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러, 의선되다-306화 (306/470)

제306화

306화

“그래도 혈교주보다는 폭천의일 가능성이 크기는 할 겁니다. 혈교주가 폭천의의 화탄을 손에 넣었다고 보기는 어렵지 않은지요.”

하월이 말하자 모두 고개를 끄덕였고 독고소영의 입에서는 작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혈교와 폭천의를 상대하는 것도 벅찰 텐데 이제는 태자 전하까지인 건가? 혹시 태자 전하의 배후에 황제 폐하까지 계신 거라고 생각해야 하는 건 아니겠지?”

사람들은 그런 일은 상상도 하고 싶지 않은 듯 격렬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건 절대 아닐 겁니다. 사고님. 만약 그런 거라고 한다면 폐하께 이유가 있을 거고 만약 그 이유가 타당하지 않다면.”

아진은 거침없이 말을 하다가 갑자기 정신이 든 듯 입을 다물었다.

자신의 생각은 분명히 정해져 있었다.

만약 그 이유가 타당하지 않으면 황제와 잡은 손을 놓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이 자리에서 말하는 것은 위험했다.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그의 말을 들은 사람들이 그 이유만으로 위험에 처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다른 이들도 아진이 왜 거기에서 말을 멈췄는지 이해했다.

“우선은 폭천의를 찾는 게 급하겠습니다. 폭천의가 다른 곳에서 이런 짓을 저지르지 못하도록요.”

아진이 말하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왜 폭천의 혼자만 돌아다니는 거지? 다른 혈교도들은 같이 움직이지 않은 것 같잖아?”

린린은 마을 사람들의 증언에 주목하며 말했다.

“폭천의가 혈교도와 같이 활동을 하지 않는 게 우리에게 잘된 걸까, 나쁜 걸까, 린린?”

아진의 말에 린린은 쉽게 대답을 하지 못했다.

웬만한 경우라면 생각할 것도 없이 당연히 잘된 거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폭천의가 혈교도와 절연하면서 지금처럼 고삐 풀린 듯 행동을 한다면 꼭 그렇게 말할 수만도 없을 듯했다.

* * *

폭천의는 동굴로 돌아갔다.

마을을 공격한 것은 단순히 물건을 약탈하려는 의미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자기가 만든 화탄의 성능을 확인하고 개선점을 찾으려고 한 거였는데 그의 눈에 부족한 것들이 많이 들어왔다.

‘화탄의 크기를 좀 더 키워도 될 것 같아. 그 정도로는 아쉬워. 뭐. 쥐도 많겠다. 동굴에서 조금 더 오래 머물면 되겠지. 고기는 맛이 없어도 당분간은 그걸로 연명하면서.’

당장은 괴롭겠지만 지금보다 성능이 두 배 정도 되는 화탄을 양산해 낼 수 있다면 웬만한 문파 위에서 군림하는 기분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때가 되면 벽력탄도 몇 개 정도 더 만들고 싶었지만 그건 화탄만큼 사용이 용이하지가 않았다.

그것은 피해 범위가 넓고 일단 한 번 사용하고 나면 세상이 떠들썩해질 터였다.

마차를 타고 산에 올라가는 것은 어차피 한계가 있었기에 폭천의는 마차를 숨길 만한 장소를 찾았다.

그는 온갖 낙관적인 상상으로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리고 그 생각이 옳다고 증명이라도 하듯, 그가 동굴 안으로 들어가자 수많은 쥐 떼들이 그의 앞으로 덤벼들었다.

“그래. 어서들 와라. 전보다 더 많아진 것 같은데? 다른 곳에 있던 놈들이 온 거냐?”

폭천의는 이번에도 전과 다름없이 쥐 떼를 해치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마을에서 화탄을 써서 모든 것이 불타고 생명을 잃고 쓰러지는 것을 보며 전능감에 도취해서 잠시 머리가 제대로 된 생각을 멈춘 것인지도 몰랐다.

그렇지 않았다면 다른 사람도 아닌 폭천의 자신이, 자기가 가진 힘이 아무 때나 나타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잊을 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돌을 집어 들어 쥐에게 던졌다가 쥐가 그것을 가볍게 피하고 오히려 폭천의의 얼굴을 향해 덤벼드는 바람에 경악했다.

마치 술기운이 확 사라지는 것처럼 정신이 들었다.

