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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303화 (303/470)
  • 제303화

    303화

    ‘으으으. 추워. 더는 안 되겠다. 이러다 얼어 죽겠어.’

    그는 주위를 더듬어 바닥에 있는 마른 나뭇가지를 긁어모으고 거기에 불을 붙였다.

    나뭇가지가 말라 있다고는 해도 쉽게 불이 붙지 않았을 텐데 그가 가진 화섭자 덕분에 크게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특별히 정성을 기울여 만든 화섭자의 덕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일단 불을 밝히고 나서 그는 좀 더 많은 나뭇가지를 모아 왔고 이내 커다란 모닥불을 지폈다.

    먹을 것도 없이 도망친 것은 정말 아둔한 짓이었다.

    ‘오늘만 여기서 쉬고 며칠 동안 화탄을 좀 더 만든 후에 마을로 내려가자.’

    그는 품에 손을 넣고 화탄을 만지작거렸다.

    근처에 외따로 떨어진 마을이 있다는 것을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마을에서 일이 벌어져도 사람들이 쉽게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고 관청에 소식이 전해지는 것은 며칠이 걸릴지 몰랐다.

    그의 눈에 불바다가 된 마을이 그려졌다.

    마을 사람들은 살려 달라고 소리를 지르고 부모는 아이를 버릴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아이를 챙기는 부모는 정작 얼마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폭천의는 계획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세웠다.

    몇몇 건물에는 크게 불을 질러야겠지만 그러다가 세간이 다 타 버릴지도 모르니 잘 사는 집은 놔둬야 했다.

    그렇게 해서 몇 군데만 제대로 털어도 한동안 여비로 쓸 돈은 마련이 될 거라며 그는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잠깐 잠을 청하고 눈을 떴을 때 그의 주위에는 팔뚝 정도 돼 보이는 쥐들이 오가고 있었다.

    폭천의가 힘을 잃었다고 생각하고 그를 공격해 사냥하려는 놈들이었다.

    몇 놈이 폭천의의 근처까지 다가왔고 그는 그것들을 노려보았다.

    ‘큼지막해서 좋네. 어차피 숨통을 끊으려고 손을 움직이는 건 똑같은데.’

    폭천의는 혹시 그 기이한 힘이 다시 돌아오지는 않을까 하면서 제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혈교주는 폭천의의 변화를 주시하면서 그 규칙성을 파악하려고 하는 것 같았고 폭천의도 거기에 규칙이 있다고 믿게 하려 해 왔다.

    혈교주가 가장 크게 착각한 것 중 하나는 폭천의가 사용하곤 하는 힘이 그의 의지로 발현되는 것이 아니라는 거였다.

    그러나 스스로 꺼내 쓰지도 못하는 힘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해서 폭천의는 그것이 자기 의지에 따라 나오는 것처럼 굴었다.

    ‘어떻게 해야 그 힘을 사용할 수 있는 건지만 알아도…….’

    간절함의 차이일까?

    폭천의는 그 생각을 하면서 옆에 있는 돌을 주웠다.

    그리고 저를 향해 갑자기 덤벼드는 쥐를 향해 던졌다.

    캭-!

    쥐는 돌에 맞고 한참이나 밀려 나가떨어졌다.

    평범한 가격에 당한 것이 아니었다.

    ‘지금이라고? 악군을 만났을 때 돌아왔으면 그 고생은 안 했잖아.’

    그러나 아깝다고 생각할 것은 아니었다.

    조금 어이가 없기는 했지만 마침 배가 고프던 참이기도 했고, 주위를 둘러보니 어둠 속에서도 이쪽으로 다가오는 놈들의 수가 제법 많았다.

    제때 맞춰서 힘이 돌아오지 않았다면 그는 그곳에서 죽을 운명이었는지도 몰랐다.

    폭천의는 저를 향해 천천히 다가오는 쥐 떼들을 향해 몇 번 힘을 조절해 가며 돌을 던졌다.

    물 반, 고기 반인 연못에서 그물을 던지는 것처럼 수확은 좋았다.

    몇 놈은 주춤거렸지만 몇 놈은 오기가 생긴 듯 더욱 맹렬히 달려들었다.

    더 이상은 앉은 자리에서 대충 상대할 수는 없을 것 같아서 폭천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행히 돌은 충분했고 그 힘은 갑자기 사라져 버리지 않을 모양이었다.

    쥐들과의 싸움은 거의 반 시진 동안 계속됐다.

    ‘멍청한 놈들.’

    폭천의는 기계적인 동작을 반복하면서 저를 향해 달려드는 놈들을 죽였다.

