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4화
294화
일어날 때는 아무 생각 없이 일어났지만 자신의 몸 상태가 깨달아졌다.
그래서 엄청나게 아프겠다고 생각을 했는데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어?”
그는 옷을 들어 보다가 자기가 입고 있는 옷도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떻게 된 거지? 여기가 어디야?’
설마 혈교도들이 자기를 쫓아와 끌고 온 건가 했지만 대우가 너무 좋았다.
자기가 혈교도라면 기껏 끌고 온 자기를 이렇게 편한 곳에서, 이렇게 좋은 이불까지 내주고 재워줄 것 같지는 않았던 것이다.
당문이 어찌 됐는지도 걱정이 되었던 당채운은 그대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문을 열고 나갔지만 전각에는 그 외에 아무도 없는 듯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당채운은 그곳이 이상하게 낯익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가 그의 기억을 더 빨리 돌아오게 만든 것은 가득 밀려오는 각종 약재의 냄새였다.
‘의방? 의가? 혹시…… 산본의가? 내가 거기에 온 거라고?’
설마라고 생각하며 그는 한달음에 밖으로 달려갔다.
그러면서 그 생각은 점점 더 확고해졌다.
다른 건 그렇다 쳐도 그 부상을 이렇게 간단히 치료해 버릴 수 있는 의원들은 산본의가의 의원들 외에는 생각이 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가 밖으로 나가자 몇 사람이 그를 발견하고 달려왔다.
그중에는 아진의 형인 도종도 있었다.
“당 소협. 이제 정신이 드는 모양입니다. 어제는 부상이 심했습니다. 여기에 오는 동안 죽지 않은 것이 기적 같았습니다. 지금은 괜찮으십니까? 아버님이 치료하셨으니 괜찮을 것 같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우선은 진맥해 보는 게 좋은 것 같은데 같이 의방으로 가시지요.”
“의원님. 그보다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제가 어떻게 여기에 있고. 아니. 그보다 저희 당문은…… 당문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당채운의 얼굴을 본 도종은 그가 그 대답을 듣기 전까지는 절대로 안정을 취할 수 없겠다고 생각하며 먼저 설명을 해 주었다.
“소협을 이곳으로 데려온 사람은 향화문의 문도였습니다. 향화문에서는 정의맹의 중요한 무가와 문파 인근에 대기하면서 혈교의 희생양이 되지 않는지 대비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식으로 도울 수 있을지는 몰라도 최소한 지원은 해 줄 수 있도록 미리 신호 체계를 마련해 두었고요.”
“그게…… 정말입니까?”
“예. 사천에서 산본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신호가 전달됐고 그걸 본 아진이가 소청이를 데리고 그곳으로 바로 갔습니다.”
“공자님과 소청이요?”
당채운의 눈이 눈물로 글썽거렸다.
그래도 아직 안심하기는 이르다고 생각하면서 그는 도종의 이야기를 기다렸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지…….”
“그것까지는 모릅니다. 그건 아진이가 돌아와 봐야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다른 분은 더 가지 않았습니까?”
염치없기는 했지만 당채운은 좀 더 많은 사람이 가서 당문을 도와줬기를 바랐다.
그렇게 한다면 조금이라도 더 기대해 볼 수 있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아진이와 소청으로 부족할 것 같았으면 더 보냈을 겁니다.”
대단한 믿음이었다.
당채운은 그런 도종을 보며 미안한 마음을 느꼈다.
“죄송합니다. 의원님. 제가 제 욕심을 앞세웠습니다.”
“아닙니다. 당연히 걱정될 거고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도 다 이해 가 갑니다. 걱정이 안 된다면 거짓말이지요.”
“의원님. 아진 공자님은…… 공자님은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지요?”
그는 애가 타는 마음으로 도종을 바라보았다.
도종은 지체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아진이는 놀라운 일들을 만들죠. 제 팔도 아진이 덕분에 다시 얻은 것이니까요.”