그는 다급하게 화탄을 꺼내 쥐들에게 던졌다.

그 아까운 것을 고작 쥐 따위에게 던져야 한다는 게 아쉬웠지만 일단은 살아서 그곳을 빠져나가야 했다.

그러나 쥐들은 그 작은 몸으로 이리저리 피해 다녔다.

보통 쥐들에 비해서나 큰 것이지 화탄으로 처리하기에는 애로사항이 많았다.

‘……!’

화탄을 던지면 쥐들은 그때만 도망쳤다가 화탄이 터지고 나면 다시 몰려들어 폭천의를 공격하려 했다.

‘쥐새끼들이 뭐가 저렇게 빨라?’

그의 머리에서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더 이상 동굴은 그에게 행운의 장소가 아니었다.

이곳의 포식자가 순식간에 바뀌어 있었다.

폭천의는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고 쥐들에게서 도망치려고 전력을 다해 달렸다.

어쩌다가 자기 신세가 그렇게 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이제 조금만 달리면 동굴 끝에 이를 터였다.

처음부터 동굴에 깊이 들어가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조금만 버티면 돼. 다 왔어, 폭천의!’

그는 자신을 다독이며 죽을 힘을 다해 달렸다.

그렇게 해서 마침내 동굴을 빠져나왔을 때 그는 벅찬 감격에 환호성이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그는 곧 자기가 얼마나 멍청한 생각을 했던 건지를 깨달았다.

쥐들이 그동안 동굴을 나오지 않고 동굴에서 모여 살았던 이유는 그게 편했기 때문이지 동굴 주위에 결계가 처진 것도 아니고 진법이 만들어져서도 아니었다.

쥐들은 폭천의가 동굴을 빠져나온 것과 마찬가지로 놈들 역시 동굴을 나올 수 있었다.

키, 카카카칵-!

끔찍한 소리가 들리더니 선뜻한 바람 소리가 귓가에 들려오고 그의 등에 날카로운 통증이 번졌다.

“으아악!”

한 마을에 사는 사람들을 전부 몰살하고 와서 이제 쥐에게 당해 쓰러질 지경이었다.

전자조차도 아진에 의해 결과가 달라진 것을 그가 알 방법은 없었다.

폭천의는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의 품을 더듬던 손에, 꼼꼼하게 밀봉된 작은 목함이 나왔다.

벽력탄.

아끼던 그것을 설마하니 쥐를 잡는 데 사용하게 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지만 지금의 폭천의는 그런 생각을 할 틈도 없었다.

천지가 울리는 것 같은 엄청난 폭음과 함께 주위의 모든 것이 요동쳤다.

두꺼운 나무들이 뿌리째 뽑혀 높이 솟구쳤고 뽑혀나간 바위는 돌가루가 되어 우박처럼 떨어졌다.

그 진동으로 산이 용트림을 하고 아래로, 아래로 꺼져 내려갔다.

폭천의는 이러다 자기도 죽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그때부터 그저 산에서 내려가기 위해서만 최선을 다했다.

무너져가는 산을 향해 다가오는 이들이 있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이만한 폭발이면 수십 리 밖에서도 알아차렸을 것이다. 사람들이 몰려들 거야!’

폭천의는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과거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전부 다 바꾸고만 싶었다.

‘말도 안 돼. 이건 말도 안 된다!’

눈물이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

벽력탄 하나가 아까운 것이 아니었다.

당연히 아깝기야 하지만 자기가 저지른 멍청한 짓 때문에 화가 나는 것에 비하자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잘못된 결정은 아니었다.

동굴에 살던 쥐가 화탄을 만드는 재료로 적합했고 그것들을 다시 잡으려고 돌아온 거였으니까.

‘그놈들 때문이야. 그 마을에서 죽은 놈들. 그 멍청한 놈들 때문에! 그놈들 때문에 내 정신이 어떻게 되지만 않았으면 나는 당연히 쥐를 잡을 걸 챙겨 왔을 거라고.’

폭천의는 정신없이 달리며 그런 생각을 했다.

웬만해서는 제 책임을 인정하는 일이 없는 폭천의다운 발상이었다.

‘사람들이 오면 어떡하지? 그러면…… 아니야. 마차도 있으니까 내가 먼저 도망칠 수 있어. 여기만 지켜보고 있는 것도 아닐 테고 그렇게 빨리 도착하지는 않을 거야.’

