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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309화 (309/470)
  • 제309화

    309화

    “신경 쓸 것 없다. 식사를 하러 온 게 아니야. 장소가 필요해서 온 것뿐이지.”

    수장의 말에 객잔 주인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 방으로 안내해 드릴까요?”

    “아니다. 그럴 필요가 있겠느냐. 어차피 이곳에 있는 건 너 혼자가 아니냐.”

    “그렇…… 습니다만.”

    객잔 주인은 그가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는 건지 알지 못한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높은 사람들은 말귀를 한 번에 알아듣지 못하면 화를 냈는데 자기가 생각해도 자기가 지금 말귀를 너무 못 알아듣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면 여기에서 너만 없으면 우리가 굳이 방으로 올라갈 필요가 없는 게 아니냐는 뜻이다.”

    수장의 말에 수하의 검이 반짝이다 거두어졌다.

    “……!”

    폭천의는 설마하니 그들이 그 자리에서 살인을 저지를 거라고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순식간에 가슴팍이 갈라진 객잔 주인은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한 채 쓰러졌다.

    “……!”

    폭천의는 쓰러지는 남자와 눈이 마주쳐 버렸다.

    그 눈빛이 소름 끼치게 계속 뇌리에 각인되어 버려 폭천의는 화가 났다.

    그는 더 이상 생각을 깊이 하지 못했다.

    ‘지금이다!’

    그곳에 있던 이들의 시선이 일시에 객잔 주인에게로 쏠렸다.

    이렇게 조용한 공간에서 갑자기 벌어진 타인의 죽음은 잠깐이라도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폭천의는 제 고간에 손을 집어넣어 허벅지 상단에 천을 둘러 묶어 두었던 목함을 꺼냈다.

    목함을 꺼내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밀봉을 뜯는 동안 그의 대각선 방향에 있던 자와 눈이 마주쳤다.

    폭천의의 바지가 조금 내려가 있었고 다리는 엉거주춤하게 벌어져 있었다.

    그는 무슨 일인가 하는 듯 폭천의를 보다가 폭천의가 들고 있는 목함을 발견했다.

    아주 잠깐 그의 사고가 정지된 듯했는데 폭천의에게는 그것이 하늘이 준 기회나 마찬가지였다.

    폭천의는 머리가 땀으로 흥건히 젖는 것을 느끼며 밀봉을 뜯고 목함을 힘껏 열었다.

    그때는 다른 이들도 폭천의를 바라보았다.

    그의 동작이 워낙 크기도 해서 이제는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어려웠을 터였다.

    폭천의는 벽력탄을 꺼내 불을 붙였다.

    린린이 화섭자에까지는 손을 대지 않은 것이 그에게는 천만다행이었다.

    “저, 저놈을 붙잡아라!”

    폭천의가 뭘 하려는 건지 깨달은 수장이 소리쳤지만 폭천의가 아주 조금 더 빨랐다.

    사람들은 벽력탄에 불이 붙는 것을 보았다.

    아무리 화섭자라고 해도 그렇게 빨리 불이 붙을까 했지만 폭천의의 화섭자는 보통의 것이 아니었다.

    폭천의는 그것을 만든 저 자신을 칭찬해 주고 싶어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제 미래가 어떻게 될지 몰라 걱정하며 눈치를 보던 폭천의가 의기양양하게 그들을 바라보며 힘껏 벽력탄을 던졌다.

    수장이 폭천의를 잡으라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는 것을 직감한 몇몇 사람들은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것은 수장도 마찬가지였다.

    폭천의가 만든 벽력탄은 약간의 변형을 거친 형태였다.

    폭천의 자신이 내공이 많거나 무공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닌데 벽력탄을 던지고 미처 피하지 못하고 벽력탄에 휘말리게 되면 그 자신도 목숨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벽력탄이 효과를 미치는 방향을 정해 두었던 것이다.

    그때부터 폭천의는 강 건너 불구경하는 심정이 되어 벽력탄이 일으킨 재앙을 구경할 수 있었다.

    자신의 안전을 확신한 채.

    객잔은 형체도 없이 사라졌고 휑한 하늘이 드러났다.

    천지가 요동치고 일대의 수십 리가 폭삭 가라앉았다.

    도망치던 이들은 벽력탄이 터지며 날아간 철환에 찢겨 나간 채 몸이 잠깐 떠오르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러다가 그대로 끝도 없는 심연에 내동댕이쳐지는 것처럼 몸이 한없이 가라앉았다.

