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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300화 (300/470)
  • 제300화

    300화

    “너희가 나서야겠다. 다른 놈들은 믿을 수가 없어. 지금이 기회일지도 모른다. 지금이라면 폭천의는 힘을 쓰지 못할 거다. 그놈에게서 벽력탄을 뺏어와라. 그것만 손에 넣을 수 있다면 그간의 모든 실패는 다 극복하고도 남는다.”

    “알겠습니다. 형님.”

    다른 이들이 있는 자리에서는 반드시 혈교주라고 칭하지만 지금은 눈치 볼 사람이 없었다.

    그들은 그동안 늘 하고 싶었던 일을 드디어 할 수 있게 됐다는 사실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지금은 힘을 사용할 수 없을 거라는 말이 그들의 어깨에 날개를 달아준 것 같았다.

    ‘벽력탄만 손에 넣을 수 있다면 당장 신교를 우리가 접수하는 것도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밖으로 나가는 이들의 머릿속에는 어느새 그런 생각들이 지나갔다.

    벽력탄을 손에 넣는다면 그걸 가지고 혈교주에게 돌아갈 이유도 없을 것이다.

    왜 그런 짓을 한다는 말인가.

    벽력탄을 손에 쥔 자기들의 모습을 상상하자 전능감이 느껴졌다.

    모두의 머릿속에 하나같이 비슷한 생각들뿐이었다.

    폭천의가 벽력탄을 만드는 데 성공했을 거라는 사실을 처음 알아차린 사람은 혈교주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벽력탄을 만들기 위해서는 각종 재료가 필요하고 그런 재료들은 쉽게 구할 수가 없었다.

    구경하기도 어려웠지만 일단 어디에 있는지 알게 된다고 하더라도 막대한 비용 때문에 그것을 사들이기도 쉽지 않았다.

    만약 혈교라는 조직이 없었다면 폭천의는 절대 그 일을 성공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어차피 서로가 서로의 이해관계 때문에 지금껏 서로의 곁에 있으면서 버텨 왔던 것이기에 그들 사이에 유대감이나 신뢰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마우린 같은 놈들이 별종인 것이다.

    혈교주도 폭천의가 벽력탄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좋아서 한 것은 아니었다.

    가끔 스스로도 통제가 되지 않는 듯 폭주하는 폭천의를 보고 몇 사람이 살의를 느끼고 실제로 폭천의를 죽이려고 하는 바람에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놔두면 써먹을 일이 있을 거라고 했지만 그 말로는 넘어가지 않았고 결국 그가 벽력탄의 제조법을 알아낸 것 같다고 말을 해 주었다.

    그동안 혈교로 흘러들어온 막대한 돈을 거기에 썼다는 얘기도 했고 이제는 완성 단계라고, 시제품을 몇 개 정도 만들었을지도 모른다고 그 이야기까지도 했다.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혈교주도, 폭천의도.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못 미더워도 다른 사람에게 기대고 의지하는 것.

    그것이 어설프게 힘을 가진 자들의 숙명이었다.

    * * *

    “대체 어디로 간 거야?”

    오래전부터 혈교주의 곁을 지켜왔던 악군, 악혈, 악천은 점점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성과 없는 숨바꼭질은 아무 재미가 없었다.

    게다가 본인이 술래가 되면 더더욱 그랬다.

    “……저게 뭐지?”

    슬슬 짜증이 치밀기 시작했을 때 악천이 앞을 가리키며 물었다.

    사람들은 우거진 나무 밑에 무언가 이질적인 것이 삐죽 나온 것을 보았다.

    자연의 색과는 다른 염료.

    그들은 그것을 보고 그게 폭천의를 찾아 나선 이의 시신 같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가까이 다가간 그들은 걸음을 그대로 멈췄다.

    그들은 처음 그 시신을 보고 느꼈던 이질감의 이유를 뒤늦게 알았다.

    눈앞에 드러난 것은 분명히 두 개의 다리인데 그게 왜 그렇게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가 했더니 허리가 사라져버린 후 멋대로 나뒹굴고 있었던 것이다.

    머쓱하게 남은 두 다리가 축축한 흙바닥 위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얼굴을 잔뜩 찌푸리던 사람들은 어느새 시신을 향해 다시 다가갔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다.

    ‘이게 화탄의 위력이라는 말인가.’

    그들의 머릿속에는 그 생각이 급하게 지나갔다.

    그 생각을 하고 나자 그때부터 정신없이 피가 끓는 듯했다.

