽂혔다고 모후는 세상에 둘도 없이 다정한 어머니의 모습을 흉내 내고 있었다.
“이제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태자. 네가 보위에 오르는 것이다.”
황후는 술자리의 분위기를 좋게 만드는 무희의 춤을 감상하는 것처럼 황제의 시신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오랜 정적(政敵).
지긋지긋하던 사람.
그녀는 동창 제독에게 무슨 상을 내릴지 고민하고 있었다.
좋은 비단과 산삼, 황금은 기본으로 줄 것이고 백 칸의 집을 짓도록 목재와 기와를 내릴까도 생각했다.
그는 충분히 그것을 받을 자격이 있었다.
태자 역시 부황의 시신을 보면서 상념에 잠겼다.
그 존귀하던 사람이 이리되었구나.
태자의 얼굴에 웃음이 지어졌다.
다른 이들은 웃고 싶어도 웃음을 참았지만 태자는 웃음을 참지도 못했다.
부황의 얼굴은 창백해 보였고 그에게서 흘러나온 피도 서서히 굳어 가기 시작했다.
“반발이 있을 것이다. 너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에게 너의 존엄함을 보이거라. 태자.”
“존엄함을 보여서 뭘 합니까. 강함을 보일 것입니다. 입을 나불거리는 놈들이 있으면 찾아내서 제 앞에서 다시 말하게 하고 벌을 내릴 것입니다. 화탄을 삼키게 하고 곤장을 치면 어떻겠습니까.”
태자는 그 말을 하고 그 모습을 상상하는 듯 웃었다.
황후는 차마 그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광기 어린 모습이었지만 그녀는 태자가 지금 극도로 차가운 정신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게 결국 제 아버지를 누르고 이 자리에 이르렀던 것이다.
“저에게는 폭천의가 있습니다. 왜 진작 그자를 적극적으로 찾지 않았던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자가 벽력탄을 만들었다는 것은 헛소문으로 치부되지 않았더냐. 그동안 벽력탄이 나타난 적도 없고 그게 사용된 전투도 없었고 말이다. 당연했다. 아쉬운 감은 있지만 그래도 결국에는 잘 되지 않았느냐.”
두 사람이 이야기를 하는 동안 밖이 소란스러웠다.
병장기를 뽑아 드는 소리가 챙, 챙 요란하게 들려왔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아는 이가 없었다.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고 사람들의 몸이 이리저리 나가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자리에 시립해 있던 무사 몇이 급히 밖으로 나가려 했지만 문이 열린 순간 밀고 들어오는 신형에 주춤주춤 떠밀렸다.
하월이었다.
“네놈이 여기는 웬일이냐. 지아비의 마지막을 지켜보기라도 하려고 온 것이냐.”
황후는 폭소를 터뜨렸다.
하월은 가증스러운 황후에게는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다.
그의 시선이 짧은 순간 동안 황제에게 머물렀다.
그 모습은 그동안 그가 죽여 왔던 사람들의 모습과 아직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늦은 것은 아니다.’
그러면 되었다.
이제 서도진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거라고 생각하며 그는 한쪽 구석에 가서 가만히 서 있었다.
황후는 그 모습을 기가 찬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어쩌자는 것인가.
뭘 하겠다고 그러고 있다는 말인가.
황후는 하월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고 무인들을 노려보았다.
“당장 저놈을 끌어내지 못하겠느냐!”
그러나 하월은 당당했다.
덤비는 놈은 검으로 베어내고 그 자리를 우직하게 지켜냈다.
태자가 미친 듯이 고함을 지르며 당장 하월을 끌어내라 했지만 누구도 그의 명령을 수행할 수 없었다.
한꺼번에 수십 명이 덤벼들어도 하월은 기어이 그들 모두를 죽였다.
저자의 무위가 저 정도였던가 하면서 태자는 할 말을 잃은 채 그 모습을 보았다.
결국 고집을 꺾지 않는 한 그의 권위에만 치명적인 손해가 날 것 같다고 생각했는지 태자가 입을 다물었다.
기묘한 장면이었다.
황제의 시신을 두고 황후와 태자와 하월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어쩌려느냐. 너를 그리도 총애하시던 부황께서 돌아가셨으니 말이다.”
태자가 물었지만 하월은 대답할 말이 없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태자는 그저 그를 노려볼 뿐이었다.
