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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293화 (293/470)

제293화

293화

처음부터 패배가 정해져 있는 싸움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느 때는 결과가 이미 정해져 있는 싸움이라고 해도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 법이었고 당채운은 지금이 바로 그때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당채운이 두 손으로 검을 잡고 그대로 내리치자 검강이 바닥을 가르고 달려나가 흉수의 몸을 갈랐다.

“……!”

이번에야말로 통한 것인가!

당채운은 생각하지 않은 성과에 환호성을 지를 뻔했다.

그러나 지금껏 통하지 않던 공격이 갑자기 통했다는 게 이상하기도 했다.

흉수의 광소가 허공에 흩뿌려지는 것을 들으며 당채운은 자신이 그에게 놀아난 것임을 깨달았다.

흉수의 몸이 다시 붙은 것은 순식간이었다.

“나쁜 사람이군. 동료의 몸을 이렇게 함부로 다루다니 말이야.”

“닥쳐라!”

당채운은 흉수의 요혈을 노리고 검강을 뿌렸고 흉수는 귀찮다는 듯이 검을 휘둘러 그것을 베어내 버렸다.

그때를 노려 당채운이 지풍(指風)을 쏘았지만 흉수는 몸을 뒤로 젖혀 피하며 웃음을 흘렸다.

“이제는 절초를 보여줄 때도 되지 않았나? 대체 그건 언제 쓰려고 그렇게 아끼는 거지? 그러다가 죽겠어.”

흉수는 설마 할 줄 아는 게 이게 전부냐는 듯이 당채운을 비웃으며 말했다.

당채운은 포기하지 않은 채 기회를 노리며 계속 몸을 날렸고 한 번은 그의 검이 흉수의 가슴을 뚫고 들어가 반대쪽에서 나오기도 했다.

심장을 찔렀다는 느낌이 생생하게 전해졌다.

그러나 그 공격에 성공하고도 그는 함부로 기뻐하지 못했다.

혹시…….

설마 이번에도……?

근심 가득한 당채운의 얼굴을 보면서 흉수가 웃었다.

“정말 멍청한 인간이군. 이렇게 지겹게 반복을 하면서도 깨닫는 게 없는 모양이야?”

당채운에게 보란 듯이 그는 그 앞에서 상처를 스스로 치료했다.

더는 좌절할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당채운은 이미 공력의 상당 부분을 소진했고 똑바로 서 있는 것조차 어려웠다.

거친 숨을 토할 때마다 피가 비산했고 기침이 터지더니 내장 덩어리가 섞여 나왔다.

당채운이 가까스로 다리에 힘을 준 채 버티고 서 있을 때 어디선가 사람들의 기척이 들렸다.

‘……!’

당채운은 깜짝 놀라기도 하고 반갑기도 해서 고개를 들었다.

‘좋아할 일인가? 좋아해야 할 일이 맞는 건가? 이 괴물을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이 당문에 존재하기는 한 건가? 차라리 도망치라고 말하는 게 낫지 않은가?’

짧은 순간 동안 그의 머릿속에 여러 생각이 지나갔다.

그러나 그는 처음부터 그런 고민은 할 필요가 없었다.

다가온 이들 모두가, 채집행에서 파류영과 함께 돌아온 자들이었던 것이다.

“형. 화골산은 다 썼어? 더 가져 왔는데. 그거 정말 무섭더라고. 한 놈을 통에 던져 넣다가 조금 튀었는데 옷이 타 버렸어. 이것 좀 봐. 그런데 그거 알아, 형? 화골산이 들어 있는 통에 사람을 집어넣으면 화골산이 줄어들어. 원래는 불어나야 하는 거 아니야? 이상하지?”

파류영의 동생 파류월이었다.

몸을 조종하는 두 사람이 형제가 아닐 텐데도 뒤집어쓰고 있는 몸이 형제지간이라고 파류영을 형이라고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자는 왜 안 죽이고 이러고 있어? 지금까지 놀고 있었던 것 아니야? 너무 술렁술렁하는 것 같아. 우리는 열심히 일하고 왔는데.”

아무리 힘들다고 하더라도 지금이 아니면 영영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당채운은 다시 검을 들었다.

실패할 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그 사실이 처절하고 비참했지만 그런 생각도 전부 그가 살아 있어서 누릴 수 있는 사치였다.

