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2화
312화
“훨씬 좋아 보이는구나. 폭천의. 다음에는 다리로 하자. 아니. 그건 미룰 일이 아니구나. 뇌동에 있을 때 생각이 났으면 좋았을 텐데. 괜히 번거롭게 만들었구나.”
폭천의는 미친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는 바람에 머리의 어딘가에서 소름 끼치는 통증이 느껴졌다.
귀가 사라졌다고 해서 그곳에서 통증이 번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어디가 아픈지도 모른 채 울부짖었다.
“이건 아주 중요한 일이라서 미룰 수가 없겠구나. 지금부터는 서둘러야 하겠다. 외조부를 만나야 하니까 말이다.”
“전하. 제발 그 명만은 거두어 주십시오. 충심을…… 충심을 다하겠습니다.”
그러자 태자의 눈이 번뜩였다.
“사흘 후에 벽력탄을 만들어 낼 수 있겠느냐.”
“그, 그…… 그렇습니다. 전하. 벽력탄과 화탄을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벽력탄은 몰라도 화탄은 전하께서 충분히 쓰실 수 있을 만큼 만들 수 있습니다.”
“그래.”
그의 얼굴에 흡족한 웃음이 지어졌다.
“그래. 그렇구나. 너는 참으로 영특하고 좋은 재주를 가졌구나. 그런 너를 잃는다면 정말 괴롭고 마음이 아프겠지. 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도 없는 일이고.”
태자는 가볍게 말하더니 밖에 있던 무인을 불러들였다.
“이 자의 다리를 자르거라. 두 개를 각자 다른 길이로 남겨라. 하나는 무릎 위에서 자르고 하나는 무릎 밑에서 잘라 두 손으로 바닥을 짚고 끌고 가는 것도 힘들게 해라.”
“예. 전하.”
표정이 없는 무인은 그 자리에서 명을 수행했다.
폭천의는 미친 듯이 비명을 질렀지만 다리를 잘리기 전에 아혈을 짚이는 바람에 소리가 나오지도 않았다.
“출혈을 멈추어라. 이제부터는 좋은 것을 먹이고 아주 잘 대해 주도록 하여라. 우리에게는 아주 소중한 사람이니 말이다.”
“예. 전하.”
폭천의의 정신이 아득해지려 했지만 무인이 눈앞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을 텐데?”
그 말에 폭천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친 듯이.
“피, 피…… 필요한 재료들입니다. 이것들을…… 이것들을 가져다주시고, 그리고 이것을 만들 수 있는…….”
폭천의의 입에서 의미를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이 쉬지 않고 쏟아져 나왔다.
* * *
태자는 오랜만에 아주 기분이 좋아진 채로 외조부를 찾아갔다.
이제 종이호랑이가 되어 버린 연석영은 태자의 방문이 반가웠다.
“태자 전하. 이곳에는 어인 일이십니까.”
그는 태자 때문에 겨우 목숨을 건졌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황제가 설마하니 그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지만 그래도 태자에 대한 마음은 아직 남아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간신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던 것이다.
태자는 손을 내저었다.
쓸데없는 말로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는 듯했다.
태자가 어디 그런 자이던가.
연석영의 눈에 들기 위해 몸을 움츠리고 힐끔거리고 표정을 살피기에 바빴던 그가 아니었던가.
연석영은 태자의 변화를 느끼며 화가 나기보다 오히려 좋았다.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렇게 나오는 걸까 했던 것이다.
분명 믿을만한 것이, 그리고 자랑할만한 것이 생겼으니 그럴 거라고 생각했기에 기쁘기까지 했다.
“외조부님. 저를 도와주셔야겠습니다.”
“말씀만 하십시오. 이 할애비가 할 수 있는 것이 아직 많습니다.”
그러자 태자가 그에게 조금 몸을 숙이며 말했다.
“폭천의라는 자에 대해 제가 말씀드린 것을 기억하십니까.”
“예. 전하. 그 건방진 자가 감히 도망쳤다고 하지 않으셨는지요.”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자가 지금 제 저택에 있습니다.”
“……예?”
연석영은 영민한 자였다.
그는 온갖 계략을 한 번에 십 수 개나 만들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자가 어떻게…… 혹시 벽력탄을 갖고 있었습니까. 전하.”
