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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301화 (301/470)

제301화

301화

어디에서 치솟은 건지, 거대한 불길이 그를 감쌌다.

구덩이 안에서 불길이 크기를 키워 나가고 있었다는 건 알았지만 뱀처럼 악혈을 감아 삼킨 불길은 분명 다른 곳에서 튀어나왔다.

이제껏 구덩이에서 피워 올린 불길은 그때를 위한 눈속임이었다는 듯이.

폭천의의 웃음이 노란 불꽃 뒤에서 어른거렸다.

염마를 본 것 같다는 생각.

그것이 악혈이 품을 수 있었던 마지막 생각이었다.

뒤이어 악천이 그 자리에 왔을 때 폭천의는 재미있어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

악천은 그 자리에 폭천의가 있을 거라고는 상상을 하지 못했다.

둘 중 한 사람이 쓰러지고 한 사람만 남는다면 남는 것은 당연히 악혈이어야 했다.

가끔 폭천의가 알 수 없는 힘으로 폭주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혈교주도 말을 하지 않았던가.

당분간은 그 힘을 사용하지 못할 거라고.

‘혹시 혈교주가 거짓말을 한 것인가? 우리가 폭천의에게 죽기를 바라고 잘못된 정보를 우리에게 흘린 게 아닌가?’

일단 그렇게 생각을 하고 나자 왠지 그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했다.

‘우리 뒤를 따라왔을지도 모를 일이군. 그 간교한 인간이 우리만 믿고 그 일을 맡긴다는 것부터가 이상한 일이기는 하지.’

악천은 폭천의를 무섭게 노려보고 도를 들었다.

“멍청하기는 셋 중에 제일 멍청하더니 딱 기대에 부응하는군. 이제 그걸 가지고 어쩌려고 그러지?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 봐도 그렇게 해서 너에게 이익이 될 건 없을 텐데.”

폭천의는 세상에 저런 바보를 다 봤냐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악천은 그 말이 도발일 거라고 생각하면서 도에 기운을 집어넣었다.

폭천의의 말이 맞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된 이상 도를 내리며 그의 말대로 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잔말 말고 벽력탄이나 내놓아라. 이놈!”

그러다가 악천은 폭천의가 지금 몸에 그것을 지니고 있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을 떠올렸다.

만약 그렇다면 폭천의에게 큰 충격을 가하는 것이 위험할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폭천의는 악천을 그다지 신경 쓰는 것 같지도 않았다.

벽력탄을 가지고 있을까…….

화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확실할 듯했다.

좀 전에만 해도 화탄을 터뜨려서 그 소리로 유인을 하지 않았던가.

화탄에 불을 붙여 바닥에 힘껏 던지면 그 충격에 터진다고 하는 것 같았는데 불을 붙이지 못하게 하면 폭천의가 손을 쓰기 전에 뺏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일단은 부딪쳐 보는 수밖에 없다.’

생각만 해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일이라고 여기며 그는 마침내 폭천의를 향해 달려갔다.

그러나 폭천의는 대단한 동작을 하지도 않은 채 악천을 맞이했다.

악천이 기운을 10성까지 끌어올리고 도를 휘둘렀지만 그것은 갑자기 제 앞에 벽처럼 나타난 불길에 가로막혔다.

그것이 언제 나온 것인지 악천은 알지 못했다.

없던 불이 생겨난 것인데도 그 온도는 한참 타오른 것처럼 뜨거웠다.

악천은 폭천의를 향해 짓쳐들다가 간신히 방향을 틀었는데 아직 닿지 않은 불 벽이 그의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는 듯했다.

설마!

그러나 악천은 그것이 실제로 일어난 일인지 환상인지도 알지 못했다.

순식간에 불길이 그를 에워쌌다.

“으아아아악!!”

무서운 불길이 그를 삼켰고 악천은 단 한 번도 상상해 보지 못했던 죽음을 맞이했다.

그 모습을 숨어서 지켜본 악군은 자기가 뭘 본 건가 너무 놀라서 도저히 움직이지 못했다.

그가 생각한 것은 그런 모습이 아니었다.

악혈과 악천이 폭천의에게서 손쉽게 벽력탄을 뺏고 폭천의를 죽인 후, 그다음에는 악혈과 악천의 싸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이런 결과는 상상하지 않았던 것이다.

