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0화
310화
-궁 밖에서 사고를 일으키고 원래 폐하의 곁을 보필하던 자들을 그 일의 처리에 투입하시면 어떨지요. 폐하. 그러면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다른 이들이 이동하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일 것입니다.
암천대문의 말에 황제의 얼굴에도 밝은 빛이 떠올랐다.
-사고라면 어떤 것이 좋겠느냐.
-황후 마마의 사가에 살수가 침입하는 것으로 하시면 어떨지요. 폐하. 대낮에 살수가 침입하는 일이 생기고 폐하께서 염려되시어 금의위를 황후 폐하의 사가로 보내 주시는 것으로 하시는 것입니다. 기한은 흉수의 배후를 밝힐 때까지로 하시면 시간과 명분은 충분할 것입니다. 폐하께서 황후 마마의 사가에 있던 사병의 대부분을 해산시키셔서 여러모로 이유는 충분할 것입니다.
-그래. 그리해야겠다. 살수를 동원할 수 있겠느냐.
평소 같았다면 선이남이나 남이천에게 시켰을 일이었다.
암천대문도 지금 황제가 자기에게 엄청난 일을 맡기는 거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감격스러운 마음은 거의 없고 부담만 컸다.
그러는 동안에도 암천대문의 머리가 비상하게 돌아갔다.
살수단은 믿을 자들이 못 되었다.
더군다나 일이 지금처럼 돌아간다면 상황이 급변한 후에 스스로 황후를 찾아가 자백해 버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명예라는 것도 일단 자기 목숨이 붙어 있어야 생각할 수 있는 게 아니겠는가.
암천대문이 쉽게 답을 찾지 못하는 동안 황제 역시 적당한 사람을 떠올려 보았다.
그러나 누구를 떠올리더라도 마음이 놓이질 않았다.
-폐하. 이 일은 북궁세가주에게 맡겨보시는 것이 어떻겠는지요. 가주라면 지금 하월 공자가 폐하의 총애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고 태자 전하가 반역을 획책한다면 북궁세가의 안위를 장담할 수 없을 거라는 것을 알 것입니다. 지금 북궁세가주에게는 사람들의 이목이 그리 집중된 편도 아니니 조용히 접근하는 것도 어렵지 않을 듯합니다.
-그래. 좋은 생각이다. 암천대문. 너의 재주가 다른 곳에 있었구나.
황제의 치하를 받았지만 암천대문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과연 자기가 그 일에 성공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나마 그에게 어떤 상황에서도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다행이었다.
-그러면 먼저 가주를 만나보고 다시 오겠습니다. 폐하.
-그래. 몸조심하여라.
-예. 폐하.
이런 일을 맡으면 벅차고 감격스러울 줄 알았는데 웬일인지 자꾸 눈에 습막이 맺히려 했다.
황제와 전음을 나누는 사이인 사람들이 부러웠는데 그게 그렇게 부러워할 일이 아니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냥 자기는 멀리서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으며 정보를 모으고 전달하고 분석하는 일이나 하는 게 적성에 맞았다.
어느 정도는 위험 부담을 안고 있었지만 이렇게 한순간에 최전선으로 확 내몰리는 느낌을 받지는 않았는데 아무래도 일이 잘못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암천대문는 자신의 표정이 이상하게 보이지 않게 주의하며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가 마침내 궁을 떠났다.
그가 탄 마차가 은밀히 북궁세가로 향했다.
* * *
암천대문은 북궁세가의 위사들에게 다가갔다.
“가주님은 안에 계십니까.”
그들은 암천대문의 관복을 알아보고 정중하게 그렇다고 말했다.
“황상 폐하의 명으로 왔습니다.”
암천대문은 싱글벙글했고 그의 손에는 좋은 비단으로 싼 커다란 상자가 들려 있었다.
황상이 선물을 내렸나보다고 생각하며 위사들의 표정도 밝아졌다.
세가가 이대로 몰락해 버리는가 했는데 끝이라고 생각된 순간마다 세가는 기어이 다시 일어서며 버텼다.
세가의 사업도 만전을 시작으로 나날이 부흥하는 중이라 세가의 분위기도 좋았다.
“따라오십시오. 가주님은 가주전에 계십니다. 제가 안내하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암천대문은 위사를 뒤따랐고 곧 가주전에 안내되었다.
