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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291화 (291/470)
  • 제291화

    291화

    죽립 남자는 갈수록 분위기가 이상해진다고 생각했다.

    목숨을 뺏을 생각으로 노리는 것은 아닌 것 같은데 공격이 쉴 틈이 없었다.

    압도적이라고 여겨지는 것도 아니었다.

    늘 아진이 간발의 차이로 앞섰다.

    죽립 남자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종종거리며 점점 더 많은 것을 드러내게 되었다.

    이미 이 판은 자기 뜻대로 돌아가지 않을 거라는 것을 그도 알아차렸지만 너무 늦은 깨달음이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진의 검은 자유롭고 여유로웠다.

    검에만 의존하지도 않고 땅에 뿌리내린 것처럼 서서 무서운 속도로 돌려차 허리를 끊어 버릴 것처럼 휘두르기도 했다.

    이렇게 계속 끌려가기만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며 죽립 남자는 기수식을 취했다.

    드러내려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더 이상 숨길 수만은 없게 됐다는 것을 깨달아서였다.

    그의 눈에서 혈광이 번뜩이고 아진을 향해 들어 올린 손바닥에서 핏빛 장영(掌影)이 일렁였다.

    아진은 그게 뭔지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 자리에 서 있었고 그런 아진을 향해 린린이 달려와 그의 허리를 붙잡고 땅바닥에 볼썽사납게 나뒹굴었다.

    순간 죽립 남자의 손에서 장영이 폭사했고 바닥이 적어도 다섯 장 깊이로 푹 갈라져 있었다.

    점점 재미있어진다고 생각하며 아진은 웃음을 지었다.

    그의 몸에서 하얀 기운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평소에 그의 검에 맺히는 강기와도 다른 기운이었는데 그것이 아진의 몸 전체를 감쌌다.

    아진이 일부러 두른 게 아니라 어쩌다 보니 자연스럽게 나온 것 같았다.

    죽립 남자도 아진의 모습이 변한 것을 보고 놀란 듯 움찔했는데 그럴 때가 아니라고 생각한 것처럼 공격을 이어 나갔다.

    조금이라도 기회가 있을 때 타격을 가하려고 그런 듯했다.

    그러나 그가 날린 강기는 아진의 몸에서 나온 하얀 빛의 기운에 휩쓸려 그대로 찢겨나갔다.

    강기를 베어낼 정도의 기운.

    그는 멍하니 아진을 바라보았다.

    설마 검막일까?

    그것은 아닌 듯했는데 그는 곧 상상의 한계에 붙잡혔다.

    아진은 이제 자기가 움직여도 될 것 같다고 생각한 듯 앞으로 나가며 죽립 남자의 어깨를 붙잡았다.

    붙잡힌 어깨가 조각나며 으스러졌고 죽립 남자가 입에서 피 분수를 토하며 밀려났다.

    아진이 그를 다시 붙잡으려고 한순간 그의 신형이 아진에게 먼저 달려와 거대한 폭음과 함께 폭발을 일으켰다.

    아진은 선 채로 얼마쯤 뒤로 밀렸는데 그걸 본 남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금쯤 사지 육신이 멀쩡한 곳 없이 수천 조각으로 찢어져 날아가야 하는데 겨우 그 정도 밀려난 것에 기가 막혔던 것이다.

    아진을 향한 회심의 공격은 아진의 몸에서 피어난 기운에 휘말려 먼저 상쇄되어 버렸는데 죽립 남자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폭렬술의 일종 같은데? 이 정도면 오래전에 신교를 빠져나간 사람이야. 이름도 잊어버린 어떤 마종의 지류라고 했던 것 같은데. 그러니까 이 자는 내 부하였던 적이 없어. 나를 모를 거야.”

    린린은 아진이 했던 말을 담아두고 있었던 듯이 말했다.

    “그런데 재미있네. 갑자기 왜 몸에서 이런 기운이 나온 거야? 전에는 이런 적이 없었잖아. 이게 아니었으면 오라버니도 그대로 갈기갈기 찢겨서 죽었을 거야.”

    “저자가 공격을 다시 시도할 수도 있는 거 아니야? 왜 벌써 다 끝난 것처럼 말해?”

    “이 정도 위력이면 한 번 시도 하는데 공력이 7할에서 8할 정도는 소모될걸? 얼굴 보니까 9할까지 썼는지도 모르겠는데?”

    린린이 죽립 남자를 보며 재미있다는 듯이 말했다.

