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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305화 (305/470)
  • 제305화

    305화

    그 자신도 수십 갈래로 찢겨 죽었으면서 자기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을 제대로 깨닫지도 못한 채 정신을 차리자마자 아이를 찾는 모습이 경이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어디입니까.”

    위도가 묻자 여인이 일어서려다 이를 악물었다.

    목숨은 살렸지만 아직 치료를 받지 않아서 온전히 통증이 느껴질 참이었다.

    “부인. 통증을 참기가 힘들 겁니다. 내가 점혈을 해 주겠소.”

    북리의천이 말했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만 아이를 찾기 전에는 안 됩니다. 이 정도 고통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이가 살아 있는지…… 봐야…… 겠습니다. 은공.”

    여인은 그럴 가능성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고 그러면서도 희망을 포기할 수 없는 듯 걸음을 옮겼다.

    아진은 그녀를 한 번 바라보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가 살려야 할 사람은 아직도 많이 있었다.

    마나가 부족해질지는 모를 일이었지만 옆에 있던 흑주를 보자 흑주는 자기를 찾았냐는 듯 아진에게 다가왔다.

    “아니. 아니야. 아직은 괜찮아.”

    그러자 흑주가 원래의 위치로 가서 대기 상태로 돌아갔다.

    하월은 시신을 찾고 부상자들을 돕느라 서서히 힘이 들었지만 주위의 누구도 쉬려고 하지 않는 것을 보고 이를 악물었다.

    그러자 북리의천이 하월을 보며 웃었다.

    “끝까지 버티는 게 중요하네. 그럴 때는 융통성을 발휘하는 것도 필요해. 휴식이 필요할 때는 휴식을 취하고 배가 고플 때는 음식을 먹도록 하게. 죽을 것처럼 힘이 들면 동료를 믿고 그렇게 자신을 살피는 것도 필요하네.”

    “…….”

    그래도 촌각을 다투는 일이라서 그러면 안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괜찮다고 했다.

    ‘정말 괜찮은 건가?’

    그러면서 다른 사람도 그러는지 보려고 두리번거렸지만 누구도 쉬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내공에서 아직 너무 부족한 모양이라고 생각했을 뿐 다른 이들이 미리미리 휴식을 취하며 힘을 비축해 나가는 중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소청과 린린이 사람들을 찾으러 다니는 동안 계속 입을 오물거리고 있었다.

    ‘아. 저러라는 건가 보구나.’

    그래도 배가 고픈 건 아니고 쉬는 건 아무래도 마음이 편치가 않을 것 같아서 하월이 억지로 움직이는데 갑자기 등이 시원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가 느껴 본 적 없던 청량한 기운이 명문혈을 통해 전해졌다.

    대기 시간이 길어지면서 너무 심심해진 흑주에게 그가 걸려들었던 것이다.

    하월은 흑주가 아진에게 꼭 필요할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흑주를 통해 전해지는 기운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동안 아진은 이렇게 도움을 받으면서 싸워 왔던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신기하기도 했고 흑주에게 자신이 아군으로 인식된 것 같아서 좋기도 했다.

    흑주는 하월이 딱 필요한 힘을 회복할 정도로만 기운을 불어넣어 주고 다시 아진의 옆으로 가서 대기했다.

    아진이 그런 흑주를 보고 웃었다.

    그 모습이 꼭 서로 얘기가 통하는 사람들끼리 짓는 표정 같아서 신기했는데 하월은 자기도 어느새 흑주를 보는 자신의 표정이 그렇게 되었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삼십여 호가 모여 마을을 이룬 그곳은 가난하지만 사람들이 서로 돕고 힘을 합하며 평화롭게 살던 곳이었다.

    마을이 외진 곳에 있는 데다 작고 가난해서 그곳까지 뭔가를 노리고 오는 이들이 거의 없었다.

    인근에는 무가도 없었고 상단이나 표행의 상로로 쓰이지도 못했다.

    하다못해 객잔 하나 없고 생필품 외의 물건은 구경하기도 힘들었지만 소박한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던 이들이었다.

    마을에 들어온 폭천의에 의해 하루아침에 무너질 뻔했던 그들의 삶은 아진 일행에 의해 기적적으로 복구되었다.

    아이를 찾으러 갔던 여인은 아이의 시신이 이미 아진의 곁에 있는 것을 나중에 발견했다.

    아이가 죽은 것을 보고 크게 충격을 받았지만 자기 역시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것을 깨닫고 그때부터는 그녀도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해 애썼다.