가주전을 지키던 무사가 소식을 전해 듣고 다시 암천대문을 가주에게 데려갔는데 그러는 동안 암천대문은 가주에게 할 말을 준비해 두고 있었다.
“어서 오시오.”
가주는 궁에서 환관이 나왔다는 말을 듣고 그를 맞이했다.
“황상께서 보내셨다고 들었소.”
가주는 빨리 이야기를 듣고 싶었는지, 재촉하듯 말했다.
“그렇습니다.”
가주의 눈은 민망하게도 자꾸만 암천대문이 가지고 있는 상자로 향했다.
선물이 탐나거나 궁금한 것은 아니었지만 시선이 저절로 그리로 향했던 것이다.
그러자 암천대문이 그것을 그 자리에서 풀었다.
“이것은 빈 상자입니다. 가주님. 가주님에게만 전해야 할 황상 폐하의 전언이 있어 세가 무인들의 의심을 피하려고 들고 온 것입니다.”
빈 상자를 보았지만 가주의 눈은 그때에야말로 더욱 빛을 발했다.
그의 눈에서, 다 숨길 수 없는 기대감이 들여다보였다.
황상이 자기를 믿고 중대한 일을 맡기려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무엇인지 편히 말씀해 보시오.”
“예. 황상께서는 가주님의 의중을 알고 싶어 하십니다. 황상께서는 아직 구문제독의 자리에 새로운 사람을 내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지금 그 자리에 앉은 사람도 대행이자 임시라는 인식이 강하고 말입니다. 가주님은 이미 그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신 바도 있고 자격이 있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가주는 그것이 암천대문의 머릿속에서 즉흥적으로 나온 이야기라는 것은 알지 못한 채 놀라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 황상의 신임이 아직 자신을 떠나지 않은 것인가 하면서 암천대문의 말을 기다렸다.
“지금 폐하께서 가장 신임하는 사람 중 한 사람은 하월 공자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월 공자는 가주님과 사이가 좋지 않고 그래서 폐하께서는 가주님의 중용을 쉽게 결정하지 못하고 계십니다.”
그런 이야기가 오갔는지는 몰랐지만 만약 다시 자기에게 기회가 주어진다면 가주는 명예를 걸고 일을 제대로 성공시켜 볼 의지가 있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가주님.”
“폐하께서 그 일로 보내셨다는 것인가요? 이것이 폐하의 뜻인지 묻는 거요.”
“그렇습니다. 그리고 만약 가주님이 그 일을 좋게 여긴다면 폐하께서는 징표를 보고 싶어 하십니다.”
“징표요? 징표라면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인지…….”
“가주님이 폐하께 충성을 바칠 거라는 것을 증명하라는 것이 아니겠는지요. 가주님은 폐하보다 황후 마마와 더욱 가깝게 지내셨으니 그게 폐하께는 단점으로 여겨지실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소.”
“이것은 순전히 제 생각입니다만.”
암천대문이 그를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
“지금 황후 마마의 사가는 경비가 허술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설마 그곳을 공격하라는 것이오?”
“보여주기로는 충분할 것입니다. 가주님이 황후 마마가 아니라 폐하의 충신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허나 그 사실을 폐하께서 어찌 아신다는 말이오.”
“가주님께서 계획을 실행하겠다고 마음을 굳히시기만 하면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가주의 눈이 가늘어졌다.
“사실 가주님께는 선택의 여지가 없기도 합니다. 지금 황제 폐하는 황후 마마에게 근신을 명하셨지만 그래도 폐위를 하지는 않으셨습니다. 태자 전하도 계속 그 지위를 유지하고 계시지요. 지금과 같이 진행된다면 결국 황후 마마의 장자이신 태자 전하가 황위를 물려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때 북궁세가가 어떻게 될 것 같으신지요. 그들은 하월 공자와 가주님을 떼어 놓고 북궁세가를 대하지 않을 것입니다.”
가주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가 먼저 손을 쓰지 않으면 그가 당하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살수를 쓰는 것이 좋겠소?”
가주가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그자들을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만약 일이 잘못된다면 가주님과 북궁세가 뿐만 아니라 하월 공자님도 위험해지고 그러면 황제 폐하의 안위까지 위태로워질 수 있습니다. 그 무도한 자들이 어떤 일까지 벌일 수 있을지 생각하셔야 합니다.”
