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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314화 (314/470)
  • 제314화

    314화

    이제 곧 주위로 동창 제독과 다른 사람들이 다가올 터였다.

    -폐하. 서 공자를 믿으옵소서.

    하월은 전음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말이 그것뿐임을 미안하게 여겼다.

    날카로운 검이 허공에서 빛을 냈다.

    황제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이 일이 어찌 될지 그는 알지 못하고 있었다.

    죽음에서 돌아올 수 있을지, 아니면 이대로 영영 죽음을 맞이하게 될지.

    태자에게 화가 나지는 않았다.

    ‘내가 너에게 무슨 마음을 갖겠느냐. 나라도 너에게 그리 했을 것인데 말이다. 미리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는데 말이다.’

    황제가 될 이로 태어나 황제의 덕목을 배우며 자라다가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지금.

    자기 아들에 의해 죽음을 경험하게 된 그는 황제였던 삶이 진저리나게 싫었다.

    문득 산본의가가 있는 마을이 떠올랐다.

    그들은 신분이 낮아도 아비와 아들이 서로를 죽여야 할지 살려야 할지 고민하지는 않을 것인데.

    황제의 생각이 거기에 미쳤을 때 하월의 전음이 들려왔다.

    -구결을 외우십시오. 폐하. 귀식대법을 전개하십시오.

    -그래. 잘 부탁하마. 하월.

    몇 마디 더 할까 했지만 그만두었다.

    그리고 그때부터는 귀식대법의 구결을 외웠다.

    미리 신호했던 대로 황제가 우수를 쥐었다.

    하월은 갑자기 설움이 북받치려 하는 것을 애써 무시하며 검을 찔러넣었다.

    생생한 죽음이, 울컥 터지는 피와 함께 돌연 찾아들었다.

    비릿한 피 냄새는 죽음을 선명하게 자각하도록 만들었다.

    황제의 시신에서 흐른 피가 바닥에서 번지며 길을 만들고 나갔다.

    황제는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는데 그의 몸에서 솟구친 피는 이제야말로 활개를 치기 시작했다.

    황제가 죽었다.

    하월은 이제 그 사실을 공표해야 했다.

    그것을 빨리해야만 황제를 구할 수 있다.

    하월이 밖으로 나갔을 때 동창 제독이 멀지 않은 곳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다가왔다.

    하월은 밖의 분위기가 달라져 있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하월만 느낀 것이 아니었을 터였다.

    동창 제독이 그곳에서 보이는 태도.

    아무 거리낌 없는 그 태도가 사람들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동창 제독은 마치 황제의 부름이라도 받은 것처럼 행동했다.

    평소라면 응당 그를 제지했어야 할 사람들조차 그를 막지 못했다.

    무언가 변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던 것이다.

    안에서부터 퍼진 비릿한 혈향.

    그런데 누구도 진실을 추궁하지 않았다.

    그저 겁에 질린 얼굴로 앞으로 무슨 일이 어떻게 될지 서로 눈치를 볼 뿐이었다.

    동창 제독은 사건 현장을 감식하러 가는 사람처럼 당당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황제의 처소에 하월과 함께 들어가 황제의 시신을 본 후 하월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수고했네. 당분간은 궁을 나가 있도록 하게. 이곳의 일이 정리되는 대로 사람을 보내지.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네. 폭천의를 만나는 자리에 자네도 한 번 데려가 주겠네. 운이 좋으면 그 가 벽력탄을 만드는 것을 구경할 수도 있지 않겠나. 태자 전하께서 자네에게 그것을 몇 개 정도 선물로 주실지도 모르지. 자네는 그만한 일을 했네.”

    하월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까지 표정을 능숙하게 감출 정도는 못 되었는데 동창 제독은 황제를 시해하고 충격에 빠져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곧 태자 전하께서 이곳에 오실 것이네. 자네가 여기에 있어서 좋을 것은 없지. 자네가 있으면 황후 마마와 태자 전하가 자네에게 화를 내는 척해야 할 테니 말이네.”

    동창 제독은 즐거운 듯이 말했고 하월은 그가 황제의 시신을 어떻게 할 것인지 알고 싶었다.

    “선 부정을 불러야 하는 게 아닙니까.”

    하월이 말하자 동창 제독이 웃었다.