“아니요. 화탄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사흘 후에는 만들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필요한 재료가 있다고 해서 사람들을 보내 그것들을 구해오도록 했습니다.”
“그렇군요. 제가 그 일을 도울 수 있을 듯합니다. 전하. 그런 것을 다루는 자들을 좀 알고 있습니다.”
“잘됐군요. 그런데 그 전에 외조부께서 해 주셨으면 하는 일이 있습니다.”
“무엇인지요. 전하.”
연석영은 태자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전혀 알지 못한 채 물었다.
“제가 키웠던 자들이 몰살을 당하였습니다. 오악만이 폭천의를 데리고 돌아왔는데 오악은 제가 죽였습니다.”
“……그러셨군요.”
그것은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라서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전에는 부황 폐하께서 저를 잡아 오라고 명을 내리셔도 믿을 수 있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자들이 목숨을 걸고 저를 지켜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들이 금의위와 황군을 상대하는 동안 도망갈 방책을 준비해 두었다는 이 말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자들이 사라졌습니다. 실패할 줄은 모르고 반드시 성공하고 오라는 뜻으로 정예들로만 추려 보낸 게 이리되었습니다.”
“예…… 남은 자들은…….”
“남은 자들은 쭉정이들입니다. 그자들에게 제 목숨을 맡길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그러니.
그러니, 라는 말을 들었다고 그렇게 소름이 끼칠 수도 있는 것인가.
그런데도 연석영은 숨도 제대로 삼킬 수가 없었다.
‘아니다. 내가 생각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고작 믿을만한 사람을 좀 내어 달라는 정도겠지.’
그런데도 이상하게 불안했다.
그리고 그 말이 들려왔다.
“부황 폐하를 죽여 주십시오. 오늘 밤 말입니다.”
“……전하.”
“오늘이어야 합니다. 오악이 말하기를 폭천의가 있던 곳에 서도진이라는 자가 스승과 제자를 데리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자에게 모두가 죽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제 사람들도 약하지는 않았습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알다마다요.”
“그러니 서도진도 지금은 싸우기에 적합한 상태가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부황 혼자라면 무서워할 것이 없습니다. 항상 부황의 곁에서 부황을 돕는 자들이 문제였지요. 그러니 오늘 밤이어야 합니다.”
“전하. 그것은 전하의 염려가 과하신 것 같습니다. 그자가 여기에 와서 뭘 어쩌겠는지요.”
“아닙니다. 그렇게 한가한 소리를 할 때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태자는 제정신이 아닌 듯 말이 이리저리 오락가락했는데 그 와중에 진실에 근접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연석영은 태자의 청을 물리치지 않았다.
그의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연석영은 지금 하월이 궁에 없다고 알고 있었고 수족처럼 쉽게 부릴 수 있는 사람 하나가 사라진 것이 얼마나 큰 결과를 초래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왜 성공하지 못 했냐고 하지는 못하겠지. 그 일이 그렇게 간단하게 되는 일은 아니니 말이다.’
연석영은 그러면서 머릿속에 계획을 세웠다.
동창 제독이라면 자신이 내민 손을 잡아 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그의 검미에 깊은 주름이 생겼다.
이전에는 여러 번 따질 것도 없이 간단히 수족 부리듯 부릴 수 있는 자들이 많았는데 황제가 판도를 뒤흔들어 버리는 바람에 그 후에는 사정이 너무 많이 변했다.
“그러면 돌아가서 기다리고 계시지요. 전하. 일을 마치고 할애비가 그곳으로 가겠습니다. 폭천의라는 자가 얼마나 대단한지 할애비도 한번 보고 싶군요.”
“기대하셔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면 외조부님만 믿고 가겠습니다. 내일부터는 다른 걱정을 하지 않은 채 눈을 뜰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연석영은 그것이 태자의 진심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전하. 그 일이 성공한다면 전하께서는 이제 만인의 위에 홀로 서시게 되는 것입니다.”
“…….”
태자는 그 생각은 하지 않은 것처럼 연석영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그 생각은 다음에 천천히 하겠다는 것처럼 귀찮다는 표정을 지었다.
연석영은 그 얼굴을 보고 웃었다.