    잘못해서 몸통이 심하게 터져 버린 것도 있었지만 초반의 실수를 바로잡은 후에는 그럭저럭 형태를 유지하며 죽였다.

    그 시간이 지난 후 폭천의는 쥐의 사체로 가득한 곳의 한가운데에 섬처럼 떠 있었다.

    그러나 비참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잘 살아남은 데다가 앞으로 한동안은 먹을 걸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였다.

    ‘이러면 급하게 서둘러서 내려가지 않아도 될지 모르겠는데?’

    폭천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쥐의 사체를 끌어다가 가죽을 벗겼다.

    이미 불은 피워져 있었고 배가 고파서 그런지 거기에 구워 먹는 맛이 나쁘지도 않았다.

    그렇게 급히 허기를 채운 후에 폭천의는 쥐 몇 마리를 불에 던져 보았다.

    불길은 보통의 것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거세고 뜨거워서 순식간에 뼈까지 타들어 갔다.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폭천의는 모닥불에 걸쳐져 있던 무언가를 끄집어내고 그것을 뒤적거렸다.

    배도 부르겠다, 화탄을 만드는 일을 계속 뒤로 미룰 이유도 없겠다.

    폭천의는 쥐의 뼈에서 자기가 원하는 재료를 얻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화탄이나 몇 개 더 만들어 보자고 생각했다.

    그는 한 사람이 조용히 그를 지켜보고 있다가 경악에 찬 채 소리 없이 동굴을 빠져나가는 것을 알지 못했다.

    혈교의 잔당 중 한 명이었다.

    ‘역시 폭천의는 자기가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그 힘을 사용할 수 있었던 거야.’

    폭천의가 쥐들을 향해 돌을 던져 그것들을 죽이는 것은 그렇게 놀랄만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폭천의에 대해 알고 있던 것이 뿌리째 흔들렸다는 것이 중요했다.

    그는 아쉬웠다.

    폭천의가 어떤 사람인지 좀 더 확실히 알 수 있었다면 혈교주의 밑에서 허송세월을 하지 않고 폭천의를 보필해서 지금보다 나은 삶을 살 수 있었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면서도 그가 동굴을 떠난 것은 폭천의가 악군을 죽이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라서였다.

    그런 자라면 옆에 다른 사람이 있어 봤자 귀찮아하기만 할 거고 자기에게 기회나 여지를 주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며 그는 폭천의가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조심하며 최대한 빠르게 그곳을 빠져나갔다.

    * * *

    며칠이 지나고 동굴에서 한 사람이 나왔다.

    폭천의는 자신의 몰골이 어떤지 알지 못하고 있었다.

    만약 알았다면 그런 꼴로 밖을 나돌아다니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의 몸에는 쥐의 살점과 피가 묻어 있었고 몸에서는 끔찍한 냄새가 났다.

    그는 쥐의 살점을 꼼꼼하게 발라 육포까지 만들어서 챙겼는데 마을을 습격하는 일이 잘 안 됐을 때 굶주리고 싶지 않아서 그런 거였다.

    폭천의가 산에서 내려가는 동안 마차 한 대가 그곳을 지나고 있었다.

    마차에는 금포를 입은 남자가 타고 있었는데 창문으로 산을 보고 있던 남자는 폭천의가 내려오는 모습을 발견했다.

    온몸이 지저분하고 가까이하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지만 그는 창문 밖으로 손을 뻗어 마차를 두드렸다.

    그러자 신호를 알아들은 마부가 마차를 세웠다.

    “예. 대인.”

    “산에서 한 남자가 내려오고 있네. 여기에서 마을에 가려면 가장 가까운 곳에 가려고 해도 세 시진은 가야 할 것이니 저자를 기다리다가 태워다 주는 것이 좋겠군.”

    마부는 대인의 말을 듣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도 곧 폭천의가 내려오는 모습을 보았는데 우연히라도 엮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설마하니 그런 자를 마차 안에 태울 것 같지는 않고 마부석 옆에 태우라고 할 것 같은데, 대인의 입장에서는 선(善)을 쌓고 싶어서 그러는 거라고 하더라도 그로 인한 고생은 자신의 몫으로 돌아오는 거였다.

    마부는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대인의 명령을 거부하거나 심기를 거스를 수가 없었다.

    웃고 있을 때나 부처 같은 사람이지 일단 한 번 화가 나면 염마가 따로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대인이라고 부르며 그를 보필하고 있지만 그에 대해 아는 것은 마부도 많지 않았다.