    “그럴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 진실을 밝혀야 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네. 자네가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우습군. 자네가 한 짓이라는 걸 알아차리지 못할 거라고 맹신해서 그러는 건가?”

    동창 제독은 하월의 말을 잘못 알아들은 것이 분명했다.

    하월은 고개를 젓고 뒤로 물러났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심장에서 피가 빠져나오는 것 같았다.

    빨리 선이남을 만나야 할 듯했다.

    ‘그보다 서 공자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건가…….’

    하월은 너무 늦어서 황제가 살아나지 못하는 모습이 자꾸만 상상되었다.

    ‘늦어도…… 늦어도 서 공자가 오면 다시 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 뒤에 답이 나오면 좋을 텐데 생각은 거기에서 그대로 멈춰 버리는 듯했다.

    그는 바람에 나부끼는 민들레 홀씨처럼 이리저리 비틀거렸다.

    술에 취한 사람 같은 이상한 걸음걸이에 몇몇 사람이 그를 주시했다.

    대부분은 아직 황상에게 벌어진 일을 모르고 있었다.

    ‘선 부정에게…… 우선은 선 부정에게 가야 한다. 아니. 그러다가 꼬리를 밟히면?’

    동창 제독은 하월을 전폭적으로 신임하는 것처럼 굴었지만 사실은 아직도 마음에 얼마쯤은 의심을 품고 있을지도 몰랐다.

    사람을 붙여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월은 잠시 멈춰 섰다가 밖으로 나섰다.

    지금 상태에서는 섣불리 말을 하는 것도, 사람을 만나는 것도 전부 다 겁이 났다.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고 잘될 거라고 위로를 듣고 싶은데 그의 행보를 지켜보는 이가 있을 거라는 사실이 걱정됐다.

    ‘우선은 본가로 돌아가자. 우선은 그곳에서…….’

    하월은 생각을 마치지도 못한 채 걸음을 서둘렀다.

    * * *

    “하월아.”

    그가 돌아왔다는 말을 전해 들은 북궁세가주가 곧장 그를 찾아왔다.

    하월은 아버지를 보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가주는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했다.

    “궁에서 사람이 다녀갔다.”

    그는 암천대문이 다녀간 일을 얘기했다.

    하월은 아버지가 황후의 사가를 습격하는 일에 실패한 것을 알게 됐고 모든 일이 거기에서부터 엉켰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폐하의 편에 설 것이다. 우리는 이제 그렇게 해야만 한다. 우리가 앞으로 어떤 말을 하건 다른 사람들은 우리 말을 믿어 주지 않을 것이다. 그럴 바에는 그냥 보이는 것처럼 행동하는 게 나을 거라고 본다.”

    가주는 아직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른 채 하월에게 말했다.

    그는 하월과 깊어진 감정의 골도 해결하고 싶은 것 같았고 하월에게 여러 이야기를 했다.

    하월은 그런 가주를 바라보았다.

    “아버님.”

    “……그래.”

    뭔가 큰 결심을 한 것 같은 하월을 보며 그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으면서 말하자 하월이 결심을 하고 말했다.

    “아버님. 이제 아버님은 많은 것에 대비하셔야 합니다. 폐하께서…….”

    그가 영면했다는 말을 하기는 쉽지 않았다.

    가주는 그 소식을 듣고 놀란 얼굴로 하월을 바라보았다.

    일이 어찌 그리된다는 말인가.

    환관이 다녀간 일은 뭐란 말인가.

    그것이, 그 모든 것이 함정이었다는 건가 하면서 그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동창 제독의 짓입니다. 그자는 계속해서 폐하께 불만을 품어 왔고 폐하의 개혁을 지지하는 자들을 암살했습니다. 그리고 그 살행에 저를 내보냈습니다.”

    “하, 하월아……! 그게 무슨 말이냐!”

    가주가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 사실까지는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버님도 폐하께 원망스러운 마음이 많지 않으셨습니까.”

    “그래도…… 그래도 이제 우리는 폐하와 뜻을 같이하는 것이 가장 나은 거였는데…… 그러면 이제 어찌해야 한다는 말이냐.”

    “황후 마마가 아버님을 받아 주신다면 아버님은 다시 황후 마마에게 몸을 의탁하고 싶으십니까?”

    가주는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자신의 결정에 가문의 명운이 결정되는 것이라 쉽게 답을 할 수가 없는 듯했다.