    자신의 상처는 대단한 것이 아니라면서 이리저리 다니며 아직 형체가 남아 있는 건물에 들어가 옷가지들과 이불을 가지고 나와서 사람들의 옷을 갈아입혀 주기도 했다.

    피에 젖은 옷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추위를 느끼던 사람들에게 그런 손길은 큰 도움이 되었다.

    어느 정도 치료가 끝난 후에 북리의천이 먼저 촌장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설명할 수 있겠는지 물었다.

    “저희도 잘은 모르겠습니다. 마을에 한 남자가 들어와서 행패를 부렸습니다. 저희는 오랜만에 본 외지인이 반갑기도 하고 여행을 오래 한 것 같아서 도움을 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어디에 가는 길인지 물으면서 말을 걸었는데 느닷없이 품에서 작은 구슬 같은 것을 여러 개 꺼내더니 곳곳에 던졌습니다.”

    “작은 구슬 같은 거요?”

    북리의천이 묻자 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뭘 하는 건가 했지요. 왜 남의 집에 구슬을 던지는 건가 하고요. 그런데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집이 기우는 겁니다. 그걸 사람에게도 던졌어요. 그때부터 이곳은 아수라장이 됐고 서로 도망치면서 넘어지고 엉키고…….”

    촌장은 다시 상상하고 싶지도 않다는 듯이 말했다.

    마을은 폐허와 다름없이 변했고 그곳을 복구할 생각에 까마득해졌다.

    그러나 살아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그들은 모르지 않았다.

    “감사드립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우리 마을에 일어나는 건가 하면서 하늘을 원망했지만 하늘은 우리를 버린 게 아니었습니다.”

    노인의 마른 눈에 눈물이 고였다.

    다른 이들도 아진 일행에게 다가와 고마움을 표했다.

    그러나 다른 어떤 인사보다도 죽음을 이기고 살아났다는 사실이 아진 일행에게는 가장 큰 선물이 되었다.

    “서둘러야 할 것 같습니다. 여기가 마지막은 아닐 것 같아요.”

    아진의 말에 일행이 말없이 그를 따라나섰다.

    그때 하월이, 자기가 현장을 보면서 느꼈던 것을 말해 주려고 아진에게 다가갔다.

    마을을 벗어나서 길에 들어선 후였다.

    “공자님. 할 말이 있습니다.”

    “예. 말씀하십시오.”

    하월의 분위기가 다르다고 생각했는지 아진의 일행은 모두 자연스럽게 그 주위로 모여들었다.

    “이런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태자 전하의 저택에서였습니다.”

    “태자 전하의 저택요? 이런 모습이라는 게 혹시…… 화탄을 사용해 뭔가를 부순 걸 말하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그때는 그게 화탄에 의해서 생겨난 흔적이라는 걸 몰랐습니다. 태자 전하가 부르셔서 간 거였고 혼자 마음껏 둘러볼 처지는 아니어서 지나가면서 우연히 본 거기는 하지만 워낙 희한해서 눈여겨봤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누가 그랬다는 거죠? 혹시 화탄을 가진 사람이 태자 전하의 저택을 습격했다는 건가요? 폭천의가요?”

    린린이 묻자 하월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뭐라고 해야 할지…… 공격을 당한 거기는 하지만 기습을 당한 게 아니라 성능을 시험하기 위해서 노리고 던진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그 주위는 무사했고 일정 부분에만 폭격이 가해진 것 같았습니다. 그때는 폭격이 이것보다는 조금 약한 느낌이었는데 그래도 같은 종류의 화탄이라는 것은 맞는 것 같습니다.”

    하월의 입에서 나온 말은 엄청난 후폭풍을 가져왔다.

    그들 모두는 화탄이 폭천의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의심치 않고 있었다.

    그런데 그 화탄이 태자의 저택에서 터진 적이 있었다면…….

    그들은 서로 비상하게 머리를 굴렸다.

    한동안 침묵을 지키면서 각자 생각을 하다가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북리의천이었다.

    “폭천의이거나 혈교주. 둘 중 한 사람이 태자 전하와 연결이 되어 있는 것이겠구나.”

    태자에 대해 말하는 북리의천의 어조에서 강한 반감을 읽은 아진은 그가 왜 그러는지 알지 못한 채 스승을 바라보았다.

