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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299화 (299/470)

제299화

299화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이냐.”

황제가 묻자 아진이 아직 확실한 것은 아니고 어디까지나 추측이라고 일단 여지를 남겨두었다.

“그런 말은 할 필요도 없다. 그렇게 말한 것 중에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일이 거의 없다는 것을 내가 모른다는 말이냐. 아진이 네가 추측한 것은 지금껏 거의 들어맞았고 네가 말한 대로 되어 왔다.”

“소신의 추측도 아니고 역천마의의 추측입니다.”

“역천마의의 추측을 여기에서 말한다는 것은 아진이 너도 그 말이 맞을 거라고 생각해서 그런 거겠지. 그거면 짐에게는 충분하다. 그리고 벽력탄이 없다고 해도 폭천의와 혈교를 처리해야 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폐하.”

“황군이 필요하면 내주도록 하겠다. 아무리 벽력탄을 갖고 있다고 해도 제깟 놈이 백만 황군을 당하겠느냐!”

백만 황군을 지금 당장 전부 동원하는 것은 어렵겠지만 황제의 의지는 대단했다.

아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안다는 듯 황제는 당장 동원이 가능한 황군의 수를 대략 알려주었다.

“변방의 대치 상황이 전과 같지 않다. 경계를 마주한 곳과 오랫동안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해 왔고 토번과 토욕혼은 약속을 잘 지켜주고 있다. 그것도 아진이 네 덕이지.”

그렇다면 당장 동원 가능한 수가 어느 정도인지 물을까 했지만 엄청난 살상력을 가진 벽력탄을 막기 위해 황군을 동원한다는 것은 그들을 고기 방패로 내세운 것 외에 아무 의미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폐하. 우선은 방법을 강구해 보고 저희의 힘만으로 되지 않을 때 다시 요청을 드리겠습니다.”

황제도 아진이 그러는 이유를 모르지 않았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일이 끝도 없이 터진다는 것이 정말 걱정스럽구나. 은둔 고수의 수는 또 얼마나 많다는 말이냐.”

황제는 관과 무림이 진지하게 대립한다면 어떻게 될지 생각하는 듯했다.

관이 압도적으로 많은 황군의 수를 앞세워 우위를 차지할 거라고 알려져 있지만 벽력탄은 거기에 변화를 초래할 수도 있었다.

“그 일은 반드시 처리해야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말이다.”

황제는 아진에게 당부했고 아진도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폐하. 소신도 이번에 서 공자님을 도와 그 일에 힘을 보태고 싶습니다.”

하월이 말하자 린린이 아진을 바라보았다.

하월이 간다고 도움이 될까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일은 자기들에게 먼저 물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아진은 그 말이 오히려 고마웠다.

하월은 아진의 작품이라고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소청과 함께 제자 같기도 했다.

“아진이 필요하다고 한다면 짐도 허락하겠다.”

그러자 하월이 이번에는 아진을 바라보았다.

“제가 필요할 겁니다. 제가 도움이 될 겁니다. 공자님.”

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함께 가시지요.”

하월은 환호성이라도 지르고 싶은 것 같은 표정이었다.

드디어 아진에게 인정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사안이 긴박한 만큼, 결정되어야 할 사항들이 정리되자 황제도 더 이상 그들을 붙잡지 않았고 일찌감치 놔 주었다.

선이남은 그들을 따라 나오면서 자기도 함께 가면 좋을 텐데 아쉽다는 마음을 보였다.

그러나 솔직한 말로 선이남은 크게 도움이 될 일이 없었다.

다행히 선이남 자신이 먼저 그 사실을 깨닫고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다. 나보다 소청이가 훨씬 더 도움이 되겠지. 그리고 나는 황상의 곁에서 해야 할 일이 있고 말이다. 내가 해야 할 일을 열심히 하겠다.”

선이남은 멀리까지 따라 나오면서 아진과 린린을 격려했다.

이번 일은 쉽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내가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달려갈 테니까 말해 줘. 아진아.”

