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4화
304화
“어디로 가는 길이오?”
노부의 질문에 폭천의는 잠시 망설였다.
가장 가까운 마을.
그것이 답이었는데 왠지 그렇게 말을 하면 안 될 것 같아서였다.
“뭘 하러 가는 길이오? 산에는 무슨 일로 올라갔소?”
질문이 연달아 나왔다.
당신이 뭔데 그런 걸 그렇게 꼬치꼬치 묻는 거냐고 해야 할 텐데 입을 벙긋하기도 힘들었다.
누구일까?
내가 이 사람을 언제 본 걸까?
그 생각만이 폭천의의 머릿속을 무겁게 짓눌렀다.
저에게서 나는 냄새가 코를 찌르고 올라와 폭천의는 창문을 열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계곡물에 몸이라도 씻고 올 걸 그랬나 하는 생각도 뒤늦게 조금 들었다.
자기 때문에 옆 사람이 불쾌할 거라는 생각보다는, 수치심 때문이었다.
폭천의는 앞만 보면서 혹시라도 옆의 노부가 자신을 힐끔거리거나 하지는 않을지 신경을 썼다.
그러나 노부는 더 이상 폭천의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결국 폭천의가 물었다.
“대인. 전에 대인께 제가 도움을 입은 일이 있지 않은지요? 이번에 헤어지고 나면 언제 다시 뵙게 될지 모르는데 이렇게 헤어지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신경 쓰지 않아도 되오. 대단한 일은 아니었으니 말이오.”
그것은 폭천의가 하는 말이 일단은 맞다는 의미였다.
폭천의는 그를 돌아보며 언제 만났던 건지 물었다.
그러나 노부는 대답해 줄 생각이 없는 게 분명해 보였다.
“기억나지 않는 것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거요. 기억나지 않는 것을 애써 기억해 내려고 하지 않아도 되오. 우리 인연이 거기까지였던 것이니 말이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많은 의미를 두지 마시오. 말한 그대로의 의미요.”
“대인. 혹시 대인께서 가시는 길에 제가 따라갈 수는 없겠는지요? 스승님이 돌아가셔서 머물 곳이 없어 고향으로 돌아가려던 참이었습니다. 그러나 고향에 돌아가 봐야 이제 저를 기억하는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갈 곳이 있기만 하다면 고향에는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제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대인.”
폭천의는 어느덧 진지해졌다.
완전히 진실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얼추 비슷하게 이야기를 갖다 붙이기는 했다.
그러나 노부는 고개를 저었다.
“가려고 했던 곳을 말하면 세워 줄 것이오.”
“…….”
폭천의는 다시 한 번 부탁했지만 노부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답은 이미 충분히 했다는 듯했다.
마차는 마을에 다가갔고 폭천의는 앞을 보면서 노부에게 말했다.
“저 마을에 갈 것이니 저기에서 내려 주십시오.”
그제야 노부가 그를 바라보았다.
폭천의는 속으로 웃었다.
‘마을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게 되면 후회하겠지. 나를 데려갈 걸 그랬다고 생각할 테고.’
후회가 물밀 듯이 밀려오도록 마을을 더 처참하게 만들겠다고 생각하며 폭천의는 마차에서 내릴 준비를 했다.
마차가 멈추고 그가 내리자 마차는 도망치는 것처럼 그곳을 떠났다.
진한 흙먼지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것을 보며 폭천의는 걸음을 옮겼다.
‘후회하게 될 거요.’
폭천의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마차 안의 노부는 생각에 잠겼다.
‘괜한 일에 나섰구나. 한 아이를 살리는 것으로 너무 많은 사람을 죽였어.’
답지도 않게 선행을 베풀었다가 인세(人世)에 너무 큰 영향을 끼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자신의 행동으로 그렇게 된 것을 알게 될 때마다 마선은 이번에야말로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자고 마음을 다잡았다.
폭천의가 무슨 마음으로 마을에서 내린 건지 그는 어느 정도 짐작을 하고 있었다.
품 안의 벽력탄과 살기를 느끼면서.
예전의 그였다면 당장 폭천의를 찾아가 말렸을 것이다.
그러나 한 사람의 목숨을 구하려고 시작한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마선은 이미 너무 많이 봐 왔다.
그 당시에는 선량한 양민이라고 생각해서 구해 준 사람이 나중에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악적이 되기도 했다.