    단단하게 지탱해줄 거라고 생각하며 밟았던 얼음판이 깨져나간 것처럼, 바닥이 사라진 듯 느꼈던 것이다.

    한 사람의 몸을 관통하고 날아간 철환이 보통 서른 개는 넘었다.

    그것이 상상할 수 없는 속도로 몸의 각 부위를 찢은 채 뚫고 날아갔으니 통증은 상상할 수가 없었다.

    몸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보는 것도 두려워 차마 고개를 숙이지도 못했다.

    피가 아닌 무언가가 자꾸만 흘러내리는 느낌이 들었다.

    살점이었다.

    어디에서 떨어져 나간 것인지도 알지 못했다.

    “으으으으…….”

    태어나서 그런 공포를 느껴본 적이 있었을까.

    몸이 타는 듯이 뜨거웠다.

    이제 그들이 소망할 수 있는 것은 빨리 이 고통을 벗어나 죽는 것뿐이었다.

    우연히 고개를 돌렸다가 비슷한 일을 당한 동료의 모습을 본 이들은 그대로 절망했다.

    철환이 뚫고 지나간 자리에서 찢어진 내장이 흘러나와 줄줄 흐르고 몸이 갈가리 터져나갔다.

    유한한 존재로 태어난 이상 언젠가 죽음을 맞이하게 될 거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하니 이런 죽음을 맞이할 운명이라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한 바였다.

    폭천의는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태양이 지평선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이제는 그런 광경도 눈에 들어왔다.

    ‘금방 죽을 운명은 아닌 모양이야.’

    폭천의는 웃음을 짓고 천천히 돌아섰다.

    그가 생각하지 못한 것은 벽력탄이 폭발하는 동안 안전지대에 있었던 사람이 그 혼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이었다.

    일행이 자리에 앉아 객잔 주인과 얘기를 하는 동안 그대로 방에 들어가 상처를 살피고 금창약을 바른 후에 혼자 붕대를 감고 내려온 동료가 있었지만 폭천의는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

    “…….”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폭천의는 기가 막혔다.

    온갖 맹수를 다 처치하고 의기양양하게 돌아섰는데 또 다시 미친 쥐에게 걸려든 것 같은 형국이었다.

    폭천의가 도망치려는 찰나, 지풍이 날아와 그의 수혈을 점했고 폭천의의 탈출 시도는 허망하게 막을 내렸다.

    * * *

    황궁으로 가는 동안 아진은 아직 늦지 않았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폭천의를 데려간 자들이 자기들보다 빨리 도착하지는 않았을 테니 아직은 시간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도 될 것 같기는 했다.

    그러나 문제는 소모된 공력이었다.

    아진이 조금씩 뒤처진다는 것을 깨달은 하월이 근심스러운 얼굴로 먼저 멈췄다.

    아진은 웬만하면 그를 따라가고 싶었지만 이런 일은 아진에게도 낯설었다.

    “서 공자님. 아무래도 몸에 계속 무리가 생기는 것 같습니다. 마을에서 죽었던 사람들이 그냥 단순한 부상으로 죽은 것도 아니고 시신의 조각을 맞추는 것도 어려울 정도가 아니었습니까. 사람을 살리는데 필요한 공력이 다 같은 것은 아닌 것 같고 그들을 살리는 데는 훨씬 많은 공력이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아진도 하월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흑주가 계속해서 그에게 내공을 불어넣어 주고 있었지만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제가 먼저 가겠습니다. 지금이라면 늦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황상께 말씀드리겠습니다. 대비한다면 최악의 상황은 막을 수 있을 겁니다.”

    하월의 말에 아진도 더 이상 고집을 부릴 수가 없었다.

    자기가 하월의 발목까지 잡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럼 부탁하겠습니다. 하월 공자. 나도 곧 따라가겠습니다.”

    “서두르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진 공자가 다시 모든 힘을 되찾은 채로 돌아온다면 상황은 얼마든지 뒤집힐 겁니다. 그러니 회복에만 전념하도록 하십시오.”

    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을 한 명이라도 더 데려오는 게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다시 그 시간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그는 같은 결정을 내렸을 것 같았다.

    산본의가의 누구도 잃고 싶지 않았고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기에 그곳에 더 많은 전력을 배치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월은 아진을 한 번 바라보고 그대로 몸을 날렸다.