    ‘화탄. 벽력탄. 가져야 한다. 반드시 손에 넣어야 한다.’

    여태까지 함께 움직이던 사람들이 그때부터는 쏘아진 화살처럼 각자 제멋대로 날아갔다.

    더 빨리 폭천의를 찾기 위해서.

    그리고 다른 사람보다 더 빨리 화탄과 벽력탄을 손에 넣기 위해서.

    사실 누가 먼저 그것을 손에 넣는가 하는 것은 크게 의미가 없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누가 먼저 손에 넣었는가 하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그것은 영약과 마찬가지였다.

    가장 나중에 손에 넣으면 그 사람이 임자가 되는 것이다.

    가장 나중에 웃는 사람이 진짜 웃는 사람인 것처럼 벽력탄의 주인이 누가 될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서둘러 달리던 그들은 어느 정도 서로를 견제하기는 했지만 아직은 적의를 드러내지 않았다.

    웬만하면 끝까지 본심을 숨길 생각도 있었다.

    혼자 움직이자면 만일의 사태에 혼자서 맞서야 하지만 같이 움직인다면 다른 이들의 힘을 이용할 수 있는 것이다.

    모두의 머릿속에서 같은 생각이 돌아갔고 다른 이들이라고 그것을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저기도 있습니다. 미친놈의 자식. 뭘 그렇게 써 댄 거야? 아깝게!”

    악혈이 짜증스럽게 소리쳤다.

    이미 그의 머릿속에서 화탄과 벽력탄의 주인은 자기였기에 폭천의가 그것들을 쓴 걸 볼 때마다 화가 치밀었던 것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놈이 화탄을 전부 다 써 버리기 전에 빨리 찾아내야 한다!”

    악군이 먼저 말하고 경공까지 전개하며 몸을 날리자 악혈과 악천도 그의 뒤를 따랐다.

    그때 어디선가 폭음이 들려왔다.

    산 아래에서는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미미한 폭음이었지만 그들은 그 소리를 놓치지 않았다.

    ‘화탄이다!’

    그들은 일제히 그 생각을 하며 공력을 끌어 올렸다.

    폭천의가 그곳에 있다는 생각 때문에 남들보다 늦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악군은 함께 경공을 펼쳐 가던 도중 생각을 고쳐먹었다.

    아직 폭천의가 벽력탄을 쓴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화탄만으로도 충분히 사람들을 처리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벽력탄을 사용한다면 그때의 효과는 상상도 하기가 싫었다.

    벽력탄은 폭천의 입장에서도 쉽게 사용하기가 꺼려지기는 할 터였다.

    그것 하나를 만들기 위해 들어가는 돈을 생각하면 바로 답이 나왔다.

    웬만하면 쓰지 않고 있다가 정말 자기 뜻을 이룰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을 때 사용하고 싶을 것이다.

    그렇지만 일단 목숨은 건져야 하니 악군과 악혈, 악천이 같이 들이닥친다면 벽력탄을 하나 정도 터뜨릴 수도 있고 그때는 세 사람이 함께 덤빈다고 해도 폭천의를 제압할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수 없었다.

    악혈과 악천은 악군이 슬쩍 뒤로 빠지는 것을 알아차렸고 그 이유도 어느 정도 눈치챘지만 멈추지 못했다.

    두 사람이라서 결정하는 것이 쉽지 않았던 것이다.

    조금만 차분히 생각해 보면 현장에 먼저 도착해서 벽력탄을 먼저 손에 넣는다고 해서 그것을 끝까지 지킬 수 있을 거라는 보장이 없다는 걸 알 수 있었는데 그들의 마음에는 이상한 기대감이 생겼다.

    일단 그걸 손에 넣기만 하면 뺏기지 않고 도망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악혈과 악천은 점점 더 경공의 속도를 높여갔다.

    악군으로서는 최상의 상황이었다.

    저러다가 하나 정도는 폭천의의 화탄에 죽어 버리면 더 좋을 것 같기도 했다.

    악군은 이미 폭천의의 벽력탄이 제 손에 들어오기라도 한 것처럼 웃음을 지었다.

    더 이상은 경공을 펼치지도 않았다.

    소리가 들려온 곳이 어디쯤인지는 그도 알고 있었다.

    멍청한 놈들이 서로 싸우는 동안 우선 공력을 안정시키고 기다리고 있다가 그들이 공력을 소진한 순간 독수리처럼 날아가 벽력탄을 낚아채는 것이다.

    행복한 상상을 하는 동안 악혈과 악천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서 나뭇가지가 몸서리를 치며 떨어대고 있었다.