폭천의는 악군이 온 것은 알지 못하는 듯했다.

“뭐야. 한 놈이 남아 있을 텐데 아직 안 온 모양이지?”

그런 소리를 한 것을 보면.

“그래도 우선 지금까지 모은 걸로 당분간 쓸 건 만들 수 있겠고. 굳이 기다릴 필요는 없겠지?”

악군은 폭천의가 하는 말을 들으면서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악혈. 악천……. 이럴 줄 알았으면 같이 움직일 것을. 너희가 폭천의에게 죽을 줄 알았으면 함께 움직일 것을……. 그랬으면 너희가 이렇게 허망하게 죽지는 않았을 것이 아니냐……!’

그의 얼굴이 불쌍하게 일그러지다가 갑자기 표독스러워졌다.

‘혈교주! 우리를 폭천의에게 보내서 우리를 죽이려고 생각한 것이군!’

어차피 혈교주의 말대로 폭천의에게 벽력탄이 있다는 것은 어느 정도 확인이 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고 혈교주가 처음에 말한 것도 그 정도였지만 그는 지금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사람이 워낙 큰일을 당하고 나면, 그리고 자신의 말도 안 되는 실수로 너무 큰 결과가 초래된 것을 보고 나면 머리가 잘 안 돌아가기도 하고 자기 쪽으로만 유리하게 돌아가기도 한다.

어쩌면 그 순간에 보인 폭천의의 모습이 너무 크게 보여서 폭천의 대신 혈교주를 상대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혈교주. 너를 용서하지 않겠다! 내가 반드시 너를 죽여 동생들의 원수를 갚을 것이다!!’

폭천의가 들을까 봐 크게 소리를 지르지도 못한 채 그가 울분에 차서 속으로만 고함을 질러대고 있었다.

* * *

갑자기 쏟아지는 비는 인간의 마음속에 숨겨둔 공포를 건드리는 것 같았다.

남들보다 강해지기 위해 수많은 시간을 노력하고 수련해 온 사람들도 갑자기 내리는 비를 보면 마음 한구석에서 불안한 생각이 꿈틀거렸다.

그래서 몇 갑자의 내공을 자랑하는 고수들도 비가 내리는 곳을 괜히 싸돌아다니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그들도 감기에 걸리는 게 무섭고 나이 들면서 몸이 약해지는 것이 겁이 나는 것이다.

악군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폭천의를 피해 도망치는 중이었다.

그리고 이제 충분히 그 영역을 벗어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말 내가 도망쳐야 하는 건가? 이 악군이?’

처음에는 상상하지 못한 장면을 보면서 너무 크게 겁을 먹은 것 같기도 했다.

‘그래. 내가 그럴 사람이 아니지. 그놈들이 멍청해서 당한 거야. 이럴 게 아니라 당장 폭천의 그놈을 쫓아가서……!’

악군의 마음은 하루에도 몇 번이나 널을 뛰었다.

지나치게 자신감이 넘쳐났다가 어떤 때는 땅속 깊이 파고들며 모든 게 다 두려워졌다.

그리고 악군이 운명처럼 다시 폭천의와 맞닥뜨렸을 때 그는 그럭저럭 자신감을 회복한 상태였다.

“…….”

폭천의가 보인 반응이 악군의 마음에 더욱 확신을 주었다.

원치 않는 상대를 원치 않는 곳에서 마주치고 말았다는 표정.

그 지독한 폭우만 아니었다면 두 사람은 갑자기 맞닥뜨리기 전에 서로 피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을 텐데 특별히 기감을 펼치지 않은 채 비를 피하는 것에만 집중하고 서두르다 그렇게 되어 버렸다.

둘 중 누가 더 난처했는지 가늠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폭천의가 먼저 자신의 불안을 드러냈고 그것을 본 악군이 자신감을 가지면서 관계는 금방 정립되었다.

“폭천의.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된 것을 보면 네놈과 내 인연이 꽤 질긴 듯싶구나.”

폭천의는 악군의 말에 대꾸하지 못했다.

차라리 악군이 그때 같이 덤벼들었다면 지금 이렇게 복잡한 일에 휘말리지는 않았을 터였다.

그래서 그는 지금 기분이 상당히 나빴다.

