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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313화 (313/470)
  • 제313화

    313화

    일을 맡더라도, 맡지 않더라도 동창 제독에게서 그런 이야기를 들은 이상 말은 들어봐야 했다.

    동창 제독이 그런 표정을 짓는다는 것은 하월에게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다.

    동창 제독은 하월에게 손짓을 해서 그를 가까이 오도록 했다.

    은밀하게 말을 하고 싶어서 그런 거라면 전음을 해도 될 텐데 지금의 분위기를 충분히 즐기려고 그러는 것 같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면 동창 제독이 이런 표정을 짓는 걸까 하며 어느덧 하월은 조급증을 느끼고 있었다.

    “자네도 폭천의에 대해서는 들어 봤겠지. 요즘 온 나라가 혈교와 그자로 인해서 떠들썩하지 않았던가.”

    하월은 왜 갑자기 그의 입에서 폭천의라는 이름이 나오는 건가 하면서 그를 바라보았다.

    “폭천의의 이름은 당연히 들어 봤습니다. 그자를 죽이라고 하려고 부르신 것은 아닐 테고요.”

    그러자 동창 제독이 큰 소리로 웃었다.

    “아니네. 아니지. 그리고 그래서도 안 되고 말이네.”

    “안 된다는 말씀은 무슨 의미입니까.”

    “폭천의가 이제부터 우리에게 아주 유용한 패가 될 것이네.”

    동창 제독의 눈이 뱀처럼 가늘어졌다.

    “북궁 태감. 아니. 하월. 이제부터 이 나라의 명운이 자네에게 달렸네. 자네에게는 어려운 일도 아닐 걸세. 꼭 성공시키도록 해 주게. 그러면 자네는 자네가 원하는 모든 것을 갖게 될 거네.”

    “…….”

    왜였을까.

    그 생각을 할 근거가 충분치 않았는데도 왜 하월은 황제를 떠올렸을까.

    왜 동창 제독이 그에게 죽이라고 명령할 대상이 황제일 거라고 생각했을까.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이 자가 아무리 미쳤다고 해도 설마 그런 생각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자네가 오기 전에 누가 다녀가셨는지 아는가.”

    그는 연석영이 자신을 찾아온 일에 대해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았다.

    정신없이 모든 얘기를 다 털어놓는 것처럼 보였지만 가끔 눈이 예리하게 빛났다.

    하월은 그자가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는 것이라 일부러 꾸며내고 있는 거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태자 전하의 부탁이네. 아니. 명령이라고 해야겠지. 그분을. 잠드시게 하게. 하월. 영원히 말이네.”

    “그분이라 함은.”

    하월은 심장이 발등으로 쿵 떨어지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고도 애써 표정을 감추었다.

    “황제 폐하 말이네. 폭천의가 태자 전하에게 있어. 벽력탄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은 헛소문이 아니었더군. 그자가 객잔에서 벽력탄을 터뜨려서 사람들을 죽였다는 소문이 벌써 퍼지고 있네. 그 벽력탄이네. 그걸 그자는 몇 개든 만들 수 있다고 하더군. 그러니 이제 무엇이 두렵겠는가. 백만 황군? 강호의 무림 고수? 벽력탄 앞에서는 모두 소용이 없게 되는 것이네.”

    그의 들뜬 얼굴을 보면서 하월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허나 그 일을 제가 어찌하겠습니까.”

    “왜 이러는가. 이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하월 자네뿐이라는 것을 내 입으로 굳이 말을 해야 하는가. 그 이유를 말이네.”

    또 그 소리였다.

    황제의 ‘특별한’ 총애를 받는 입장이니 황제의 침전에 들어가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 아니냐는 말.

    하월은 빠르게 결정을 짓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내가 안 하겠다고 하면 누구를 부를 것인가. 거절하고 황상의 곁에서 지키고 있으면 황상을 구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지키는 것은 공격하는 것에 비해 훨씬 더 어려웠다.

    ‘이전에 해왔던 것처럼 죽음을 가장해야 하는 것인가. 하지만 그러고 나서 황상의 시신을 돌려받지 못하면?’

    그동안은 시신을 찾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죽음을 흉내 냈던 이들이 다시 호흡을 시작하도록 하는 것도 간단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결과가 달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하월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하월. 이것은 주저할 일이 전혀 아니네. 이 일은 될 수밖에 없어.”