    그러나 답이 나오기까지 그리 오래 걸린 것도 아니었다.

    “어차피 황후 마마는 우리를 받아 주지 않을 것이다. 그분은 그럴 분이 아니다. 차라리 잘된 것 같기도 하구나. 한쪽 길이 막혀 있으니 마음을 정하기도 한결 쉬워지지 않았느냐.”

    아버지의 말에 하월은 실소를 흘렸다.

    가주는 황제를 향한 대단한 충성심을 가진 자는 아니었다.

    대단한 충성심은커녕 좁쌀 만한 충성심도 갖지 못한 게 아닌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결과적으로 하월의 편에 서기로 마음을 굳힌 듯했다.

    “나는 지금부터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면서 가문을 지킬 생각이다. 남들이 뭐라 하건 그래야 하지 않겠느냐.”

    “…….”

    하월은 문득, 자기가 아버지를 전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숱하게 원망하고 실망해왔지만 그를 이해해 보려고 한 적은 별로 없었던 것 같았다.

    “아버님. 아버님께 아들은 이제 저 하나 남았는데…… 제가 폐하를 시해했으니 어쩝니까…….”

    그러자 가주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상상하지 못한 말을 듣고 크게 당황한 것 같았다.

    그러더니 주먹 쥔 손을 서탁 위에 올렸다.

    “본 사람이 있느냐.”

    “동창 제독이 보았습니다.”

    “그자가 시킨 일이냐.”

    “예.”

    “뭐라 하더냐.”

    “곧 태자 전하가 오실 거라면서 저에게는 본가로 돌아가 있으라 했습니다.”

    “다른 곳으로 피해 있는 것이 어떠냐. 그자는 믿을만한 자가 아니다.”

    구문 제독이었던 가주였다.

    동창 제독에 대해서는 알 만큼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감정이 좋지 않았지만 그 이야기까지 듣고 나자 더더욱 그랬다.

    자기가 모르는 동안 거대한 구렁이가 아가리를 벌리고 제 아들을 삼키려 하고 있었던 거라는 생각에 그는 벌떡 일어섰다.

    “짐을 챙길 시간도 없을지 모른다. 그자가 언제 들이닥칠지 모른다. 필요한 것은 내가 사람을 보내 가져다줄 것이니 우선은 이대로 나가거라. 말을 타는 것보다는 신법을 펼치는 것이 낫겠지.”

    정신없이 서두르는 아버지를 보면서 하월은 괜히 울컥해졌다.

    북궁세가에서는 구경할 수 없던 풍경이 벌어진 것이다.

    “아버님.”

    “할 얘기가 있어도 나중에 해라. 너는 가문을 이어야 한다. 그 정도 양심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 네 형들을 전부 그리 보내버렸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 말에서 원망이나 분노는 그리 깊이 느껴지지 않았다.

    “저는 안 갑니다. 아버님. 저는 기다려야 합니다.”

    “누구를 말이냐.”

    “폐하께서 깨어나시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너무 늦더라도 서 공자가 돌아오면 모든 일이 정상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

    가주는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하월을 바라보았다.

    모자란 아들이 당치 않는 소리를 하는 걸 들었다면 그런 표정을 지을 만했을 것이다.

    “서 공자는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습니다. 시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기만 한다면…….”

    하월이 말하더니 뭔가 떠오르는 것이 있는 것처럼 벌떡 일어섰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폭천의가 휩쓸고 간 마을에서 봤으면서도 왜 두려워했던가 했다.

    “아버님. 저는 폐하의 곁에 있겠습니다. 그러면 서 공자가 폐하를 찾아올 것입니다. 그자들이 폐하의 시신을 훼손하지 못하도록 지키겠습니다.”

    불에 타고 재가 돼 버린다면.

    그 재가 바람에 날리고 물에 떠내려가 버린다면 아무리 서도진이라고 해도 살릴 수 없는 것이 아닐까 하면서 하월은 그대로 밖으로 달려나가 바닥을 박찼다.

    너무 늦지 않았기만을 바랐다.

    늦지만 않았다면 그 후의 시간이 얼마나 참혹하고 고통스러워도 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월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다 가주가 밖으로 나갔다.

    “세가의 사람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일각 안에 모두 광장에 모이도록 이르거라.”

    명을 내리는 가주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지만 무서운 결단을 내린 사람 특유의 비장한 기운이 감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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