“그렇지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얼마나 잘 붙여 놨는지 원래의 팔과 똑같은 것 같아요. 나이가 들고 몸이 자라면서 이건 어떻게 될지 걱정을 한 적도 있었는데 한 몸처럼 같이 자라더라고요.”
당채운은 도종이 자신을 안심시켜 주려고 그런 이야기까지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상황이 조금 달랐다.
당문에서 일어난 일도 아진이 돌이킬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의원님…… 공자님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걱정되는 일이 있습니까, 소협?”
“그게…… 화골산이 닿아서 녹아 버린 사람도 살아날 수 있을까요?”
“…….”
도종이 놀란 듯 당채운을 바라보았다.
화골산에 대해서는 도종도 알고 있는 바가 있었다.
사람을 흔적 없이 죽일 때 사용된다는 극약.
화골산을 부으면 뼈조차도 남지 않고 녹아 버린다고 했다.
‘화골산이라면…….’
도종도 그때는 당채운에게 희망 섞인 말을 해 줄 수가 없었다.
당채운은 도종의 표정을 보면서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했다.
잠시 고개를 숙이고 있던 당채운은 이내 힘을 냈다.
“제가 욕심이 많은가 봅니다. 멸문을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 희망을 보게 됐으면서도 제가 잃은 것만 생각하고 있다니 말입니다. 의원님. 정말 감사합니다. 저는 이대로 당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공자님과 소청이 애쓰고 있는데 이러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자신의 앞에 나타났던 자들이 너무 강했다는 이유도 그가 결심하는 데 한몫했다.
도종은 더 이상 당채운을 붙잡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의원님. 정말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한 분 정도 같이 가게 해 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제 욕심 때문이 아니라 공자님과 소청이가 위험할 수도 있어서 그렇습니다.”
도종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당채운에게 조금 기다리라고 말을 하고 가주를 찾아 갔다.
가주는 진료를 하다 환자에게 양해를 구하고 당채운에게 와서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당채운이 가주에게 설명을 하는 동안 위도와 린린이 함께 그곳으로 왔고 가주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하는 게 좋겠느냐. 린린.”
“위도 오라버니가 다녀오세요. 그자들. 내공에 어떤 술수가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당 소협은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오라버니와 소청만 갔다고 생각하시면 안 돼요. 흑주도 갔거든요.”
“예? 아. 예…….”
당채운은 둘만 갔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는 말에 혹시 검신 대협이 연락을 받고 같이 가 주신 걸까 하며 눈이 커졌다가 흑주라는 말이 나오자 눈에 띄게 표정이 어두워졌다.
흑주가 들었으면 굉장히 섭섭했을 텐데 다행히 흑주는 이 자리에 없었다.
“그렇게 하기로 했으면 서두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어서 가세요.”
린린의 말에 당채운은 가주와 도종에게만 인사를 하고, 일이 끝난 후에 다시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겠다는 말을 남긴 후에 신법을 펼쳤다.
위도는 당채운과 함께 가다가 신법은 자기가 낫다는 자신감이 생겼는지 당채운에게 업히라고 말했다.
위도가 버틸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낫기는 했다.
위도의 내공은 당채운이 상상하지 못하는 수준이지만 당채운은 뻔한 내공을 가지고 싸워야 했다.
영약으로 다져진 몸이라 그도 내공이 부족하다는 말을 들을 처지는 아니었지만 위도의 앞에서는 상대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위 대협. 제가 이렇게 폐를 끼쳐도 될지…….”
그러나 위도에게서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저 위도는, 극성으로 신법을 펼치는 동안 말을 하는 것이 가능한 건 아진이나 린린 같은 괴물들뿐이라는 것을 이 사람은 모르는 걸까 하는 생각을 혼자서만 했을 뿐이었다.
그들이 사천에 도착했을 때 당채운은 사천의 분위기를 살폈다.
분위기를 보면 일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알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표정을 보면서는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이러면 좋은 건가?’
만약 흉수들이 아진과 소청을 쓰러뜨렸다면 당문에만 머물 이유가 없을 테고 당가타를 나와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살수를 뻗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며 작은 희망이 생겼다.