    태자가 린린을 태자비로 청한 사실을 아진은 그때까지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하월도 그 사실을 깨달았는데 나중에 혹시라도 아진이 자기 뒤에서 벌어진 일을 알지 못한 채 태자 앞에 서는 것도 그렇겠다고 생각하며 그 자리에서 말을 해 주었다.

    “공자님. 태자 전하에 대해서는 세간의 평판이 좋지 않습니다. 그리고 태자 전하는 욕심이 많은 분입니다. 자신의 영달을 위해서 사용할 수 있는 패는 그게 뭐가 됐건 아끼지 않고 써 버리려 합니다.”

    “저도 태자 전하에 대해서 그다지 높게 평가하고 있지는 않지만 지금 그 얘기가 왜 나오는 건지는…….”

    아진이 잘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말하자 하월이 말을 이었다.

    “태자 전하가 이린 소저를 태자비로 원했었습니다.”

    “……뭐라고요? 언제 말입니까?”

    아진은 이게 무슨 아닌 밤중에 홍두깨 같은 소리인가 하면서 눈이 휘둥그레진 채 물었고, 당사자인 린린 역시 놀라서 하월에게 따지듯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태자 전하가 왜요? 아니. 기가 막히네? 아니. 나를 안대요? 나에 대해서 뭘 안다고 그런 소리를 한대요? 정말 웃기네?”

    린린은 가만히 서 있다가 뺨이라도 얻어맞은 것처럼 광분했다.

    태자가 자신을 불건전한 시선으로 훑어봤다고만 해도 기분이 나쁠 텐데 무려 태자비로 삼으려고 했다니.

    그 생각을 하자 그때부터 화를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많은 가문의 소저들은 그 얘기를 듣는다면 감격을 하겠지만 린린은 달랐다.

    태자비 따위는 그녀에게 대수로운 자리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허!”

    공공연히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린린은 천마신교의 교주라는 자리를 황위의 밑이라고 보지 않았다.

    황제와 동등한 관계.

    그 정도로 생각을 하면서도 지금의 황제가 아진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서 착한 신하 노릇을 해 오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같잖은 태자가 그런 소리를 했다는 소리에 깊은 분노를 느꼈던 것이다.

    “그때…….”

    하월은 그 이야기를 전부 다 하는 게 좋을까 어쩔까 하다가 잠시 망설였다.

    황상께서도 그렇게 되기를 내심 바라던 눈치였다고 말하고 그 일을 무마하기 위해서 북리의천과 독고소영이 은밀히 황상을 알현했다는 말을 하고 싶었는데 후폭풍을 미리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공자. 섭혼술을 써버리기 전에 당장 말을 하십시오. 공자가 알고 있는 건 전부 다 말을 하세요. 멋대로 거르지 말고 말입니다!”

    린린의 그 말에 하월도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북리의천과 독고소영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들 역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어차피 황상도 그때 그 일을 미안하게 여겼고 아진이 모르고 지나간 것을 다행스럽게 여겼는데 이제 와서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냥 그 정도로 넘어가자꾸나. 린린. 그 일은 일어나지 않지 않았느냐. 그 일을 무마하기 위해 너희 두 사람을 위해 많은 사람이 음지에서 나섰다는 것만 알고 있으면 된다.”

    북리의천은 그렇게 말하고 더 이상은 거기에 대해 언급하지 말라고 못 박아 두었다.

    황상도 황상이지만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아진과 린린 두 사람의 관계였다.

    그들이 모두 나서서 린린의 태자비 간택을 결사적으로 말린 것이 아진과 린린이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라서 그렇다는 거였는데 이 시점에 그 이야기를 하면 두 사람의 관계만 더 어색해질 것 같아서였다.

    “아진아. 그리고 린린. 태자 전하가 너를 태자비로 삼으려 했던 일에 대해서는 나 모르게 다른 사람에게 묻지 말거라.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을 해 주었으면 하는구나.”

    아진과 린린은 그게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 쉽게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북리의천이 연거푸 말을 하며 대답을 재촉하자 별수 없다고 생각하며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하월은 혼자서 안도의 한숨을 쉬며 마음을 놓았다.

    이야기는 다시 태자의 저택에 있던 화탄의 흔적으로 돌아갔고 그들은 그 시점에서 자기들이 내릴 수 있는 결론을 내렸다.

    혈교주나 폭천의.

    둘 중 한 사람이 태자와 연관돼 있다는 것.

    거기에서 더 범위를 줄일 수는 없을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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