단전의 내공을 살펴보았지만 신통치 않았고 그마저도 그의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제 뜻대로 사용할 수 없는 힘.

그것은 어쩌면 차라리 없는 게 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힘이 없다면 낮게 엎드려서 세상에 순응하는 방법을 터득해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폭천의에게는, 딱 세상을 향해 성질을 부릴 만큼의 힘이 있었어서 오히려 그것이 지금의 그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

“내가 말을 하지 않았느냐. 폭천의.”

악군은 폭천의를 길들이겠다고 작정했다.

몇 대 정도 정신이 들게 쥐어박고 두려움을 각인시킨 후에 저를 따르게 만든다면 처음보다 훨씬 더 좋은 결과가 될지도 몰랐다.

단순히 벽력탄만 손에 넣는 것이 아니라 벽력탄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을 손에 넣는 것이다.

꽤 좋은 미래가 그의 눈앞에 그려졌다.

‘그때는 미친놈처럼 설치더니 지금은 이렇게 유순한 양이 되고…….’

왜 그렇게 된 건지는 몰랐지만 폭천의가 다시 날뛰기 전에 확실히 제압해 두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며 악군이 움직였다.

가만히 서 있던 악군의 신형이 순식간에 폭천의의 앞에 나타났다.

‘젠장!’

폭천의는 이제부터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질 거라는 것을 깨달았다.

늘 이런 식이었다고 생각하면서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악군의 손에서 섬광이 번쩍거리더니 폭천의의 뒷머리를 찍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무분별하고 무자비한 폭행이 이어졌다.

악군은 폭천의가 그렇게 순순히 당하는 것이 여전히 미심쩍었다.

그래서 실컷 그를 두들겨 패다가도 잠시 움찔하며 멈추곤 했다.

‘아니지. 지금은 그때와 상황이 다른 거야. 확실하게 길들여 놓을 시간이 있어.’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옆구리에 차고 있던 쇠사슬을 풀어 손에 감았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철컹철컹 소리가 났다.

폭천의는 아직 일어나지 않는 일을 상상하느라 더욱 진이 빠져가고 있었다.

악군은 쇠사슬을 손에 감은 후에 주먹을 말아쥐고 폭천의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때부터 무자비하게 폭천의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이렇게 있다가는 그대로 죽는다고 생각한 폭천의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품 안을 더듬었다.

일련의 동작들이 어떻게 펼쳐졌는지는 폭천의도, 악군도 알지 못했다.

다른 것은 몰라도 눈을 피해서 화탄을 꺼내 불을 붙이는 것만큼은 잘할 수 있었다.

그가 가지고 있던 것은 품질이 좋은 게 아니었다.

대체할 수 있는 재료로 불안한 마음이나 희석하자고 만들어 둔 거였는데 그게 손에 걸려 나왔다.

폭천의는 다른 생각을 할 틈이 없이 거기에 불을 붙였다.

그때까지는 악군이 모르게 마쳤다고 해도 불붙은 화탄을 들고 있는데도 악군이 모를 수는 없었다.

순식간에 상황이 변했다.

그것이 불발로 끝날지, 악군의 몸을 날려 버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일단 악군의 얼굴에 긴장감이 서렸고 폭천의는 잠시간 다시 우위를 점했다.

“포, 폭천의…….”

악군은 비굴한 소리로 폭천의를 부르며 얼굴에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러나 악군을 바라보는 폭천의의 얼굴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폭천의는 악군을 향해 화탄을 던지며 몸을 피했다.

악군은 화탄이 터지기 전에 최대한 도망치려고 몸을 날렸지만 화탄은 만족스러운 결과를 보여주지 않았다.

터지기는 터졌지만 악군의 허벅지 살점을 날려 먹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폭천의는 이제부터 자기가 할 일이 많아지겠다고 생각하며 속으로 투덜거렸다.

그리고 악군을 향해 다가가 그를 엎어뜨려 놓고 등 위에 올라앉은 채 두 손으로 악군의 입을 틀어막고 얼굴을 힘껏 당겼다.

“으으으으읍!!”

악군이 질식해서 죽을 것인지 목뼈가 부러져서 죽을 것인지 폭천의도 알지 못했다.

악군은 설마 자신의 끝이 그렇게 비참할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울부짖으며 숨을 쉬려고 몸부림을 쳤지만 그 상태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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