위험한 곳에 동생들만 보내는 것에 대한 죄책감.

그리고 황상의 곁에 자기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

그 두 마음이 치열하게 싸우는 듯 그의 이야기가 갈팡질팡했는데 아진이 그런 선이남을 보며 웃으면서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형님. 금방 돌아올 겁니다. 금방 돌아와서 말씀드릴게요.”

“그래…… 꼭 그래야 한다.”

선이남은 그들의 뒷모습을 오래오래 바라보았다.

* * *

급하게 호신강기를 끌어올리려던 마우린은 공력을 다 모으지 못하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두 팔을 모아 얼굴만 막았다.

그렇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거의 아무것도 없었다.

팔을 벤 검이 뼈를 가르고 들어왔다.

“……!”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고통 따위는 잠시 부정하고 우선은 살아남을 생각을 해야 했다.

그는 머리를 굴렸다.

그가 아는 폭천의는 그런 자가 아니었다.

이 정도로 검을 다룰 수 있는 자도, 강기를 사용할 수 있는 자도 아니었던 것이다.

때때로 이상한 모습을 보이는 때가 있었지만 그것은 정교한 눈속임이라고 믿었다.

뭐가 문제였을까.

오해는 어디서부터 시작된 거였을까.

폭천의가 검을 바닥에 던진 채 그의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거참 마음에 안 드네. 몇 번 신호 보냈는데. 알아서 멈출 줄도 알아야지. 꼭 이래야겠어? 내가 나쁜 놈 같잖아.”

뻔뻔하게 말하는 폭천의를 보면서 마우린은 할 말을 잃었다.

책임져야 할 사람은 분명히 폭천의였다.

일을 추진하고 그 일을 맡아 했는데 그 일이 실패했다면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도 그는 어떤 처벌도 받지 않았다.

혈교주는 폭천의를 징계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굴었다.

폭천의도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동안 작전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혈교의 사람들이 위험을 불사했던가.

그 과정에서 죽어 간 사람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

그런데 그 모든 것이 의미를 잃은 것이다.

실패한 계획 때문에 사람들이 죽었는데 아무도 책임지지 않으면 죽어간 동료들은 뭐가 되냐고.

마우린은 혈교주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동안 혈교주의 수신호위로서 그가 맡아왔던 역할을 생각한다면 마우린이 그런 말을 한 것이 의외이기는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렇다고 혈교주가 주저하지도 않은 채 자신을 폭천의에게 던져 줄 거라고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던져 주었다.’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자신에게 던져진 것이 폭천의인 줄 알았다.

그래서 혈교주 역시 폭천의에게 불만을 품고 있었던 거라고 생각했다.

폭천의를 응징하는 것이 모두의 공통된 생각이라고 여기며 폭천의를 향해 손을 썼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잘못된 것을 깨달았다.

어떻게 폭천의가 그런 힘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인지.

그는 폭천의가 자신보다 훨씬 약한 사람도 처리하지 못해서 도망치는 모습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냥 도망치는 척 한 것이 아니라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될 정도로 목숨을 걸고 도망친 거였다.

그런데 그 모든 게 전부 다 거짓말이라는 것처럼 지금 그는 그 자리에서 전혀 다른 모습으로 악귀처럼 서 있는 것이다.

두 개의 주먹이 옆구리로 짓쳐들었다.

컥!

급히 숨을 들이쉬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부족했다.

연달아 주먹이 날아들고 발길질이 이어졌다.

이해되지 않는 강기.

어떻게.

어떻게…….

마우린의 머리는 이해되지 않는 혼란으로 정신없이 뒤엉켰다.

“그만해라. 폭천의. 마우린을 죽일 셈이냐.”

마침내 혈교주의 목소리가 들렸을 때 마우린은 이제 살았다고 생각했다.

너무 늦은 감이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지금이라도 그렇게 말을 해 주었으니 고맙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폭천의는 혈교주의 말을 듣고도 멈추지 않았다.

“뭐로 끝내줄까. 주먹? 아니면 검?”