    간사한 속삭임이 계속되었다.

    “내일은 새 세상이 열릴 것이네.”

    ‘그래. 내가 해야 한다. 다를 것은 없다. 시신을 돌려 주려 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때는 서 공자가 돌아올 것이다. 그러면…… 서 공자가 돌아오면 황상의 시신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고 그러면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갈 것이다.’

    어두운 동굴을 빛도 없이 걸어 들어가 방황하는 것 같던 그에게 한 줄기 빛이 던져진 것 같았다.

    어차피 대안은 없었다.

    흠이 많은 계획이었고 그대로 되지 않았을 때는 걷잡을 수 없는 결과가 초래되겠지만 그보다 나은 다른 방법을 찾는 것이 불가능했다.

    “어찌하겠는가. 할 수 있겠는가. 아니지. 자네에게 이걸 묻는 것도 우스운 일이네. 자네라면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네. 가서 하게. 그리고 나를 찾아오게. 어차피 침전에서 일어나는 일을 누가 알겠는가. 더군다나 황상께서 그동안 침전 주위에 아무도 얼씬하지 못하게 하기도 하셨고. 그 이상한 고집 때문에 오히려 일이 더 쉬워지겠지.”

    동창 제독은 더 이상 시간 낭비를 할 필요가 있겠냐면서 하월에게 손짓을 했다.

    나가 보라는 의미였다.

    “오늘은 아주 특별한 날이 되겠군. 내일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그것을 생각하게. 내일 자네는 그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네.”

    하월은 포권을 취해 보이고 그의 앞에서 물러났다.

    폭천의.

    그자에 의해서 이런 일까지 시도가 된다는 것이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폭천의가 객잔에서 벽력탄으로 사람을 죽였다는 것은 무슨 이야기일까.

    하월은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일단은. 일단은 황상께 알려야 한다.’

    그는 걸음을 빠르게 움직였다.

    * * *

    하월은 자신의 행보를 지켜보는 이들이 지금쯤 수도 없이 깔려 있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황제를 찾아가는 것을 숨길 수는 없겠지만 그 의미는 다르게 보여야 했다.

    결국 그가 황제에게 갔을 때 황제는 자신을 상대로 어떤 계획이 세워지고 있는지도 모른 채 하월을 맞아들였다.

    그의 곁에는 황제에게 아주 익숙한 주변 풍경처럼 선이남이 있었다.

    선이남은 하월을 보며 웃음을 지어 보였다.

    “오래 걸렸구나. 아는 사람을 만났느냐. 아는 사람을 만나도 얘기를 나눌만한 사람은 없지 않으냐. 하월은 성질이 안 좋아서 사람들이 다가오지 않을 텐데?”

    황제가 일부러 농을 건다는 것을 알고 하월이 웃었다.

    “그런데 동창 제독은 그게 별로 신경 쓰이지 않는 모양입니다.”

    “동창 제독이 부르더냐.”

    “예. 폐하. 폐하를 시해하라 하였습니다.”

    “…….”

    황제의 얼굴에서 서서히 웃음이 사라졌다.

    선이남은 멍한 얼굴로 하월을 바라보았다.

    시간을 들여 천천히 말할 틈이 없었다.

    하월은 두 사람을 혼란에 빠뜨리고 그들이 이것저것 상상만 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태자 전하가 폭천의를 데리고 있다 합니다. 폭천의가 벽력탄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고 연석영이 동창 제독에게 폐하의 시해를 사주했다 합니다.”

    “그자는 사주한 자의 이름도 너에게 알려 주느냐.”

    그러고 보니 그런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래도 그 말이 거짓이었을 것 같지는 않았다.

    황제도 그것 때문에 물은 것은 아니었다.

    그저 뭐라도 말을 하면서 자신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을 들으며 현실감을 되찾아 보려고 그랬을지도 몰랐다.

    “공자. 그러겠다고 한 것은 아니지요? 그렇지요?”

    선이남은 스스로 대답하듯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군요.”

    하려고 한다면 하월이 해야 한다.

    그래야 살릴 수가 있다.

    선이남은 그 생각을 하는 듯했다.

    “아진이는 언제 돌아올 것 같으냐.”

