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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296화 (296/470)

제296화

296화

이 기회를 만들려고 그랬던 거구나 하면서 아진은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당문의 무인들이 한꺼번에 덤벼들었지만 그들의 검격은 생각만큼 단호하지 못했다.

눈앞에 있는 사람들이 동문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 다시 마음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당채운이 당무독 장로를 먼저 베자 다른 이들도 결단을 한 듯이 검을 휘둘렀다.

“이들이 죽어야 형제들이 명예로운 죽음을 맞이하고 편히 쉴 수가 있습니다.”

당채운의 말에는 깊은 울림이 있었고 그곳에 있던 사람들도 결국에는 그 말을 믿게 되는 듯했다.

“그건 어떻게 하는 거야?”

어느새 다가온 위도가 아진에게 조용히 물었다.

황금빛 장영이 부러운 모양이었다.

“아…… 이건 좀 복잡한데. 성력을 담아서 하는 거거든요. 이건 나중에 알려 드릴게요. 형님.”

“그래.”

위도는 흔쾌히 말했고 아진은 쓰러진 이들에게 장영을 날려 그들의 목숨을 거두었다.

그 와중에 한 사람이 끝끝내 틈을 노리고 도망치려 했지만 그건 정말 나쁜 선택이었다.

그나마 조금이라도 편한 죽음을 맞이할 기회를 스스로 날려버린 것과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위도는 자기도 여기까지 왔으니까 하나 정도는 확실하게 해치우고 가야 하지 않겠냐고 하면서 그를 득달같이 쫓아가서 쉴 새도 없이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한 번의 권격으로 능히 커다란 바위도 부술 수 있을 만한 힘이 연달아 가해지자 그는 버티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했다.

그 상태로도 이미 회복이 불가능해 보였지만 그래도 아진은 죽음을 확실히 하기 위해 성력을 부어 시신을 재의 상태로 돌렸다.

모든 일이 끝나자 당문인들이 하나둘 아진 일행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단주…… 미안하게 됐어.”

기본적으로 혈족으로 구성된 당문이니만큼 지위보다는 나이의 많고 적음에 따라 서로 예우를 하는 듯했는데 그것 때문에 처음에 당채운의 말이 사람들에게 잘 안 먹힌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아진은 한동안 그들이 왜 현무단주의 말을 믿지 않은 건지 의아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이곳의 일은 이제 스스로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으니 저희는 돌아가 보겠습니다. 사람들에게 알려 줄 이야기도 있고 불가와 도가 계열의 문파에 도움을 요청한다면 이번 일의 실마리를 찾게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린린과 역천마의에게도 말을 해 주면 모두 크게 안심하겠다는 생각에 아진은 마음이 더 급했다.

“어떻게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어색한 분위기에서 말을 걸어왔지만 아진은 인사를 받아 줄 여유도 없었다.

흑주는 뒤늦게 쌩쌩해진 채 소청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희한한 일이네. 왜 그 사람들의 진기는 흡수하지 않은 걸까? 대법을 하면서 진기에 변화가 생긴 건가?”

아진이 흑주를 바라보며 말했지만 어차피 그들이 추측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흑주야. 너는 말 못 하는 거야? 이 정도 있었으면 말을 할 만도 하겠다.”

아진이 괜한 소리를 하자 소청이 웃었다.

소청은 오랜만에 스승과 함께한 임무가 퍽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자기가 모르는 사이에 스승의 무위가 몰라볼 정도로 달라진 것에 놀랐다.

“스승님. 제가 볼 때는 수련을 안 하시면서 제가 안 보는 동안 수련을 많이 하신 모양이에요. 정말 많이 놀랐어요.”

“아아. 그렇게 생각했어? 아니야. 소청아. 이 스승은 따로 수련을 안 한다. 그런데도 매일 강해져서 아주 죽겠다. 이 몸은 도대체 왜 이러는지.”

“왜요. 스승님? 몸이 강해지면 죽을 것 같으세요?”

린린과 있을 때 하던 것처럼 잘난 척을 한 거였는데 순진한 소청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놀라워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미안하다.”

위도는 그들의 대화를 듣고 큰 소리로 웃더니 갑자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도 제자를 들일까?”

“아뇨. 형님. 그보다 결혼을 하시는 게 낫지 않으세요?”

