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2화
302화
악군의 몸부림이 잠잠해지기까지 걸린 시간은 그다지 길지도 않았다.
“크크크크큭.”
폭천의의 입에서 웃음이 터졌다.
그 화탄이 제대로 터지지 않는 바람에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는 생각에 광소가 점점 더 커졌다.
‘그래도 살았으니 됐다.’
어쨌든 살았으니.
그게 과연 정말로 좋아해야 할 일인지, 삶이란 또 다른 고통과 불안의 연장으로 들어서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웠지만 그 순간의 폭천의는 살아남은 것을 기꺼이 자축하고 싶었다.
* * *
황궁에서 나온 아진 일행은 가장 먼저 향화문의 안가로 향했다.
그들이 안가에 어느 정도 가까워지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모여들었다.
평범한 차림을 한 민초들이었는데 아진은 그들을 보면서 얼굴 가득 환한 웃음을 거두지 못했다.
모두가 향화문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그들도 남들 틈에서 신분을 가리고 정보 수집 활동을 하는 것이라서 웬만하면 아진 일행을 보고도 반가운 척을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걸음이 저절로 향하는 것을 어쩌지 못했다.
아진은 그들에게 가서 인사라도 하고 싶은 걸 꾹 참았다.
그러면서 서로가 모르는 것처럼 곁을 스쳐서 안가로 조용히 들어가자 그들도 시간 차이를 두고 따라 들어왔다.
“짱돌 아저씨!”
“공자님.”
안가 안에 있던 짱돌은 그들이 올 거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향화문 사람들이 미리 소식을 전했던 것이다.
짱돌의 얼굴에는 반가운 기색이 가득했다.
작금에 천하제일의 정보문이라는 향화문의 문주였지만 짱돌에게서는 어떤 권위의식도 보이지 않고 아진이 처음 만났을 때와 별반 다름없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항상 어려운 일을 맡겨 놓고 이렇게 찾아오지도 못해서 죄송합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공자님. 부족한 사람이 너무 큰일을 맡아서 잘 할 수 있을지 항상 걱정입니다.”
“그렇게 오래 시간이 지났는데도 아직 그러세요? 지금까지 한 번도 실수 없이 일해 오셨으면서도요?”
아진은 신기하다는 듯이 말했고 짱돌은 여전히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잘해 주어서 그런 것이지 제가 잘해서 된 일은 없습니다.”
안으로 들어가면서 짱돌은 그동안 새롭게 알아낸 이야기들을 전해 주었다.
지금은 폭천의와 혈교도에 사안이 집중되어 있어서 다른 일에는 상대적으로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었기에, 짱돌은 그것 이외의 특별히 중요해 보이는 정보를 아진에게 미리 말해 주고 싶었던 것이다.
아진이 이야기를 듣는 동안 하월도 열심히 귀를 기울였는데 짱돌은 하월에게도 그런 말을 바로 듣게 해도 되는 건가 하면서 그를 슬그머니 경계했다.
그러자 아진이 웃으며 하월을 짱돌에게 정식으로 소개해 주었다.
“요즘 하월 공자의 활약이 아주 대단합니다. 하월 공자는 이제 믿어도 됩니다. 제가 보증하겠습니다. 만약 하월 공자가 믿음을 배반하면 그때는 제가 알아서 사적으로 처리를 하도록 하지요.”
“와…… 믿는다는 말이 하나도 안 고맙게 느껴질 정도로 무서운 말이네요. 공자님.”
짱돌의 말은 하월이 하고 싶은 말이기도 했다.
서도진이 알아서 사적으로 처리한다니.
그런 일을 당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기에 하월은 얌전히 있었다.
안가에서는 많은 이야기가 오갔다.
그렇게 해서 얻게 되는 새로운 정보도 많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아진은 최전선에서 활동해 주는 짱돌과 향화문도에게 특별히 해 주는 게 없이 희생만 강요한다고 생각해 왔는데 그들이 자신을 보며 감격을 감추지 못하는 걸 보고 있자니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존재가 누군가에게 감격의 이유가 된다는 것이 좋았다.
그가 사람들의 영웅이었던 적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이번에는 그도 그것을 같이 즐거워할 수가 있었다.
향화문은 처음에 비룡채의 산적들을 중심으로 해서 이루어졌지만 나중에는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영입되었다.