그의 검에는 이제 검강이 맺히지 않았다.

내공은 처음처럼 검을 향해 내달리지 않았고 단전은 붕붕거리며 통증을 전해오고 있었다.

울컥 핏물이 솟구쳐 입으로 흐르는 것을 억지로 입을 다물고 삼켜버렸다.

바닥을 박차는 다리에서도 힘이 빠져, 앞에 있던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저런 저런. 불쌍해서 못 봐 주겠네. 뭘 하고 싶은 거야? 우리가 가줄게. 그러면 되지? 자. 왔어. 뭘 하고 싶은데. 찌르고 싶은 거야?”

얘기를 하던 파류월이 빛살처럼 당채운의 앞으로 다가왔다.

당채운의 검이 그의 가슴을 노렸지만 검상조차 만들지 못했다.

눈앞에 있었는데도, 해 보라는 듯이 내밀고 있었는데도.

“무슨 짓을 하는 것이냐!!”

뒤에서 노호성이 들려왔을 때 당채운은 고개를 돌렸다.

언제 온 거였을까.

그는 그들이 오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내공이 이미 바닥을 드러내 꼭 필요한 곳 외에는 사용하지 않고 있었더니 기척까지 놓친 듯했다.

당채운을 향해 달려온 사람은 가주와 장로들이었다.

그들이 나타난 시간이 절묘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당채운은 한동안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들 옆에 당무독 장로가 서 있는 것을 볼 때까지.

당무독이 당채운을 바라보며 웃었다.

‘아니. 저자는 당무독 장로님이 아니다.’

당채운은 서둘러 해명을 하려 했다.

그러나 파류영이 조금 빨랐다.

“가주님. 당채운이 경비 무사들을 죽였습니다. 순찰하고 있던 경비 무사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죽였습니다.”

“이건 제가 당채운에게서 뺏은 것입니다. 화골산입니다. 화골산까지 훔쳐서 그걸로 사람들을 전부 죽여 흔적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걸 저희가 발견하고 막으려고 하자 이제는 저희까지 공격했습니다.”

“맞습니다. 그래도 동문에게 검을 휘두르기 쉽지 않아 지금까지 여러 말로 설득을 하고 있었지만 듣지 않았습니다.”

당채운은 핏기가 사라지는 얼굴로 가주를 바라보았다.

“가주님……!”

“이게 다 무슨 소리냐. 당채운! 네가 왜 그런 짓을 했다는 말이냐!!”

놈들의 증언은 구체적이었다.

자기들이 죽인 사람들이 어디에 서 있었는지, 그들을 어디에서 죽였는지 알고 있었기에 그렇게 정확한 진술이 나온 거였는데 가주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고요하던 곳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던 이들이 하나둘 떼를 지어 나왔다.

그들은 병장기까지 갖추고 나와서 당채운을 노려보았다.

몇몇은 검파에 손을 얹은 채 금방이라도 검을 빼 들려고 하고 있었다.

가주의 명이 떨어지기만 하면 곧장 당채운의 목을 베려고 눈을 번뜩이는 사람들을 보면서 당채운은 당혹감을 느꼈다.

“제가 나왔을 때 당채운이 이 자를 화골산으로 녹였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살아 있었는데 일부러 그러는 것처럼 몸에 화골산을 흘려 서서히 녹였습니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모습을 다 구경하더니 얼굴이 이만큼 남았을 때 저를 보고 웃으면서 저에게 얼굴을 던졌습니다.”

파류영이 말을 하는 동안 사람들은 그가 가리키는 곳을 보았고 그때까지만 해도 도대체 그게 뭔가 하던 것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사람들은 울분을 토하며 짐승 같은 소리로 부르짖었다.

“이게…… 누구란 말입니까!”

사람들은 남아 있는 얼굴의 부위만으로 당철현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때까지 기세 좋게 소리치던 파류영도 당철현의 이름까지 알지는 못했다.

현무단주 당채운이야 워낙 유명인사에 화점마다 그의 용모파기가 있어서 얼굴과 이름을 알고 있었지만 고작 당문의 외당 무사에 불과한 당철현의 이름을 알 이유는 없었던 것이다.

“당채운에게 직접 물어 보십시오!”

파류영은 능란하게 빠져나갔다.