폭천의는 불길하게만 생각할 필요는 없을 거라고 여기며 애써 마음을 다잡으려 했다.

그렇게 그가 산을 거의 벗어났을 즈음이었다.

그의 눈에, 자기가 세워 두었던 마차가 보였다.

그걸 보는 순간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지금도 그의 발밑은 꿈틀거리는 것처럼 요동쳤고 벽력탄이 터지면서 촉발된 산사태는 쉽게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이제는 나와 상관없는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폭천의가 마차를 향해 달려갈 때였다.

마차 뒤에서 한 사람의 신형이 불쑥 튀어나왔다.

‘……산적?’

이런 곳에 나타날 사람은 그런 자가 아닐까 하면서 잠깐 그렇게 추측하던 폭천의는 자기가 그를 이길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지금이라면 다른 길을 찾아 산에서 내려갈 기회가 있을 것 같았다.

설마하니 그가 가려고 한 곳에서 다른 사람이 튀어나올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

하나둘.

여기저기서 낯선 신형이 출몰할 때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하던 폭천의의 몸이 일순간 멈췄다.

믿고 싶지 않은 마기.

이런 마기를 폭사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뿐이었다.

패월악.

그가 돌아왔다는 말은 들었고 이미 그것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는 것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정말 그 패월악을 다시 만나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어린 여자의 몸을 하고 있었지만 눈앞의 그 여자가 패월악이라는 것을 폭천의는 한 번에 알아보았다.

“폭천의. 너를 처음 본 그 순간에 너를 죽여야 했던 거구나.”

그 긴 시간을 걸려 만난 주군에게 듣게 될 말이 그런 것일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는 수치심으로 얼굴을 붉혔다.

산사태가 계속되고 있었고 그곳에 있는 것이 위험했는데도 그들 중에 초조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듯했다.

“주, 주군…… 이 산은…… 이 산은 곧 무너질 것입니다. 주군. 피하셔야…… 합니다.”

폭천의는 자기가 지금 그 여자에게 존대하는 게, 그리고 그녀를 주군이라고 부르는 게 맞는지 헷갈렸다.

그러나 너무나 익숙한 그 기운을 느끼면서 다르게 대꾸를 할 가능성은 처음부터 없었다.

“벽력탄을 만들었느냐. 폭천의.”

린린은 폭천의의 말에 대답할 생각도 하지 않고 말했다.

“…….”

폭천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은 지금 제 생명을 연장해 줄 유일한 구명줄이었다.

저에게서 알고 싶은 것을 알게 된다면 더 이상은 여지도 두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그는 뒷걸음질을 쳤다.

폭천의는 그제야 그들의 구성을 보았다.

북리의천, 독고소영, 서도진, 저 아이는 아마도 은소청.

하월과 위도는 알아보지 못했지만 다른 이들은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독고소영의 얼굴은 알지 못했지만 북리의천의 곁에 있는 여자라면 그녀가 맞을 듯했다.

그의 앞에 그 인물들이 서 있다는 것은 한 가지 사실만을 의미했다.

이곳에서 빠져나갈 길은 없을 거라는 것.

그리고 자신은 이곳에서 죽을 거라는 사실이었다.

“으으으으…….”

폭천의의 입에서 짐승 같은 괴성이 흘러나왔다.

도저히 상상해 보지 않았던 상황이 닥치자 감정이 폭발했다.

다시 한 번 산이 요동하고 정상에서부터 흙더미가 해일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러나 그들 중 도망치려는 이는 아무도 없었고 모두가 북리의천을 보았다.

“아. 내가 해야 하는 건가?”

북리의천은 미처 몰랐다는 듯이 말하더니 진각을 밟았다.

그러자 그 아래로 계곡처럼 깊은 균열이 생겨났다.

폭천의는 그가 무슨 짓을 한 건지 이해하지 못한 채 멍한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다가 산에서 우르르 쏟아진 흙더미가 그곳으로 빨려가듯이 흘러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산이 그 모양이 되자 산에서 살던 짐승들이 미친 듯이 달려오다가 사람들을 발견하고 우왕좌왕했다.

그러자 그들이 길을 내어 주었고 산짐승들이 그 길로 계속 도망쳤다.

산짐승들에게는 도망칠 길을 내주는 이들이지만 자기에게는 아마 어림도 없는 일일 거라고 생각하며 폭천의는 벌벌 떨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