    이름 모를 새들이 푸드득 날아올랐고 폭음의 찌꺼기는 이제 전혀 남지 않았다.

    쫓고 쫓기는.

    누가 누구를 쫓는 것인지 쉬이 판단할 수 없는 숨 막히는 추격전이 이어졌다.

    * * *

    폭천의를 먼저 발견한 사람은 악혈이었다.

    악천은 계속 악혈을 놓치지 않고 따라오다가 마지막 순간에 힘이 빠지기 시작한 듯했다.

    힘을 내보면 그를 따라잡을 수도 있을 것 같기는 했지만 벽력탄을 손에 넣은 후에 공력 싸움으로 번지면 곤란해지겠다는 것을 깨달았다.

    ‘젠장!’

    악천은 이를 악물었다.

    아직 기회가 다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분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악천은 자기가 얼마나 운이 좋았는지 알지 못했다.

    먼저 폭천의을 발견했을 때 악혈은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승자가 된 기분은 언제나 말할 수 없는 고양감을 주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지기까지는 시간이 별로 걸리지도 않았다.

    사람이 없었다.

    화탄에 맞고 죽어 있어야 할, 너저분해진 시신이 없었다.

    그리고 폭천의는 나무에 기댄 채 삐딱하게 서서 악혈을 노려보고 있었다.

    마치 악혈이 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들을 끌어들이려고 그랬다는 듯이.

    바닥에는 움푹 파인 자국이 있었고 주위에는 매캐한 냄새가 남아 있었다.

    “그래도 나는 네가 세 번째에 나타날 줄 알았는데. 악천이 먼저 오고 그다음이 악군, 그다음이 너일 거라고 생각했거든. 나도 한물갔네. 그것도 틀리고 말이야. 그래도 일단 여기까지 찾아와 준 건 고마워. 덕분에 모자랐던 재료가 채워지고 있거든.”

    반말을 하는 것에 발끈해야 했지만 악혈은 그러지 못했다.

    때때로 이상해지는 놈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저에게까지 이런 적은 없었기에 상당히 당혹스러웠다.

    좀 더 솔직하게 말을 하자고 들었다면 무서웠다고 해야 했을 것이다.

    폭천의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고 구덩이로 다가가서 한가하게 불을 피웠다.

    불을 붙이는 화섭자는 남들이 가지고 다니는 것과 조금 달라 보였다.

    대나무 통인 것은 같았지만 그 안에 단순히 불씨를 머금은 종이뭉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불이 더 잘 붙도록 화약 재료 같은 게 들어 있는 게 아닐까 할 정도로 기이한 냄새가 났다.

    폭천의는 그곳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혼자만의 의식을 치르는 듯이 구덩이 안에 불을 붙였다.

    화섭자 안에 들어 있던 물질이 이미 구덩이 안에도 들어 있었는지 구덩이 안에서 갑자기 커다란 불길이 치솟았다.

    그 모습을 보고 악혈은 좀전의 감정은 잊은 채 저도 모르게 웃어 버렸다.

    다른 이들은 무공으로 일으킬 불을 화섭자를 이용해서 피우는 꼴이 가소로워서였다.

    폭천의는 악혈이 왜 웃는지 알고 있다는 듯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악혈보다 더 환한 웃음을 지었다.

    “재미있나?”

    “…….”

    악혈은 폭천의가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알량한 재주를 가지고 있다고 지금껏 오냐오냐해 줬더니 그걸 믿고 설친다고 생각해서였다.

    “벽력탄을 가지고 있느냐. 폭천의.”

    악혈이 물었다.

    지금 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벽력탄이었다.

    폭천의를 죽인다고 해도 벽력탄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면 모든 게 수포가 된다.

    지금까지 겪어 왔던 모든 실패를 단숨에 잊게 하고 보상해 줄 벽력탄.

    그게 어디에 있는지 우선 알아야 했다.

    가능하면 폭천의가 기이한 힘을 되찾기 전에 끝내 버리고 싶어 그는 폭천의에게 다가갔다.

    폭천의는 그 모습을 보고 웃을 뿐 도망치려 하지도 않았다.

    “사람의 몸을 태우고 뼈를 갈면 내가 원하는 걸 얻을 수가 있지. 벽력탄을 갖고 싶나? 갖는 걸로 만족하나? 더 큰 걸 바라보면 어떻겠어? 되게 해 주지. 내가.”

    웬 헛소리를 하는 거냐고 외친 것과 동시에 그의 신형이 폭천의의 앞에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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