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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297화 (297/470)

제297화

297화

“뭐. 내가 잊어버릴 일이야 없겠지만 그래도 적어야겠다.”

그러고는 먹물이 담긴 조그만 통과 붓을 꺼내 주소를 쓰려고 하다가 아진을 바라보았다.

“아. 너 못 쓰지?”

글씨를 쓸 줄 모르는 건 아니지만 각각 어떤 뜻을 가진 단어인지 모르니 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서울은 한자로 못 쓰는데…….

잠깐 벽에 부딪힌 아진은 음만 맞춰서 주소를 전부 써넣었다.

그러면서도 정말 린린이 그걸 보고 찾아올 일이 생기기는 할까 궁금해했다.

“그래도 희망이 생기기는 하네.”

아진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만약 자기가 그곳으로 돌아가게 된다고 하더라도 더 이상 그곳에서의 삶이 황량하지만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 * *

위험 요소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삶은 영위되어야 했다.

이제는 소극적으로 대응을 하는 것 외에 혈교도의 본거지를 찾아내 그들을 숙청하기 위한 방법도 논의되었다.

역천마의는 린린의 기대에 부응해 성과를 냈고 특별히 꾸린 추살조에 영약과 비급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 혈교 무리를 쫓게 한 추살조 중 많은 사람이 아진에게서 무공 지도를 받고 싶어 한다는 말이 전해져 아진은 난감해하면서 다시 신교를 찾았다.

역천마의와 마두들의 위치가 아직 불안하고 지금의 체제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아진은 자기가 할 수 있는 게 있으면 웬만하면 도와주고 싶은 생각이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설마 추살조가 자기에게 특훈을 받고 싶다고 할 줄은 몰랐는데 자신이 마도들에게 사랑받는 건 어쩔 수 없는 운명인 것 같다고 생각하며 이제 자신의 운명을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야. 린린. 너는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냐? 나한테서 마성의 매력이 솟아나나? 왜 마도들마다 나를 좋아하지?”

“아버지가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그 병은 못 고치시나 봐? 그런 병에는 약도 없는 거지?”

“그래. 부정하고 싶겠지. 왜 질투가 안 나겠냐. 아무리 오라버니라고 해도 질투가 나는 게 당연하지.”

신교의 분위기는 그곳을 떠날 때에 비해 훨씬 유해져 있었다.

위기가 그들에게는 좋은 기회가 된 듯했다.

역천마의는 처음에 인사했을 때 외에는 만나기도 어려웠다.

두 극성의 영약을 혼합해 새로운 효과를 내는 영약을 만드는 걸 시도하는 중인데 계속해서 내공을 주입하며 그 과정을 면밀하게 지켜봐야 한다고 했다.

린린은 어서 들어가 보라며 역천마의를 들여보냈고 그 후에는 추살조를 맡은 조장 흑요운이 아진을 안내하고 역천마의의 말을 전했다.

“역천마의님께서는 혈교주보다 더 위험한 사람이 폭천의일 거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대법도 폭천의가 만든 걸 거라고 생각하고 계신데 신교에 있을 때 무골이 뛰어난 전사들에게 위험한 술법을 시행하다가 여러 명을 죽게 하고 쫓겨난 자라고 들었습니다. 그들의 본거지를 치려고 할 때 가장 어려운 상대가 폭천의일 거라고 하셨고 폭천의를 죽이기 위해서는 소협의 도움이 필요할 거라고 하셨습니다.”

“폭천의가 누굽니까?”

역천마의가 왜 린린 대신 자신을 지목했는지, 자기가 뭘 해야 한다는 건지도 궁금했지만 폭천의에 대한 의문이 더 컸다.

“천재로 태어났고 교주님을 모시는 마의가 될 수 있었지만 지식에 대한 과도한 탐욕 때문에 미친 자라고 하셨습니다. 전사들을 상대로 몰래 대법을 시행하다 쫓겨났을 때 폭천의의 나이가 여덟 살이었다고 했습니다.”

“폭천의에 대해서는 어떻게 알게 된 것이냐.”

침묵을 지킨 채 이야기를 듣고 있던 린린이 물었다.