    객잔보다는 차라리 산에 들어가 동굴 같은 곳에서 운기조식을 하는 게 안심이 될 것 같아 아진은 적당한 장소를 찾았다.

    “흑주야. 이번에는 너에게 많은 걸 맡겨야 할 것 같다.”

    늘 자신만만하고 활기찬 흑주였지만 그때는 상당히 부담을 느끼는 것 같았다.

    아진은 동굴을 찾아 깊숙이 들어갔고 그때부터 운기조식을 시작했다.

    흑주는 이제야말로 아진의 안위가 오로지 자기에게만 달렸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그 옆을 지켰다.

    어두운 동굴에 오직 흑주의 빛만이 퍼져나가고 있었다.

    ‘잘되겠지. 모두 무사하겠지. 너무 늦은 건 아니겠지.’

    아진은 좋지 않은 상념이 떠오르려 하는 것을 애써 털어 내며 정신을 집중했다.

    * * *

    하월이야말로 죽을 것 같았다.

    그러나 자기가 멈추면 안 된다는 생각에 단전에서 엄청난 통증이 느껴지는 것을 무시하며 경공을 전개해 나갔다.

    내공은 거의 바닥을 드러내는 것 같았다.

    그렇게 그가 황궁에 도착해 황제의 앞에 섰을 때 하월은 벅찬 마음에 눈물을 흘렸다.

    황제는 오랫동안 하월을 봐 왔지만 그가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황제와 함께 있던 선이남 역시 당황했다.

    “하월 공자.”

    “폐하. 폭천의를 놓쳤습니다. 복면인들이 나타났는데 그자들이 폭천의를 데려갔습니다. 그자들은…… 태자 전하의 사주를 받고 온 자들이었습니다. 태자 전하가 황궁 비고의 영약과 무공 비급으로 몰래 키운 자들이었습니다.”

    하월은 황제의 표정이 급격히 변해 가는 것을 보았고 그의 얼굴에 수많은 의혹이 떠오른다는 것을 알았지만 일단은 자기가 전해야 할 것을 전하고 내공을 회복하는 것이 급했다.

    황제도 그 사실을 알았기에 하월이 말을 하는 동안 그를 막지 않았다.

    “폭천의에게 벽력탄이 있느냐.”

    “그건 전부 서 소저가 없앴습니다만 폭천의가 벽력탄을 만드는 방법을 알고 있으니 앞으로 태자 전하가 그것들을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입니다.”

    황제는 선이남과 눈빛을 교환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하월. 수고했다. 네 몸의 회복에 먼저 집중해라. 선 부정. 하월이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 호법을 서거라.”

    “예. 폐하.”

    황제 자신이 위험에 처한 상황이었지만 황제는 자기가 가장 믿을 수 있는 선이남을 하월에게 내주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서 밖으로 나갔다.

    향화문을 통해 소식이 아무리 빨리 전해졌다고 하더라도 암천대문에게까지 전해지지는 않았을 것 같아서 황제는 은밀히 그를 찾아 나섰다.

    암천대문은 황제가 갑자기 자기를 찾았다는 사실에 무언가 일이 생긴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지금부터 짐을 위해 해 주어야 할 일이 있다.

    황제는 처음부터 전음을 보냈다.

    암천대문은 긴장감을 감추지 못한 채 황제의 말을 기다렸다.

    황제는 하월이 전한 말을 해 주었고 암천대문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향화문의 부문주격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으로서 감정을 숨기는 일에는 이골이 난 그였지만 아무리 그런 암천대문이라고 하더라도 표정을 숨기지 못할 정도로 그 일은 너무 충격적이고 중차대했다.

    -짐을 위해서 은밀히 사람을 모으거라. 짐이 믿었던 사람 중에 태자에게 가담한 이들이 얼마나 되는지 짐은 알지 못한다. 혈천방과 비룡채, 산본무관의 사람들에게 짐의 신변을 맡기고 싶다만 그들이 이동한 것을 태자가 알게 된다면 짐이 사실을 알아차렸다는 걸 알고 일을 서두를 수도 있겠지.

    황제 자신도 아직 용단을 내리지 못한 상태에서 암천대문에게 의견을 구하고 있는 거였다.

    암천대문은 좋은 생각이 나기를 바랐지만 그런 쪽으로는 머리를 굴려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다 암천대문이 눈을 빛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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