“폭천의. 이제 그만 해라.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다. 그 힘을 끌어 쓰는 게 너에게도 좋지 않다는 걸 알지 않느냐.”

“그걸 걱정하는 사람이 이놈이 멋대로 주둥아리를 놀리게 놔두나?”

폭천의가 하는 말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얘기였다.

감히 누가 혈교주에게 그런 식으로 입을 함부로 놀릴 수 있다는 것인가.

하지만 마우린은 지금 그런 것을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어느 때부턴가 폭천의의 주먹이 마우린의 단전이 있는 곳에 집중되었다.

설마 단전을 부수려고 하는 것인가.

기어이 죽여야겠다고 생각한 건가.

그러나 그런 의문도 오래 가지 않았다.

폭천의는 마침내, 기어이, 마우린의 단전을 부숴 버렸다.

그리고 후련하다는 듯 그를 발로 걷어차더니 마우린을 어깨에 걸치고 사라졌다.

쯧-!

혈교주는 고개를 짧게 저었다.

폭천의가 폭주하는 것은 한두 번 있었던 일이 아니었다.

평상시의 그는 다른 이들 사이에서 두각을 나타낼 일이 없었다.

그런데 한 번씩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는 것 같을 때가 있었다.

그때는 혈교주도 그를 제어하지 못했다.

꽤 괜찮은 계획이었는데 그 계획이 실패한 후 폭천의는 불안정한 상태였다.

그래도 폭천의를 건드리지 말라고 사람들에게 따로 말을 해 두지는 않았는데 그게 불찰이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나간 폭천의는 돌아오지 않았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사흘이 지나도록.

폭천의를 찾아 나서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는데 나흘이 지나고 닷새가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자 그때는 더럭 겁이 났다.

폭천의가 사라진 혈교.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떠올리자 폭천의의 존재 가치를 알 것 같았다.

혈교가 지금껏 그나마 명맥을 유지해 올 수 있었던 것은 폭천의의 존재 이유가 컸다.

폭천의는 그럴듯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고 그 계획이 성공할 거라는 확신을 사람들에게 심어주었다.

그래서 폭천의가 있으면 돈을 끌어모으는 게 어렵지 않았다.

이번만 해도 그랬다.

여러 가문에서, 여러 사업장에서 그들에게 큰돈을 흔쾌히 쾌척했다.

그들이 요구한 것은 자기들이 제거하고 싶은 곳들을 없애 주는 거였고 그 정도 일은 어려울 것도 없었다.

천마신교에서 혈마 수라대를 괴멸했을 때만 해도 계획은 순풍에 돛을 단 듯했고 그들에게 돈을 주고 일을 맡기려는 사람들은 급속도로 늘었다.

그러다가 수많은 실패가 쌓이면서 이제 더 이상은 그 계획을 유지할 수도 없게 됐고 그들에게 돈을 주었던 자들을 피해 다녀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래도 폭천의만 옆에 있으면 다시 새 일을 도모할 수도 있었을 텐데.’

혈교주는 남아 있던 수하들을 전부 풀어 폭천의를 찾아오도록 했다.

죄인을 다루듯이 하지 말고 공손하게 대하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러나 폭천의를 찾으러 간 이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혈교주의 곁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그의 사제들뿐이었을 때 그들은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산에서 내려간 녀석들은 폭천의에게 죽었는지 모릅니다.”

“그놈이 어떻게 그런다는 말이냐. 이미 한 번 힘을 쓰지 않았느냐. 그렇게 하고 싶어도 그러지는 못할 것이다. 다시 힘을 사용하기 위해서 최소한 얼마간은 시간이 필요할 거야.”

정확히 뭔가를 아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동안 지켜보면서 파악한 것이 있었다.

“그 이상한 힘을 사용할 거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벽력탄을 사용했을 거라는 말이냐.”

“벽력탄보다 작은 화탄도 만들지 않았습니까. 그놈들을 처리하는데 벽력탄까지 쓸 필요는 없었을 것입니다.”

“…….”

혈교주는 잠시 생각을 하다가 그들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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