    죽음을 각오하고 회심의 공격을 날렸는데 그게 알 수 없는 벽에 부딪혀 실패해 버린 것이다.

    아진은 죽립 남자를 바라보다 선화 부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부인은 어때?”

    “깨어나실 거야. 너무 빨리 의식이 돌아오게 하면 머리가 아플 거야. 천천히 시간을 갖고 정신을 차리도록 기다리면 돼.”

    “다행이네.”

    아진은 이제 눈앞의 남자를 끝내기로 했다.

    “네가 섭혼술로 저자에게서 정보를 알아내면 어떻겠어. 린린?”

    “그래 볼까? 나도 그 생각 하고 있었는데.”

    린린이 그 말을 하면서 죽립 남자에게 다가갔을 때였다.

    그는 아직 자기가 얼마든지 그 상황을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듯했고 손을 들어 올려 다시 장영을 폭사하려 했다.

    힘이 모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그 후의 일인 것 같았다.

    “자. 착하게 굴어. 이리 와 봐.”

    린린은 유순하게 말한 것과는 다르게 섬전처럼 몸을 날렸다.

    린린의 손가락이 갈고리처럼 구부러지고 그의 머리에 파고들었다.

    “으으으아아아악!”

    죽립 남자는 비명을 지르고 눈에서 핏물을 흘렸는데 그것은 린린의 공격에 대한 반응이 아닌 듯했다.

    “뭐야. 나는 아직 아무것도 안 했는데 이러면 곤란하지?”

    린린은 다시 그의 백회혈을 점하려 했지만 그에게서 한층 더 격렬한 반응이 나왔다.

    “크으으으아아아!”

    얼굴의 모든 구멍에서 피가 나온 것뿐만 아니라 엄청난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안구가 튀어나왔다.

    “……!”

    린린이 아진을 돌아보았다.

    ‘금제.’

    아진도 그 순간 그것을 깨달았다.

    금제가 걸려 있어서 죽립 남자가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섭혼술 같은 류의 술법에 당해 저도 모르게 자백을 하는 걸 방지하려고 이미 누군가 그의 몸에 미리 손을 썼던 것이다.

    그 후에 린린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일단 금제가 발동된 후 그를 막을 길은 없었던 것이다.

    안에서부터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는 것 같더니 그의 몸이 폭삭 주저앉았다.

    먼지를 쌓아 올려 만든 인형이 거센 바람을 맞고 최후를 맞이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와. 심하네. 여기까지 쫓아온 사람 생각도 좀 해 줘야지.”

    린린은 투덜거리면서 죽립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이제 그를 죽립 남자라고 부를 수 있는 근거는 전혀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다.

    “조금 더 가 볼까. 오라버니?”

    린린의 말에 아진도 조금 흔들리기는 했지만 선화 부인까지 데리고 싸우는 것은 자칫 위험해질 수도 있을 것 같아 결국은 마음을 접었다.

    린린도 강하게 주장하지는 않고 자기가 먼저 고개를 저었다.

    “혈교도는 다른 사람들이 관심을 두지 않는 대법에 집중했어. 진법 같은 건 기기묘묘한 방식으로 발전시켰을 거고. 우리가 여기까지 왔다는 걸 미리 알아차리고 대비했을 가능성이 커.”

    지금부터 쫓는다고 해도 그곳은 이미 비어 있을 거라는 말이었다.

    “그래도 우리가 순순히 당하지는 않을 거라는 걸 알았을 테니 앞으로 움직이는데 제약이 생길지도 모르지. 그것도 성과라고 할 수는 있을 거야, 오라버니.”

    그래도 아직 완전히 포기하기는 일렀다.

    수레를 끌던 남자에게 추적향을 날렸으니 선화 부인을 안전하게 옮긴 후에는 그것을 뒤쫓아도 될 것이다.

    그자 역시 금제로 인해 자백하기 전에 죽을 것 같기는 했지만 시도해 볼 여지는 아직 남아 있었던 것이다.

    선화 부인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린린의 등에 업혀 산본의가에 거의 도착했을 즈음이었다.

    그녀는 자기가 린린의 등에 업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화들짝 놀랐다.

    “제가…… 왜……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아가씨?”

    그러다가 선화 부인은 설마 하는 얼굴로 자기가 납치를 당한 거냐고 물었다.

    그렇지 않아도 목소리가 큰 사람이 놀라기까지 해서 평소보다 훨씬 더 소리가 컸는데 더군다나 린린에게 업힌 상태라 그 소리가 린린의 귀에 직격으로 떨어졌다.