“강기에는 저마다의 특징이 나타나지 않는지요. 본교의 무인들이 수색하던 중에 실종자의 시신 몇 구를 발견했습니다. 원래대로라면 시신을 그냥 두고 도망치지는 않았을 텐데 급습이 성공해서 그런지 뒤처리를 하지 못하고 급히 몸만 내뺀 것 같았습니다. 태우려고 한 것 같은데 타지 않고 남은 부분이 있었고 그 부분을 토대로 역천마의님이 알아낸 것입니다.”

“폭천의가 신교를 떠난 후에 역천마의가 폭천의를 만난 일이 있다더냐.”

“아닙니다. 교주님.”

“그러면 그자가 아닐 수도 있지 않으냐. 그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강기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다.”

린린이 의문을 제기하자 추살조의 일원이 그 말에 수긍하며 대답했다.

“역천마의님은 폭천의가 단전을 만들 수 없는 몸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었고 역천마의님이…….”

“그래. 역천마의가 시술을 해 주었지. 단전을 만들어 주었다. 술법으로 말이지.”

린린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때의 일이 기억이 나는 모양이었다.

아진은 그 말을 들으면서 그들이 지금 몇 년 전 얘기를 하는 건지 궁금해했다.

폭천의가 역천마의보다는 나이가 훨씬 적은 것 같았지만 그래도 백 살은 넘는 것 같았는데 분위기가 분위기인지라 그것을 묻지는 못했다.

“역천마의는 지금 아마도 죽고 싶겠구나. 자기가 한 행동을 후회할 거고 말이다.”

“설마 역천마의님이 그러시겠는지요. 교주님. 화를 내시기는 했지만 크게 자책을 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조장의 말에 린린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다행이군. 그래야 역천마의지. 그래서 강기를 알아본 것이구나. 단전을 만들어 준 사람이 역천마의였고 그 단전에 내공을 쌓는 심법 역시 역천마의가 고안해서 전수했을 테니 그걸 몰라볼 수가 없었던 거야.”

그들끼리는 이해하는데 전혀 어려움이 없는 것 같았지만 아진은 단전이 만들어지지 않는 몸이라는 부분부터 조금 이해가 안 되고 있었다.

“단전이 만들어지지 않는 몸도 있어?”

아진이 묻자 린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단전이 기형으로 만들어져서 내공이 모이지 않는 사람도 있고 그런 문제를 갖고 태어나는 사람들이 간혹 있어. 그 문제가 끝까지 해결되지 않으면 내공은 포기하고 외공 무공을 익히는 것으로 방향을 바꾸기도 하고.”

“아아.”

린린은 외공 고수로 유명한 몇몇 사람도 단전이 기형이라서 어쩔 수 없이 전향한 경우라고 말을 해 주었다.

“역천마의는 정말 대단하네. 그런 단전도 고칠 수 있었다는 거잖아.”

“역천마의가 하려고 마음을 먹기만 하면 사실 못 할 일은 별로 없어.”

린린이 말하자 그 자리에 있던 추살조의 조장과 조원들의 얼굴에 웃음이 지어졌다.

역천마의를 향한 린린의 절대적인 믿음을 보는 것이 좋은 듯했다.

“일단은 하던 얘기를 계속해 보아라.”

린린이 조장에게 말하자 그가 공손하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 말을 이어 갔다.

“역천마의님의 말씀으로는, 그 사람이 폭천의일 거라고 생각하고 대비를 한다면 혈교주의 곁에 있는 자가 누구건 그들을 죽일 수 있을 거라고 했습니다.”

“역천마의가 그렇게 말했으면 맞을 것이다. 폭천의를 죽이지 못하면.”

린린이 그들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너희는 모두 죽을 것이다.”

처음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무거운 긴장감이 그곳을 채웠다.

* * *

아진은 추살조를 훈련하면서 그들이 대단한 근성과 훌륭한 무골을 가졌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이십여 명의 추살조 모두가 아진에게 한 번에 덤벼들어도 그들은 아진을 막지 못했고 아진은 단시간에 그들을 훈련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게다가 그 일은 꼭 천마신교만이 나서서 해야 하는 일도 아니었기에 아진은 추살조를 훈련하는 것보다 새로운 추살조를 구성하는 것을 제안했다.

그는 그 일에 정파와 마교의 구분을 두지 않고 황제에게도 도움을 청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린린에게 그 말을 했을 때 그녀는 역시 그 방법밖에는 없겠다며 수긍했다.