몇 사람이 앞으로 나와 바닥에 있는 당철현의 얼굴을 보고 그가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외당 무사 당철현입니다…….”

누군가 외마디 비명처럼 외치고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여기저기서 울분에 찬 소리가 터져 나왔다.

“단주님이…… 단주님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 것입니까. 단주님이 왜 이런 짓을 하신다는 말입니까!! 왜 당철현을…… 왜 당철현을……!”

“이런 괘씸한 놈! 당채운. 네놈이 어찌 이런 짓을 벌인다는 말이냐! 당문이 너를 얼마나 자랑스러워했는데. 네가 어찌 당문의 심장에 칼을 들이민다는 말이냐! 무엇을 바라서 이런 것이냐. 당채운!!”

당무독이 고함을 지르며 바람을 잡자 곁에 있던 장로들도 그에게 편승했다.

“그 자인 것입니다! 가주님. 혈교의 흉수가 당채운을 죽이고 그 몸을 뒤집어쓴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말이 되지 않습니다.”

잠시의 침묵이 지나간 후에 당무독이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 외마디 비명을 지르자 여기저기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왜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던가 하고 안타까워하는 것 같았다.

그제야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 돌아간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그들은 당채운을 노려보며 에워쌌다.

남아 있는 힘을, 동문을 죽이기 위해 사용해야 한다는 것인가 하면서 당채운이 가주를 향해 돌아섰다.

“가주님. 아닙니다. 저를 믿으셔야 합니다. 저자들이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저자들이 채집행에 나갔다가 혈교도에게 당한 거라는 말씀입니다! 이 자는 당철현의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이름을 물어 보십시오. 이 자는 알지 못할 것입니다.”

“닥쳐라. 이놈! 네놈이 끝까지 그런 소리로 살길을 도모한다는 것이냐!! 뭣들 하는 것이냐. 당장 이놈을 붙잡아라. 이놈을 붙잡은 후에 그것을 확인해도 늦지 않다!”

당채운이 쓸만한 공격을 했지만 당무독이 더 빨랐다.

당무독의 말도 틀린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일제히 당채운을 노리고 덤벼들었다.

당채운은 자기가 빠져나갈 수 있을지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벼랑 끝에 서 있다는 생각 말고는 들지 않았다.

당채운은 내공을 끌어 올렸다.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경공을 펼쳤다.

이렇게 이곳을 떠나면 다시 돌아올 수는 있을 것인가.

돌아올 때도 이곳은, 이 사람들은 이대로 남아 있을까.

당채운의 심장이 도려내지는 듯했다.

“저놈을 놓치지 마라!”

가주의 명령이 떨어지자 당문의 무인들이 당채운을 쫓았고 전각 지붕으로 먼저 올라선 당채운이 품속에서 가루를 꺼냈다.

“이것은 학정홍입니다. 제가 여러분을 상하게 하지 마십시오. 더 이상 저를 따라오시면 저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가 사라진 곳에서 학정홍의 가루가 안개처럼 퍼졌고 그 뒤를 쫓던 이들은 급히 몸을 피해야 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당채운이 벌 수 있는 시간은 일각도 되지 않을 터였다.

학정홍을 피해 다른 길로 쫓아온다면 곧 붙잡힐 거라고 생각하며 당채운은 단전의 고통을 감내하며 신법을 펼쳤다.

이제 곧 한계에 이르겠다고 생각하던 그가 결국 바닥에 내려와 무릎을 꿇었을 때, 그의 입에서 진한 선혈이 끝도 없이 흘러나왔다.

희미해지는 그의 시선에 한 사람의 다리가 들어왔다.

그의 걸음이 당채운에게 점점 가까워지더니 그가 당채운에게 몸을 숙였다.

더 이상은 몸을 굴려 피할 힘도 남아 있지 않은 당채운은 눈을 감았다.

‘당문은, 당문은 이대로 지고 마는 것인가.’

일이 그리될 때까지 그들을 막을 기회가 단 한 번도 없었던가 하는 생각에 깊은 좌절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 * *

창문을 타고 나른하고 따뜻한 햇살이 기어들어 왔다.

당채운은 습관적으로 이불을 끌어당겨 덮다가 이불의 감촉이 낯설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순간 의식을 잃고 쓰러지기 직전에 벌어졌던 일들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난 그는 뒤늦게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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