    린린은 귀가 아파서 죽을 지경이었다.

    “저기…… 부인. 조금만 작게 말해 주시면…….”

    린린이 애원하는 소리로 말했지만 선화 부인은 자기가 엄청난 일을 당할 뻔했다는 사실에 거의 제정신이 아니라 그런 말이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 것 같았다.

    “공자님. 공자님이랑 아가씨가 저를 구해 주신 거군요? 세상에. 어떻게 아셨어요? 아아! 맞아. 새소리가 들렸어요. 그리고…… 그리고 어떤 소리가 들리면서 저를 계속 걷게 했어요. 그러다가 정신을…… 아니. 그 전에 수레에 타라고 한 것도 기억이 나고 숨으라고 한 것도 알 것 같고…….”

    린린은 귀에 대고 계속 큰 소리로 말을 하는 선화 부인 때문에 귀가 따가워서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신법을 펼쳤다.

    아진은 그 모습을 보고 웃음을 참지 못했다.

    린린의 신법이 매 순간 더 나아진다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선화 부인을 업고 다니게 하면 신법의 성취를 더욱 높일 수 있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가 그 생각을 할 수 있는 것도 선화 부인을 무사히 구해올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정신이 아찔해졌다.

    ‘산본의가를 노린 건 린린에게 상처를 주고 싶다는 이유가 컸을 거야.’

    그들이 한 번 실패한 곳을 다시 노릴지, 아니면 좀 더 쉬운 먹잇감으로 방향을 바꿀지는 알 수 없었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산본의가에는 몇 가지 새로운 규칙이 생겼다.

    아무리 급한 환자나, 인력이 급히 투입되어야 할 사고가 생긴다고 해도 의가를 지키는 최소한의 인원은 절대로 현장을 떠나서는 안 되고 의가를 상시 드나드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경비 무인들에게 출입 이유를 밝히고 지나가도록 했던 것이다.

    선화 부인이 납치되었을 때 넋이 나간 것 같은 상태였다는 아진과 린린의 증언을 토대로 만들어진 조치였다.

    그 정도만 해도 어느 정도는 예방이 될 듯했고 가주는 향화문을 통해 그 사실을 사람들에게 전하도록 해 두었다.

    그러나 누구에겐가는 이미 너무 늦어 버린 경고였다.

    * * *

    사천당문에만 특별히 소식이 늦게 전해진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들에게는 약간의 문제가 있었다.

    당가에서 새로운 제독법을 개발했는데 거기에 필요한 약초를 정리하다가 하수오의 양이 충분치 않은 것을 뒤늦게 발견했던 것이다.

    그래서 당무독 장로의 인솔하에 일단의 무리가 채집행에 나섰다.

    그것은 북리의천의 혼례식이 열리기 전에 일어난 일이었고 결과적으로 그들은 혈교도가 벌이는 일에 대해 경고를 들을 기회가 없었다.

    하수오가 자라는 곳을 아는 사람이 있어 오래 걸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예상한 시일이 지나도록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도 함께 간 이들 중에 강호 30대 고수에 드는 이가 둘이나 있었기에 크게 걱정을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채집행에는 언제나 수많은 변수가 있었다.

    그 자리에 찾아가면 있을 줄 알고 갔지만 이미 다른 사람이 캐서 없기도 하고 짐승이 먹어 버렸을 수도 있고 산사태나 불가사의한 일에 의해 지형이 바뀌어 버리는 수도 있었다.

    채집행에 나선 이들이라면 빈손으로 돌아오는 대신 하수오가 자라는 다른 곳으로 이동해 그것을 찾았을 것이다.

    ‘아무래도 너무 오래 걸린다.’

    당문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의 마음에 그런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결국 가주가 당문의 무력 부대를 동원해 수색조를 꾸려 채집행에 나선 이들을 찾도록 했을 때 거짓말처럼 그들이 나타났다.

    사장로 당무독과 두 명의 초절정 고수.

    그리고 그들과 함께 간 가문 사람들이 모두 무사히 돌아왔다.

    하수오는 찾지 못하고 빈손으로 오기는 했지만 이제 와서 그 사실을 안타까워하는 사람은 없었다.

    “어서 오시오. 사 장로. 그렇지 않아도 기다리고 있었소.”

    가주를 시작으로 모두 그들을 따뜻하게 맞이하며 노고를 치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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