‘시신을 들고 이대로 도망치는 게 나을까? 아니면 서 공자를 기다리는 게 나은가? 서 공자라고 해도 시간이 너무 오래 지나면 손을 쓰지 못할지도 모르는데.’
저를 공격하는 자들을 상대하면서 하월은 해 볼만 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 자리에 석상처럼 일각 정도를 서 있다가 모두의 관심이 저를 떠났을 즈음 황제의 시신을 향해 허공섭물을 펼쳤다.
설마하니 사람들은 하월이 허공섭물을 펼친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죽은 자의 시신이 저절로 떠올랐다며 기겁했는데 허공에 떠오른 황제의 시신이 하월의 손에 안착했고 하월은 그대로 시신을 안고 경공을 펼쳐 사라졌다.
어느 정도 상황이 이해되거나 다음 일이 예측되어야 대비를 했을 텐데 워낙 상상을 뛰어넘는 전개에 그들은 하월이 밖으로 나간 후에야 황망히 일어섰다.
“저자를 쏘아라. 화살을 날려 저자를 떨어뜨려라!”
태자가 큰소리로 외치자 곁에 있던 태감들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태자를 말렸다.
“하오나 태자 전하. 그리하면 저자만 다치는 것이 아니라…….”
그러나 그들은 그 뒷말을 잇지 못했다.
태자의 얼굴을 본 순간 이미 그에게 그런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달아서였다.
수많은 화살이 하월을 향해 날아가며 하늘을 새카맣게 뒤덮었다.
하월은 등줄기에서 식은땀을 시원하게 쏟으며 허공을 내달렸다.
‘우리 아버지랑 나는 사이가 정말 좋은 편이었네. 아버지가 나한테 고마워하셔야 할 텐데. 태자가 어떻게 했는지 알려 드려야지.’
어느 정도 거리를 벌렸을 때 하월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 * *
향화문의 안가에서 하월을 기다리던 사람들의 가슴은 시시각각 타들어 갔다.
그가 왔어야 할 시간이 훨씬 지나고 있었다.
일이 잘못된 게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면서 몇 사람은 지금이라도 황궁에 가 봐야 하는 게 아니냐고 말했다.
“형님. 아무래도 안 되겠습니다. 저는 너무 불안해요. 여기에 있다가는 제가 먼저 죽을 것 같습니다. 저는 가 봐야겠습니다. 분명히 무슨 일이 생긴 거예요. 안 그러면 이렇게 늦을 리가 없습니다.”
남이천이 흑빛이 된 얼굴로 말했다.
선이남이야말로 그러고 싶었다.
그러나 자기들은 하월을 믿고 기다리다가 하월이 황상을 모시고 왔을 때 황상이 회복할 수 있게 도와야 하는 게 아닌가 했다.
그도 안 좋은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어쩌면 남이천보다도 더 힘이 들었을 것이다.
하월과 황상이 나누던 이야기.
그것이 지금도 생생하게 귀에 어른거렸다.
‘이천에게 이 일을 맡기고 나는 돌아갔어야 하는 게 아니었을까.’
나중에는 그런 생각도 들었다.
답도 없는 질문이 계속 차오르며 그때마다 선이남을 찔러댔다.
“이천아. 아무래도 안 되겠다. 내가 그곳에 있어야 할 것 같다. 하월 공자 혼자로는…….”
그러나 선이남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하월이 나타났다.
황제의 시신을 안은 채 기진한 모습이기는 했지만 분명 하월이었다.
“하월 공자!”
가장 먼저 그를 알아보고 소리친 사람은 암천대문이었다.
그는 창밖을 손으로 가리켰고 그와 동시에 모든 이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
“하월…… 공자. 정말 하월 공자가……!”
그들이 모두 일제히 창가로 다가가는 바람에 하월은 정작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뒤늦게 정신이 든 암천대문이 사람들을 뒤로 잡아끌었다.
“들어오시도록 모두 물러서시오!”
그의 말에 사람들은 급히 물러섰고 하월이 황제를 조심히 안은 채 들어왔다.
그러는 동안 사람들은 황제의 시신을 눕힐 곳을 준비했고 선이남과 남이천은 미리 준비해 두었던 화로에 불씨를 키웠다.
도착하는 대로 황상이 추위를 느끼지 않도록 준비해 두었던 것인데 드디어 그것을 사용할 수 있게 됐다는 마음에 가슴이 울컥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