역천마의는 아진이 먼저 그 제안을 해 주기를 기다렸던 것처럼 환영하고 나섰다.

처음부터 아진에게 도움을 부탁한 것이 그것을 위한 게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였다.

영약 제조를 거하게 실패하고 나온 역천마의는 아진에게 그가 모르던 이야기까지 새로 들려 주었다.

“지금 드리는 말씀이 공자님께 도움이 될지 아니면 오히려 해가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래도 일단은 들어 두시는 게 좋지 않을까 합니다.”

앞에 그런 말이 깔리자 왠지 굉장히 듣고 싶지 않았다.

“굳이 얘기하려고 하실 필요는…….”

그러나 역천마의는 역시 듣는 게 좋을 거라고 말하더니 말을 이었다.

“이 일이 일어난 이후부터 계속 대비책을 찾고 방비를 하면서 저는 늘 제가 다른 곳을 보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아왔습니다. 그러다가 이번에 그 이유가 뭔지 알아냈지요. 혈교주는 처음부터 아무 문제가 아니었고 신교를 나가 혈교에 붙은 이들은 더더군다나 신경 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거론할 가치도 없는 자들이었고 오히려 그림을 복잡하게 만들어서 진실을 이해하는 걸 어렵게 만들었어요.”

“그러면 누가 문제지요? 폭천의라는 자입니까?”

“네. 그런데 사실은 폭천의도 별문제가 아니에요. 폭천의가 만드는 데 성공했을지 모르는 무기가 문제죠.”

“무기요?”

“네. 공자님은 벽력탄에 대해서 들어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아진은 자연스럽게 린린을 바라보았다.

역천마의는 그 자리에서 말을 하기 전에 린린에게도 미리 말을 하지 않은 듯했고 린린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벽력탄이 어떻다는 것이냐. 혹시 폭천의가 벽력탄을 만들었을 거라고 생각하느냐. 역천마의?”

“그러지 못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만 만약 이 일이 실패로 돌아간다면 그게 사용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일단은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린린은 혼란스러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아진은 벽력탄에 대해 들은 적이 없었고 역천마의가 설명을 대신해 주었다.

“벽력탄은 절대 고수가 전력을 다해서 펼치는 무공의 위력을 낼 수 있는 무기예요. 작은 구슬 모양인데 불을 붙여 던지면 주변이 초토화되고 반경 안에 있는 무인들을 죽일 수 있는 무기죠. 벽력탄을 가지면 삼류의 무인이 절대 고수를 몇 명이나 죽이는 것도 가능해요.”

“…….”

이건 반칙 아닌가?

우선 드는 생각은 그거였다.

지금까지 그런 건 없는 세계인 줄 알고 거기에 잘 적응을 해 왔는데 너무 갑자기 벽력탄이 튀어나오다 보니 괴리감이 컸던 것이다.

재미있는 건 현대 세계에서 온 아진에게도 그것은 낯설었다는 점이었다.

현대무기로 중무장한 군대가 한 시간 동안 집중포화해서 괴수에게 입힐 수 있는 손실을 1이라고 가정했을 때 갓 각성한 딜러가 입힐 수 있는 손실은 200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무기의 개발이나 투자가 줄어들고 그 비용과 관심이 헌터에게 옮겨진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묘하게 억울하네?’

서도진이 괴수가 출몰하는 지구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하다못해 몇십 년 전에만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그는 역천마의의 고민을 듣고 웃어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데…….

아진이 벽력탄에 대한 얘기를 들으면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이제 다른 무림인과 비슷했다.

‘나 현대인이잖아. 현대인인데 왜 이래…….’

아진은 눈물이 나올 것 같았고 린린이 그를 바라보았다.

“왜 그래. 오라버니?”

“나…… 원래 이런 거 엄청나게 잘 알고 그랬어야 했는데 갑자기 괴수들이 나오는 바람에 내가 살던 세계가 이상하게 바뀐 거거든. 아니었으면 벽력탄보다 훨씬 무시무시한 무기에 대해서도 잘 알았을 텐데.”

“그러니까 지금은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거잖아. 그렇지?”

어떻게 그 말을 그렇게 요약할까.

그러나 반박을 할 수 없다는 것이 가장 억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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