향화문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조금 전에 함께 앉아서 대화를 나눴다가도 돌아서고 나면 그 얼굴이 잘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인상이 희미해야 했는데,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어디서 그런 사람들로만 그렇게 잘도 골라 왔을까 할 정도로 정말 존재감이 희미했다.
“와…… 서도진 공자님이랑 북궁 하월 공자님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는 건 처음인데.”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그런 말을 하기도 했다.
“나는 이린 아가씨를 꼭 한번 뵙고 싶었는데 소원을 이룬 것 같아. 정말 멋지시네. 이게 마기인가봐. 나는 저런 눈빛은 처음 봤어.”
작은 소리로 자기들끼리 소곤거리는 것 같았지만 전부 다 들렸다.
아진은 그들에게 다가가 함께 식사라도 하면 어떻겠냐고 먼저 제안했고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멍한 얼굴로 아진을 바라보기만 했다.
이건 도저히 현실일 수가 없다고 생각한 것처럼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볼을 쭉 잡아 늘이기도 했고 그 옆에 있던 사람은 현실 자각을 도와주겠다는 일념으로 그의 뺨을 때려 주었다.
금세 상이 차려지고 아진은 황궁을 나올 때 황제에게 특별히 받은 술을 그곳에서 열었다.
“이것은 황상께서 내리신 술입니다. 다들 한 잔씩 받으시지요.”
아진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깜짝 놀라서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렇게 귀한 걸 자기들에게 줘도 되는 건가 하는 얼굴이었다.
“좋은 술은 그 술이 어떤 재료로 만들어졌는가에 따라서도 좌우되지만 좋은 사람과 마시는 술이 가장 좋은 술이 아닙니까. 여러분과 함께 마시면 이 술은 더 좋은 술이 되겠지요. 그리고 황상께서도 여러분과 함께 마셨다는 걸 들으시면 기뻐하실 겁니다.”
아진의 말에 사람들은 감동을 금치 못했다.
“정말…… 폐하께서 저희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을 해 주시는지요?”
아진은 그 이야기를 그렇게까지 자세하게 해 줄 생각은 없었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그런 것이 자기 존재의 가치를 높여 주는 계기가 되기도 하겠다고 여겼다.
“그럼요. 이번 일만 해도 여러분이 아니었으면 이렇게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혈교도들을 굴복시키지 못했을 겁니다. 그자들이 도모하는 일마다 바람처럼 소문이 퍼져가고 미리 대비하니 일이 이렇게 끝난 것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어찌 됐을지 생각해 보십시오.”
아진은 과거에 제갈세가가 정보를 독점하면서 벌였던 일에 대해 말해 주었다.
그러면서 향화문이 누구보다 발 빠르게 정보를 모으고, 그 정보가 잘못된 것이 아닌지 직접 확인을 하고 사람들에게 고르게 전해질 수 있도록 노력해준 결과, 많은 사람이 훨씬 풍족하고 안전하게 살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해 주었다.
그것은 처음에 향화문을 세우면서 노린 목표보다도 훨씬 더 큰 효과를 가져 왔는데 중요한 소문을 퍼뜨릴 때도 도움이 많이 되었다.
그 두 가지 모두에서 우월하게 기능을 해내고 있어서 향화문은 산본의가의 유지에 없어서는 안 될 조직이 되었던 것이다.
몇 순배의 술이 오가고 짱돌은 어느새 얼굴이 벌게졌다.
그래도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거의 마시지 않은 거였는데 린린이 그에게 술을 따라 주었다.
“아저씨. 제 잔도 한 잔 받으세요.”
짱돌과 린린 사이에는 접점이 별로 없었지만 아진이 짱돌 얘기를 자주 해 줘서 린린은 짱돌을 아주 친근하게 생각했다.
“린린 아가씨는 정말 몰라보게 크셨습니다. 어렸을 때는 정말 산적 같…… 음. 큼!”
그 말에 린린이 폭소를 터뜨렸다.
“한 잔 더 받으세요.”
“아닙니다. 안 돼요. 사실 저는 몸을 조심해야 해서 말이지요. 지병이 있어서요.”
짱돌이 손사래를 치면서 린린에게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거…… 오라버니가 다 고쳐 드렸잖아요.”