오히려 그가 막으려고 했던 참변보다 더 큰 참변을 수도 없이 일으키며 다니는 것을 목격하기도 했다.
후회는 그동안 해 온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한동안은 잘해 왔다.
거의 백 년이 넘도록.
그러다가 그 결심을 다시 깬 것은 그리 오래전의 일도 아니었다.
‘이번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군.’
그것은 그의 결단으로 내린 일이라기보다 불가항력이라고 해야 옳았을 것이다.
처음에는 그냥 지나가려고 했다.
목이 잘려 죽은 한 여자의 시신이 묻힌 것을 알아차렸지만 그냥 모른 척하려고 했다.
지금까지 해 왔던 수많은 실수에 또 한 번의 실수를 반복하는 것.
단순히 그런 의미만은 아니게 될 거라는 생각에 그는 실제로 그곳을 떠나기도 했다.
빨리 떠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에, 자주 사용하지 않던 신법까지 펼쳐서 단숨에 수백 리를 떠나 버렸다.
그러나 결국 그는 그 길을 다시 돌아오는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 걸까 하면서 그는 그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
주위에는 사람이 없었고 대기는 온통 흑암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의 신형이 부슬부슬 무너져 흙이 되는 것을 본 사람이 있었다면 그게 누구든지 기함하며 기절을 해 버렸을 것이다.
그는 땅속으로 들어갔고 시신을 살폈다.
돌이킬 시간은 아직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후회는 죽음보다도 더 고통스러웠다.
자신이 살려낸 사람의 손에 죽는 사람들은 결국 자신의 손으로 죽인 것과 다름없다는 생각이 여전히 그를 괴롭혔다.
‘그런데도 또 그 실수를 반복하자는 건지.’
그는 이를 앙다물면서 생각했다.
그러나.
불가항력.
그때의 일을 생각할 때 가장 자주 떠오르는 말이었다.
그는 어느새 그 시신에게 자신의 힘을 불어넣어 주고 있었다.
아니. 그 말은 정정이 필요할 것이다.
힘이 저절로 시신에게 빨려 들어갔으니까.
그것은 그때까지 이루어졌던 일과도 달랐다.
폭천의를 살릴 때와도 달랐다.
폭천의를 살릴 때 그는 폭천의의 모습이 너무 불쌍하고 가여워서 위험에 처할 때 사용할 수 있는 미증유의 힘을 주었다.
그것이 그 후로 폭천의와 혈교주를 얼마나 큰 번민에 빠뜨렸는지 마선은 미처 알지 못했다.
바퀴가 커다란 돌을 밟기라도 했는지 마차가 한 번 크게 덜컥거렸고 마선의 상념은 거기에서 끝이 났다.
그의 모든 정신은 폭천의를 내려준 마을에 향했고 마선은 끝까지 갈등했지만 결국 마부를 부르지 않았다.
마부를 부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바람이 되어 마을로 가는 것은 조금도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지만 그는 끝끝내 그 일을 외면했다.
* * *
향화문도 그 소식을 접하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사건이 일어난 곳이 워낙 외진 마을이어서였다.
가장 잘 사는 사람도 작은 도시의 평균적인 상인 정도를 벗어나지 못했기에 비적도 발길을 돌려 버리는 마을.
그 마을 곳곳이 화탄의 폭격을 맞았다.
벽력탄을 쓰지 않은 것은 그것이 아깝다는 이유였을 뿐 다른 어떤 이유도 없었다.
폭천의는 사람들의 시신이 아무렇게나 흩어진 곳을 돌아다니며 쓸만한 것들을 찾아냈다.
마차를 가진 집이 없는 건가 하고 한참이나 돌아다니다가 수레 하나를 발견했을 때는 거기에 만족해야 하나보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마차를 발견했고 그때부터는 탐욕스럽게, 자기가 찾아낸 물건들을 마차에 싣고 미련 없이 마을을 떠났다.
폭천의가 떠난 마을은 완전한 혈겁을 당한 채 숨을 쉬는 존재가 아무도 남지 않았다.
우연히 그곳을 지나가던 향화문의 문도가 아니었다면 마을의 일은 한참이나 더 장막에 가려졌을 터였다.
소식을 듣고 마을에 가장 먼저 도착한 사람들은 아진 일행이었다.
“화탄 같아.”
현장을 본 린린은 곳곳을 다니면서 곧바로 말했다.
기대하지 않았는데 하월이 화탄과 벽력탄에 대해 알고 있었다.