“아니. 나는 그건 좀…… 여기에 갑자기 오게 된 것처럼 어느 날 또 갑자기 돌아가게 될지도 모르잖아. 여기에 내 가족을 남겨두고 돌아가고 싶지는 않아서. 다행인지 아직 마음에 확 드는 사람도 없고.”

“…….”

위도 형님은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하면서 아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화는 거기에서 멈췄고 그들 각자는 그때부터 다시 신법을 펼쳤다.

돌아올 때만큼 서둘러서 가야 할 것은 아니라 그나마 여유가 생겼지만 그래도 빨리 산본의가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었다.

* * *

그 후로는 바쁜 행보가 이어졌다.

가장 먼저 소림사에 가서 방장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방장을 보기 위해 숭산에 가면서 아진은 린린을 보며 말했다.

“린린. 너 괜찮겠어?”

“뭐가?”

“너는 소림사의 성력이 안 불편해?”

“나는 괜찮은데? 방장님이 나를 불편해하지 않으실까 모르겠네.”

“다행은 다행이네.”

가는 동안 아진은 자신의 배분을 확실히 깨달았다.

수많은 사람이 그의 앞에서 머리를 조아렸던 것이다.

아진보다 훨씬 더 나이가 많은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북리의천이 나이 어린 제자를 둔 탓이었는데 아진은 나이 많은 이들에게 깍듯한 대우를 받는 것이 미안해서 매번 더욱 공손하게 합장을 하고 허리를 숙였다.

그가 쩔쩔매는 모습을 보며 린린이 재미있어하는 동안 그들은 방장실로 안내되었다.

“어서 오너라. 아진아. 향화문을 통해서 소식은 들었다.”

“방장님 덕분에 목숨을 건졌습니다. 그리고 방장님께서 저에게 알려주신 장법을 다른 사람들의 앞에서 사용한 것에 대해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아 급히 왔습니다.”

“그것이 무슨 말이냐.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어찌 그것을 본문의 무공이라고 금하겠느냐. 그것은 이미 수뇌부가 모인 자리에서 결정하였다. 허나 성력을 발하면서 본문의 장법을 펼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아진이 네가 그렇게 할 수 있는 게 오히려 신기한 일이니 말이다.”

“저도 그럴 것 같다고 생각하기는 했습니다.”

“본문의 장법을 산본의가의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것을 금하지 않을 테니 사람들에게 전수하고 이 일의 해결을 위해 애를 써 주도록 하여라.”

“감사합니다. 방장님.”

“네 스승은 어찌 지내고 있느냐. 한창 좋을 때 이런 일이 생겨 대놓고 기뻐하지도 못하겠구나.”

“저희 스승님은 소심하게 그런 걸 신경 쓰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리고 스승님은 너무 오래 기다려 오셨으니 남들 앞에서 행복한 표정을 지으셔도 되지 않겠는지요.”

“그래. 그렇지.”

방장이 웃음을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 챙겨 준 영약은 고마웠다. 아진아.”

“그 말씀은 전에도 하셨습니다. 방장님. 그리고 더 드리지 못하는 게 안타까울 뿐인데 자꾸 그렇게 말씀하시면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두 사람이 서로 그런 소리를 주거니 받거니 하는 동안 린린은 가증스럽다는 표정으로 아진을 보곤 했고, 아진은 린린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아주 자애로운 표정을 지으며 린린을 바라보곤 했다.

“지금은 워낙 중요하고 어려운 시기라 잡아두지를 못하겠구나. 어서 돌아가도록 하여라. 이번 일이 해결되면 네 스승과 함께 다시 찾아 주면 좋겠구나.”

“예. 그러겠습니다.”

끝까지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 아진이 그 앞에서 물러나자 린린이 그를 바라보았다.

“오라버니도 이제 그런 걸 잘하는 것 같아. 여러 얼굴을 갖고 때에 따라 거기에 맞는 걸 쓰는 거.”

“나이가 들었다는 뜻이겠지.”

그렇게 대꾸를 해 놓고 나서 그는 그 말에 대해 생각했다.

정말 그런 건가 했지만 지난 삶을 생각해 보면 그게 꼭 맞아떨어지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때는 다른 사람의 앞에서 관리하고 싶은 명성도 없었는데 이번에는 달랐다.

자신으로 인해 산본의가의 명성이 높아지는 것이 좋았고 의가의 사람들이 어깨에 힘을 줄 수 있게 되는 게 좋아서 지금껏 달려온 것 같았다.