‘아직은…… 아직은 늦은 게 아닌지도 모른다.’
그는 애써 그런 생각으로 마음을 다독이며 마음을 안정시키려 했다.
“저곳입니다. 대협.”
당채운은 마음이 급해 위도에게 계속 당문을 가리켰다.
남의 등에 업혀서 당문을 가리키는데 왜 그렇게 눈물이 나오려고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위도는 이제 거의 다 왔나보다는 생각에 더욱 속도를 올렸고 마침내 당문의 전각 지붕에 올라섰다.
그곳에서 내려다보이는 광경은 한마디로 말하기가 어려웠다.
수많은 사람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는데 누가 흉수인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당채운의 옆에 서 있던 위도가 갑자기 몸을 날렸을 때 당채운은 그가 아진을 찾아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당채운도 그곳으로 내려섰다.
“공자님!”
아진은 그들을 힐끔 바라보고 위도에게 먼저 손을 들어 한 무리의 사람들을 가리켰다.
“형님. 저놈들만 맡아주세요. 미치겠어요. 흑주가 저자들 진기는 안 먹어요.”
“흑주가?”
“네. 이번에는 안 데려와도 됐을 것 같아요.”
그러면서 아진은 다시 몇 사람을 노리고 기수식을 취했다.
검이 없는 걸 보아 권법을 사용하는 줄 알았더니 옆에 반으로 부러진 그의 검이 나뒹굴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검이 부러질 경우를 대비해 여분의 검을 가지고 다니기도 하지만 검에 대한 믿음이 대단했던 아진은 그러지 않았다.
그런데 늘 아진의 분신처럼 그를 도와주었던 검이 격전을 버티지 못한 것이다.
당채운은 그들에게 괜찮냐고 묻고 싶었지만 한눈에 봐도 괜찮은 상황이 아니었다.
“당문의 장로 몇을 포함해서 몇 사람은 죽였습니다. 혈교에게 당하지 않은 사람들 말입니다. 끝까지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고 혈교도가 하는 말만 믿고 우리를 공격해서 어쩔 수가 없었어요. 그렇게 말귀를 못 알아듣는 사람들은 그냥 일찍 죽는 편이 후대를 위해서 좋은 법입니다.”
“…….”
당채운은 그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얼마나…….”
“스무 명이 넘을 겁니다. 장로들 세 명을 포함해서 고수 몇 명도 죽었고요.”
아진은 혹시나 해서 미리 말을 한다는 듯이 당채운을 바라보았다.
“아직 죽은 사람들을 살려보지는 못했어요. 격전이 계속 이어져서요. 혈교 놈들이 만만치가 않아요. 그런데 그 사람들은 살리지 않을 겁니다. 살릴 수 있다고 해도요.”
“예…….”
힘을 가진 사람이 잘못된 신념까지 가지고 있으면 그게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당채운은 확실히 깨닫고 있었다.
“그런데 공자님…… 혹시 지금까지 한 사람도 처리를 못 하신 건가요?”
남아 있는 사람들을 확인한 당채운은 뒤늦게 사태 파악을 하고 깜짝 놀라서 물었다.
결과적으로 아진과 소청이 그곳에 와서 한 일은 당문 사람들을 죽인 것뿐이었다.
“예. 자기들이 자꾸 초개처럼 목숨을 버리면서 저자들을 대신해서 싸우려고 하지 않습니까. 저자들하고만 싸워도 힘이 드는데.”
당채운은 아진이 누군가를 두고 그렇게 말을 한 적이 있었을까 했다.
아진이 그렇게 말할 정도라면 그 사람들은 얼마나 강한 건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어쨌거나 다행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위도 형님이 와야 할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거의 불사에 가까운 존재더군요. 죽이지 못한 건 아닙니다. 수십 번도 더 죽였어요. 그때마다 다시 살아나서 그렇지. 그래도 이제부터는 달라질 겁니다.”
당채운은 위도가 도대체 얼마나 강하기에 아진이 그렇게까지 믿음을 보이는 걸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