사실 현장을 보기 전까지 그는 자기가 그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그러나 그곳과 비슷한 현장을 본 적이 있었고 그때 사용한 것이 화탄이었던 거구나 했을 뿐이었다.
모두가 그곳의 처참한 상황을 보고 눈살을 찌푸리는 동안 아진은 시신들을 모으라고 말하고 죽은 자의 몸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화탄에 당한 사람들의 시신이 너무 끔찍하고 시신의 형태를 짜 맞추는 것조차 어려워서 아무리 아진이라고 해도 그들을 고치는 것은 무리이겠다고 생각한 이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아진은 한 사람 한 사람을 포기하지 않고 마나를 불어넣었다.
그렇게 강한 마나가 폭주하듯이 달려나간 것은 오랜만의 일이었다.
“……성공할 수 있을까요?”
소청이 독고소영에게 조용히 묻자 그녀가 웃음을 지었다.
“소청이 너는 아직 네 스승님을 잘 모르는구나.”
그녀는 아진이 독고세가의 사람들을 전부 살려 내던 때의 일을 떠올리며 말했다.
처음에 소청은 단지 사람들이 정말 살아날 수 있을까 해서 물은 거였는데 어쩌다 보니 옆에 있던 사람이 아진의 사고였고 그녀가 대답하게 되었다.
소청은 사고가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대답을 할 수 있게 됐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찼다.
이제 완벽하게 자신의 기억을 갖춘 채 아진에 대해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이 감격스러웠던 것이다.
“우리는 한 사람의 시신이라도 더 찾아내는 게 좋을 것 같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서둘러 시신을 찾아내려고 이리저리 흩어졌다.
“으으으음…….”
어디선가 낯선 이의 신음이 들려왔을 때 사람들은 그 소리가 나는 곳을 돌아보려고 하는 대신 더욱 서두르며 시신을 찾아냈다.
돌아보는 것은 나중에도 할 수 있겠지만 그러다가 구조가 늦어져 구하지 못하는 생명이 생겨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자기들이 발견하지 못한 곳에 시신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더욱 간절하게 달렸다.
독고소영은 그 누구보다 더 열심히 시신을 찾으러 다녔다.
독고세가에서의 기적을 알고 있었기에 멈출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포기해야 할 순간이 정말 많았을 테지만 그들은 아진의 선택을 받은 이들이었다.
무너진 대들보 아래에 깔려 있는 사람들을 구해내고, 겹겹이 쌓인 기와 조각을 한 번에 들어 내버린 후에 그 밑의 사람을 건져내기도 했다.
그들은 그렇게 찾아낸 시신을 아진의 주위에 옮겨 놓고 아직 발견되지 않은 시신을 찾으러 갔다.
아진의 곁에서 정신을 차리는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 갔다.
“스승님. 아직 이분들의 상처까지 치료하지는 못하니 통증을 느끼지 않도록 점혈을 해 주십시오. 그리고 통증을 너무 크게 느끼는 분들에게는.”
“수혈을 짚도록 하겠다. 아진아.”
북리의천은 아진이 할 말을 줄여 주고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소청이와 린린은 치료를 할 줄 모르느냐?”
북리의천이 순전히 궁금해서 그런 것처럼 묻자 린린은 머쓱해했다.
“그게 잘…….”
그러나 소청은 그런 기색도 없이 자기는 할 줄 모른다고 해맑게 말했다.
“그래도 약은 있을걸요?”
그러면서 소청이 제 짐을 주섬주섬 풀자 그 안에서 제선문주가 만든 약이 나왔다.
“스승님. 이걸 발라 줄까요?”
소청이 묻자 아진이 고개를 저었다.
살려야 할 사람이 많았고 아직 발견되지 않은 이들 중에 우선해서 치료가 필요한 사람들이 생길 수도 있었기에 약이 꼭 필요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우선 점혈만 해 주고 버티게 하려는 생각이었다.
흑주는 일찌감치 아진의 곁에 둥둥 뜬 채로 아진을 도와주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아진은 아직 마나의 부족을 느끼지 않는 듯 자기 힘으로 그 일을 해나갔다.
“저희 아이가…… 저희 아이가 집에 있어요. 저희 아이가 집에 갇혔어요……!”
아진의 마나로 회복된 한 여인이 정신을 차리자마자 오열하며 소리쳤다.
죽기 전에 봤던 장면이 생생하게 떠오르며 마음이 급해지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