린린은 아진이 생각에 잠긴 모습을 보면서 혼자 웃음을 지었다.

지금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가 눈에 훤히 보이는 듯했던 것이다.

“그런데 오라버니도 그래? 위도 오라버니처럼 그런 생각을 하기도 해? 언젠가 그곳으로 가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산본의가에 돌아가서 사천에서의 일을 말하다가 그 이야기도 해 줬더니 내내 생각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기는 하지. 여기에서 보장된 게 아무것도 없고. 죽을 때까지는 여기에서 살 수 있는 건지, 아니면 그 전에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는 건지도…….”

린린은 말을 하지 않았다.

“왜? 오라버니가 안 보이면 슬플 것 같아서? 그러니까 있을 때 잘해, 인마.”

“키우던 개가 안 보여도 생각나는 게 당연한데 당연히 생각은 나겠지.”

이 자식이 말을 해도 꼭. 내가 개냐? 내가 개야?

당장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정작 아진의 입에서 나온 말은 달랐다.

“생각만 나겠어? 슬프지는 않겠고?”

린린이 슬프지만 않으면 될 것 같은데 슬퍼할까 봐 괜히 신경이 쓰였다.

언젠가, 돌아오지 않는 자신을 기약 없이 기다리며 소청이 스승님과 함께 동구 밖까지 나와서 항상 자기가 올 방향만 보고 있던 것이 떠올랐다.

린린도 그럴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왠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오라버니는 나를 너무 모르는 것 같아. 나 패월악이었던 사람이야.”

“그런데?”

괜히 심란해져서, 자기가 그 얘기를 왜 꺼냈을까 하고 있었는데 린린의 말을 듣고 아진이 물었다.

거기서 왜 자기가 패월악이었다는 말이 나오는가 했던 것이다.

“오라버니가 가는데 나라고 왜 못 가겠어?”

“…….”

어째 어감이 이상했다.

하찮은 너도 가는데 왜 내가 못 가냐는 것 같이 느껴졌던 것이다.

“은근히 기분 나쁘네?”

그러면서도 아진의 입가에 비로소 웃음이 지어졌다.

린린이라면 정말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았던 것이다.

“그래. 린린. 역천마의랑 알아내 줘. 그곳에 가는 방법. 그리고 어느 날 오라버니가 사라지면 따라와야 한다.”

“그래. 걱정하지 마. 가서 내가 데려올게. 어차피 거기에는 오라버니를 좋아하는 사람도 없잖아. 거기서는 웃을 일도 없었을 거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거잖아.”

“야, 인마. 악담을 해라. 악담을. 그래도 이제 사회성도 좀 생기고 했으니까 돌아가고 나서도 잘 살 수 있을지도 모르지.”

“정말?”

“…….”

린린의 말에 아진은 말을 하지 못했다.

자신이 있는가의 문제가 아니었다.

잘 살고 싶을지.

의지의 문제였는데 그럴 의지가 생겨날 것 같지가 않았던 것이다.

“…….”

아진이 대답하지 못하는 동안 린린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오라버니. 어느 날 갑자기, 나한테 말도 하지 못하고 그곳으로 가게 된다고 해도 너무 실망하지 마. 우리가 찾으러 갈게. 꼭 데리러 갈게. 그러니까 최대한 행복하게 지내고 있어.”

린린은 더 이상 어리고 철없고, 할 줄 아는 거라곤 흑주에 침을 묻히는 것밖에 없는 어린 만두가 아니었다.

아진은 린린이 할 수 있는 것들을 알고 있었고 린린이라면 정말 그 말을 지켜 줄 거라고 생각했다.

아진이 린린을 보다가 어깨에 팔을 걸쳤다.

“오라버니가 살던 곳 주소야. 잘 외워야 한다.”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구 ***동

그는 자신이 살던 주소를 천천히, 그리고 정확히 불러 주었다.

언제나 자신을 구음절맥에 걸렸던 사람이라고 말하면서 기억력을 과신하곤 하던 린린이었지만 그때는 아진이 말을 하는 동안 숨소리도 내지 않고 귀를 쫑긋 세운 채 들었다.

“하남성 등봉현 숭산. 그런 거랑 같은 거지?”

“응. 외웠으면 말해 봐.”

린린은 그가 말해 준 주소를 조심스럽게 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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