    “모릅니다. 폐하. 서 공자라면, 가능하기만 했다면 어떻게든 그냥 오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러지 못했다는 것은 서 공자의 상태가 많이 좋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황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니 적당히 했어야지.”

    그러다가 그가 피식 웃었다.

    적당히라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 건가 해서였다.

    갈기갈기 찢어져 죽은 사람을 전부 살리지는 말고 남아도는 내공이 허락하는 선에서만 살려야 했던 거라고 불평하고 있는 것인가 해서.

    황제는 하월을 바라보았다.

    “정해진 일이었다. 태자와는 언젠가 이렇게 되지 않을까 했다. 잘 모르겠구나. 짐이 잘못한 것인지. 기회가 있을 때 황후를 폐위하고 그 가문을 완전히 멸문해 버렸다면 이 화를 피할 수 있었을까.”

    하월에게 물으면서 그는 그동안 아진이 해 왔던 방식을 떠올렸다.

    아진은 도덕성으로 칭찬받거나 관용으로 우러름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전혀 아니었다.

    ‘나도 그랬어야 했던가.’

    잡초를 뽑아낸 자리에는 귀신처럼 잡초가 다시 자란다.

    어찌 알고 그러는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다음에 나오는 잡초는 전에 있던 것보다 더 질기고 생명력이 강해지기 일쑤였다.

    황제는 그것이 걱정되었던 거였는데 지금은 자꾸 후회가 몰려오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폐하…….”

    선이남은 뭐라고 말을 해야 좋을지 알지 못했다.

    자꾸만 눈물이 날 것 같았고 이 일을 피할 방법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며 제 머리를 때렸다.

    “하월, 네가 힘이 들겠구나. 아니. 그래도 내공이 한 톨도 없는 사람들에게 격체전력을 할 때보다는 나을지도 모르겠다.”

    “소신도 그럴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폐하. 귀식대법은 미리 좀 익혀 두셨는지요.”

    그러자 황제가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고얀 놈을 보았나.”

    하월도 웃었다.

    “소신을 괴롭힐 생각이 아니었다면 폐하께서는 귀식대법을 미리미리 익혀 두셨어야 했습니다. 폐하처럼 많은 사람이 목숨을 노리는 분이 어디에 있다는 말입니까. 언젠가 이런 일이 생길 것을 대비하셨어야 합니다.”

    “그럴 것 같아서 일부러 안 했다. 어쩔 것이냐. 내가 왜 너의 짐을 나눠져야 한다는 말이냐.”

    이번에는 하월이 웃었다.

    “폐하. 하셔야 합니다.”

    하월은 웃음이 사라져 가는 얼굴로 말했다.

    황제도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황제는 귀식대법을 익혔다.

    린린이 적어 준 구결 중에 그것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 것을 보면 서이린은 정말 대단한 위인이었다.

    황제를 화나게 하지 않고 그것을 익힐 수 있게 해 놓은 것을 보면.

    황제에게 주의해야 할 것을 알려 주는 동안 하월은 가끔 말이 막혔다.

    너무 미안한 마음에 그랬다.

    “폐하. 소신을 용서하지 마옵소서.”

    “당연한 말을 뭣 하러 하느냐. 짐이 왜 너를 용서한다는 말이냐.”

    그러면서 황제는 웃었다.

    “선 부정. 너는 이만 나가 보거라. 궁을 떠나 향화문의 안가에 가 있거라. 그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거라.”

    “……예. 폐하.”

    선이남은 이 일이 성공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지만 황제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대답은 해 놓고도 선이남이 선뜻 그곳을 떠나지 못하자 황제가 그를 재촉했다.

    “어서 가라. 남이천도 데려가라. 그리고 일이 잘못될 경우에 태자가 목표로 삼을 수 있을만한 이들도 모두 데리고 나가거라. 그 일은 너에게 달렸다. 시간이 없을지도 모른다. 서둘러라.”

    “예, 폐하…….”

    선이남의 눈에 기어이 눈물이 맺혔다.

    “폐하…….”

    “아무 말 말아라. 다시 볼 것이다.”

    선이남은 그 말을 믿겠다는 듯이 고개를 조아리고 하월을 한 번 바라본 후 그곳을 나섰다.

    시간이 되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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