    어느 날 그가 사람들을 구하는 것을 보았고 그 모습에 매료되어 얼이 빠진 듯이 서 있는데 그가 다가왔다.

    그러면서 자기가 유람을 하는데 마차를 몰아줄 수 있냐고 물었다.

    그러면 한 달에 은자 열 냥을 주겠다고 했는데 그로서는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마차에 태우고 하루에 꼬박 다섯 시진은 마차를 몰아야 했지만 일이 크게 고되지는 않았다.

    자신을 석씨 성 가진 사람이라고 소개하기에 그때부터 그냥 석 대인이라고 생각하며 대인이라고 불러오고 있었다.

    그러나 마부는 그가 오래전 신교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마선이라는 사실을 상상도 하지 못했다.

    폭천의는 마차 한 대가 산자락으로 달려오다가 멈춰 서는 것을 보았다.

    ‘죽이고 마차를 뺏을까? 마차가 있으면 편하기는 하겠는데.’

    폭천의의 생각은 간단했다.

    자기에게 유용해 보이는 물건을 가진 자가 보이면 죽이고 뺏는 거였다.

    소형 화탄도 넉넉히 만들어서 지금은 겁나는 것이 없었다.

    동굴에서 나온 쥐는 그에게 기연이나 마찬가지였다.

    감히 영물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조그만 것들이 불에 타고 남긴 뼛가루가 화탄을 만드는데 적합할 뿐만 아니라 성능을 소폭 올리기까지 했다.

    그래서 폭천의는 밖에서 상황이 돌아가는 것을 조금 보고 동굴로 다시 돌아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동굴에서 본 쥐는 그가 다른 곳에서 보았던 쥐와 달랐는데 동굴 근처에도 그런 쥐들이 돌아다닐지 몰라서였다.

    폭천의는 일단 마음을 먹은 후 마차를 향해 달렸다.

    그러는 동안에도 마차는 움직이지 않았고 마부는 폭천의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건가? 왜?’

    폭천의는 희한하다고 생각하며 걸음을 더욱 서둘렀다.

    그러다가 마차에 가까워졌을 때, 누군가는 말을 꺼내야 했다.

    마부가 먼저였다.

    “타시오. 마차에 계신 대인께서 은혜를 베푸셨소. 마부석으로 올라오시오.”

    폭천의는 잠시 난감해졌다.

    그러려고 한 것이 아닌데 의도치 않게 남의 도움을 받게 되었다.

    폭천의가 잠시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을 때 마차 안에서 소리가 들렸다.

    “마부석이 아니라 여기에 타시도록 하게.”

    마부는 깜짝 놀란 얼굴로 폭천의를 바라보았다.

    멀리에서 봤을 때도 상태가 좋지 않았는데 가까이에서 보니 괴상한 냄새도 나고 절대로 같이 있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런데 대인이 왜 그러는 건가 했다.

    그래도 대인이 먼저 그렇게 말을 했으니 자기는 말만 들으면 된다고 생각하며 그는 폭천의를 향해 고갯짓을 했다.

    “뭐 하시오? 안 들리시오? 마차에 타라고 하시지 않소?”

    폭천의는 자신을 마차로 청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문득 궁금해졌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 목소리가 낯설지 않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 소리를 어디에서 들었을까…….

    폭천의는 그것을 알아보기 위해서라도 서둘러 마차로 다가갔다.

    “그럼 들어가겠습니다.”

    그때까지 자신의 꼴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던 폭천의는 뒤늦게 제 차림을 살폈다.

    ‘…….’

    이 정도면 정말 봐주기 힘들다고 생각을 하면서 폭천의는 난감해했다.

    그러나 문이 먼저 열렸다.

    “타시오.”

    대인은 폭천의가 탈 수 있도록 문을 열어 주고 자기는 안쪽으로 들어갔다.

    목소리는 여전히 익숙한데 얼굴은 본 기억이 없었다.

    노부(老夫)의 얼굴을 무례하다 싶을 정도로 오래 들여다봤는데도 마찬가지였다.

    “…….”

    폭천의는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마차에 올랐다.

    “혹시 저를 보신 적이 있는지요. 대인? 전에 제가 대인을 뵌 적이 있습니까?”

    폭천의가 묻자 노부가 웃었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 굳이 애쓰지 않아도 되오.”

    “그 말은. 만난 적이 있다는 말씀입니까?”

    “애쓰지 말라는 말이오.”

    “…….”

    폭천의는 노부가 말하는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제 성질을 그대로 부리지도 못했다.

    왠지 과거에 언젠가 만난 적이 있고 그것이 나쁜 인연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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