기대하지 않았던 개가 희한한 걸 물어온 것 같아서.
계획에 흠은 없는지 살피기에는 시간이 많이 부족했지만 태자가 한 말 중에 중요한 것들은 거의 나온 것 같았다.
연석영은 상당히 신중한 성격이지만 몇 번은 무모할 정도로 과감하게 굴곤 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그는 모두 성공을 거두었다.
그때 그가 조금만 시간을 지지부진하게 끌었다면 그는 지금 이 자리에 있지도 못했을 터였다.
지금 연석영의 본능이 그에게 속삭이고 있었다.
지금이 그때라고.
황제의 서거.
그 울림이 얼마나 감미롭고 흥분되는지 그는 잠시 몸서리를 쳤다.
* * *
태자가 바람을 일으키며 분주히 돌아다니고 있을 때 북궁세가주는 암천대문이 시킨 일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가 연석영의 저택에 잠입했을 때 그곳은 거의 텅 비어 있다시피 했다.
연석영은 태자가 하는 말이 상당히 그럴 듯하다고 생각했고 폭천의가 태자의 수중에 있기만 한다면 벽력탄과 화탄의 재료를 구하는 것만큼 급한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가솔의 대부분을 밖으로 내보내 폭약의 재료가 되는 것들을 사도록 했다.
그렇게 암천대문과 황제의 계획에 갑작스러운 변수가 생겼다.
북궁세가주는 빈집에 들어가 성과 없이 돌아가야 했고 면목이 서지 않는 얼굴로 암천대문에게 그 소식을 전했다.
암천대문은 표정을 관리한 채 북궁세가주와 헤어졌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불길한 기운이 꿈틀거렸다.
일이 잘되려면 우연에 우연이 겹치면서 일이 되는데, 일이 안 되려고 하면 온갖 것이 다 꼬여서 실패라는 결과를 만들어 냈다.
‘이번에는 하늘이 우리를 돕지 않는 것인가? 운이 다한 것인가?’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들려는 것을 억지로 털어 버리려 했지만 쉽지가 않았다.
암천대문이 황제에게 그 소식을 전했을 때 황제 역시 비슷한 생각을 했다.
“그래. 알았다.”
황제의 말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괜히 불안해하는 것이다. 아진이 이런 일이 없어서 더 불안하고 초조해진 것뿐이다. 결국 아무 일도 생기지 않을 것이고 아진도 여느 때처럼 짐의 곁으로 올 것이다.’
하월은 내공을 완전히 회복하지는 못했지만 계속 운기조식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 듯했다.
그는 자기가 황궁에 돌아온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는 게 좋겠다면서 밖을 좀 돌아다니다 오겠다고 했고 황제도 그러는 게 도움이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하월과 선 부정이 있으니 괜찮을 것이다.’
황제는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며 서탁 앞에 앉았다.
* * *
하월이 밖으로 나간 것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이며 황상의 곁이 비어 있지 않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함이었지 결코 동창 제독에게 명령을 듣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러나 일은 그렇게 되었다.
하월은 난감함을 감추지 못했지만 동창 제독의 부름을 거절할 수도 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 일단 가기는 하되 그가 시키는 것은 거절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하월이 동창 제독의 앞으로 나갔을 때 동창 제독이 웃음 가득한 얼굴로 그를 맞았다.
“어서 오게. 일찍 다시 보게 돼서 좋군. 그렇지 않아도 북궁 태감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 생겨서 고민이 많았는데 말이네.”
하월이 오늘은 임무를 수행할 수 없겠다고 말을 하려고 하는데 그가 조금 더 빨랐다.
“이리 와서 앉게. 오늘 이 자리에 있게 된 것을 가문의 영광으로 알게 될 날이 올 것이네. 나에게 두고두고 고마워하게 될 거야. 자네도 북궁세가도 내 은혜를 잊지 못한다고 말하게 될 거네.”
그러고 보니 늘 그의 곁을 지키던 사람들조차 보이지 않았다.
동창 제독은 의심이 많은 자였고 누군가를 믿는 것 같으면서도 자신의 안전은 스스로 지켰다.
그런데 지금은 공간 안에 오로지 동창 제독과 하월만 있었던 것이다.
“무슨 일인데 그러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