린린의 말에 짱돌의 표정이 잠시 굳었다.
“제 체질은 아주 위험해서 항상 조심해야 한다고 하셨는데요?”
그러면서 짱돌이 아진을 바라보자 아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벌써 전에 다 고쳤죠. 제가 그 말씀을 안 드렸다고요? 아닐 텐데? 이상하네?”
아진은 정말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
짱돌은 지금까지 불면 날아갈까 세게 쥐면 터질까 걱정하면서 스스로 조심을 해 왔다가 아진의 말을 듣고 배신감을 느꼈다.
“정말…… 그렇다는 말씀입니까, 공자님?”
“네. 전에 벌써 다 얘기했을걸요?”
그렇게 중요한 얘기를 하면서, ‘아니면 말고’라는 표정을 지으며 안주를 한 젓가락 집어 드는 아진은 정말 한 대 콕 쥐어박고 싶을 만큼 얄미웠다.
“잘된 거지 않습니까. 문주님? 이제부터는 막 사셔도 되겠습니다. 저는 처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딱 봐도 건강하신 것 같은데 너무 조심하신다 했거든요.”
문도들은 자신의 몸도 모른 짱돌을 더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몰아갔고 결국 짱돌의 마음만 만신창이가 됐다.
하월은 이런 게 원래 이 사람들의 분위기인가 보다고 생각하며 속으로 웃고 있었다.
그동안 자기만 당했던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서 왠지 마음이 편안해졌던 것이다.
그들은 한참 더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아쉬움을 남긴 채 인사를 나눴다.
“다시 또 보게 될 겁니다. 그때까지 모두 몸조심하셔야 합니다.”
아진의 각별한 당부에 모두 환하게 웃음을 지은 채 그들을 배웅했다.
* * *
폭천의는 전에 발견한 적이 있는 동굴에 들어갔다.
전에 우연히 발견한 후에 다른 사람에게는 그 위치를 말하지 않고, 언젠가 필요한 일이 생기면 오자고 생각해 두었던 곳이었는데 갑자기 그곳이 떠올랐던 것이다.
“기가 막히는군.”
그는 한기가 전해지는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서 사나운 목소리로 성질을 부렸다.
막상 나와 버리고 나니 혈교가 그에게 꽤 포근한 곳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곳에 있을 때는 먹고 잘 것을 따로 걱정할 필요가 없었는데 이제는 그것들을 하나하나 제 손으로 해결해야 했기 때문이다.
‘혈교주 놈. 나를 찾아 나설까?’
폭천의는 앞이 보이지도 않는 곳에서 무언가를 찾으려는 것처럼 허공을 노려보았다.
불이라도 피워야겠다고 생각을 하기는 했는데 지금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래도 추위를 견디는 것이 너무 힘들어지면 결국 불을 지피기는 하겠지만 그때까지는 우선 버텨볼 생각을 하고 있었다.
폭천의는 한숨을 쉬고 품 안을 더듬었다.
화탄과 벽력탄.
그리고 그것들을 만들 재료.
재료는 오랜만에 많이 모였다.
마음껏 죽일 수 있는 자들이 있어서 좋았다.
혈교주는 그가 사람들의 살을 먹는 걸 좋아한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폭천의가 인육을 먹는 모습을 본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혈교주의 오해를 유발하려고 그런 것일 뿐 실상 인육을 사용하는 곳은 따로 있었다.
그가 제조법을 알아낸 수많은 병기.
그중 폭발성을 가진 위험한 물질들은 만들어 내는 것이 더 힘들었다.
재료를 구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었는데 다행히 인육과 뼈에서 비슷한 성분의 물질을 찾아낼 수가 있었다.
거기에 특정한 압력과 내공을 불어넣으면 폭천의가 원하는 재료로 변했다.
그 비법을 아는 사람은 없었고 그 때문에 그와 똑같은 재료를 구한 사람이 있다고 해도 폭천의와 같은 것을 만들 수는 없을 터였다.
폭천의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
강호의 고수로 이름을 올린 수많은 사람은 고상한 척하지만 그들도 손에 수많은 사람의 피를 묻히고 그곳에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정당성은 권력의 정점에 오르고 나면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거라고 생각하며 폭천의는 혼자서 웃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