가주는 하월의 역할이 그렇게까지 크다는 건가 하면서 더욱 신중하게 생각했다.
“알겠소. 그러면 그 일은 내가 직접 하겠소. 북궁세가가 과거와 달라졌다고는 하나 아직 죽지 않았소.”
“가주님의 충심을 폐하께서 아실 것입니다.”
“혹시 내가 이 일을 서둘러야 하는 거면 알려 주시오.”
황궁 돌아가는 사정과 황상의 마음은 그가 더 잘 알 거라는 생각에 한 말이었는데 암천대문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을 늦추지 않는 것이 좋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내일도 오늘과 상황이 같으리라는 보장은 없으니 말입니다.”
“알겠소. 어차피 마음만 정한다면 어려울 것은 없소.”
“그러면 오늘은 어떠신지요. 밤을 틈타지 말고 대낮에 일을 벌이면 그들은 더욱 불안에 떨 것입니다.”
“그러겠소.”
그 말을 한 사람이 암천대문이 아니었다면 가주는 그렇게 쉽게 움직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가주는 암천대문이 황제와 가까이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몇 번 본 적이 있었고 그때마다 그를 향한 황제의 신임이 두텁다는 것을 어느 정도 느껴왔었다.
그런데도 그가 황제의 총애를 받는다는 사실을 내세워 권력을 휘두르려고 하지도 않았기에 그의 말에 상당히 믿음이 갔다.
이야기를 마치고 북궁세가를 떠난 암천대문은 옷이 전부 땀으로 젖어 버린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공자님. 공자님이 빨리 올라오시면 안 되는지요? 공자님이 계시면 일을 이렇게 복잡하게 하지 않아도 될 텐데요.’
암천대문은 거의 울먹거리면서 아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언제나 굳건한 산성 같던 아진이 내공 때문에 하월과 같이 오지 못했다는 말은 그에게 큰 충격을 안겼다.
태양은 언제나 천공에 있을 거라는 믿음이 흔들리는 것처럼 언제나 변하지 않는 진실일 줄 알았던 것이 흔들리고 있었다.
* * *
폭천의가 객잔에서 일으킨 일이 많은 계획을 어그러지게 했다.
폭천의가 복면인들을 모두 날려 버린 것을 알게 된 남자는 그의 수혈을 짚고 붙잡아 태자에게 돌아갔다.
가는 동안 그가 느낀 놀라움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서도진 일행의 무위를 가까이서 확인하고 그렇지 않아도 충격을 받았는데 이제는 전멸이라니.
작전을 위해 투입된 사람 중 살아남은 사람이 자신뿐이었던 것이다.
그들 중 그런 결과를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태자의 눈에 들어 그가 주는 영약과 비급으로 수련을 하면서 그들이 생각한 것은 태자가 황위에 올랐을 때 태자와 함께 새 세상을 나눠 갖는 거였다.
태자는 어떤 생각을 하면서 그들을 키웠을지 몰라도 힘을 가진 사람은 그들이었다.
압도적인 힘을 가진 한, 태자가 그들을 발아래에 엎드려 있게 만들려 한다고 해도 그게 생각만큼 쉽지는 않을 터였다.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것이 아니라는 것처럼 그들은 태자가 순탄하게 황위에 오를 경우에만 그와 함께할 생각을 갖고 있었다.
고된 수련을 하면서 서로를 동문이라고 여기던 그들은 어느덧 그런 생각까지 전부 알게 되었고 친형제보다 더 뜨거운 우애를 지녔다.
그런데 그들이 모조리, 단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그는 폭천의를 죽여 버리고 싶은 것을 가까스로 참으며 태자의 저택으로 들어섰다.
신법을 전개해 곧바로 태자의 처소로 들어선 그를 보며 태자가 놀라움을 감추지 않았다.
“오악. 이제 돌아왔느냐.”
태자의 눈은 폭천의에게 향해 있었다.
오악.
태자의 명으로 수련한 이들은 이름 대신 그렇게 불렸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이냐. 폭천의는 일악이 데려오기로 하지 않았느냐.”
“모두…… 죽었습니다. 전하.”
오악 이추원은 말을 하고 입술을 짓씹었다.
폭천의를 보자 다시 살의가 피어났다.
“그게 무슨 말이냐.”
그러나 태자는 이추원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호기심으로 눈을 빛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