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0화
290화
“아이고. 제 정신 좀 보라죠. 요즘에는 왜 이렇게 깜빡깜빡 잊는지 모르겠네요.”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내가 며칠 전에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몰라서 그러세요? 선화 부인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직 걱정할 건 아니니까 염려 마요.”
“아. 그거요. 그때는 정말.”
선화 부인은 그 일이 떠오른 듯 웃음을 터뜨렸다.
가모가 약방에 갔다가 평상에 피풍의를 벗어놓고 그 위에 보따리를 내려놓고 푸는 바람에 한참 동안 피풍의를 찾지 못한 일이 생각나서였다.
선화 부인은 웃음을 그치지 못한 채 밖으로 나갔다.
사람들은 다시 활기를 찾은 것처럼 평소처럼 바삐 다녔고 그녀도 의방을 향해 급히 걸음을 옮겼다.
어디선가 새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특이하네? 저런 소리는 처음 듣는데.’
산본의가에 있노라면 여러 종류의 새 소리가 들렸지만 그것은 늘 정해져 있었다.
새소리가 들려오는 방향도 그렇고 시간도 그랬다.
이 시간에는 새들이 울지 않았다.
꼭 시간을 정해 놓고 울라는 법은 없겠지만 그동안 늘 규칙적으로 들려오던 소리에 변화가 생기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무슨 일이지? 어디에서 온 걸까? 새로 온 새끼리 싸움이라도 났나?’
선화 부인은 그런 생각까지 하면서 걸음을 옮겼다.
그러던 그녀의 걸음이 조금씩 느려졌다.
그에 반해 새소리는 조금씩 빨라졌다.
처음에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궁금증을 품던 그녀였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저 걸을 뿐.
그녀가 향하는 방향은 의방이 아니었다.
손에 들고 있던 바느질감들이 몇 번 떨어질 뻔했지만 그때마다 힘을 주어 붙잡았다.
손은 기이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관절 인형의 손가락 끝을 억지로 꺾어서 바느질감을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힘을 주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가는 동안 다른 사람을 만나지는 않았다.
뭔가에 홀린 것 같은 표정이었지만 걸음은 점차 빨라졌다.
어딘가에 급히 가 봐야 할 곳이 있는 것 같은 분주한 움직임이었다.
새소리는 어느새 사람의 목소리로 변해 있었다.
선화 부인은 그 말을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는 부담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 말을 듣지 않으면 왜 안 되는지, 그 말을 듣지 않으면 무슨 일이 생기는지 그건 알지 못했지만 반드시 큰일이 생길 거라는 불안감이 그녀를 짓눌렀다.
월동문을 지나고 내원을 나가서 인적이 드문 곳으로 걸었다.
이 시간이면 사람들이 다른 곳에 모여 있어서 오히려 그곳은 한산했다.
평소였다면 선화 부인도 그 시간에 그곳을 지나갈 일은 없었을 것이다.
마침내 이른 곳에는 수레가 서 있었다.
그런 곳에 웬 수레일까 하는 생각도 없이 그녀는 그곳에 올라탔다.
그러자 어디선가 한 사람이 튀어나와 수레를 끌고 달려갔다.
선화 부인은 무슨 일이냐고, 어디로 데려가는 거냐고 소리를 지르지도 않고 오히려 수레에 쌓여있던 물건들 사이로 비집고 들어갔다.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숨기려고 하는 것 같은 행동이었다.
수레가 지나가는 동안 그들은 다른 사람에게 발각되지 않았다.
아침부터 중상을 입은 외지인이 산본의가를 찾았고 그 일이 있을 즈음에는 약방에 불이 나 사람들이 불을 끄기 위해 그곳으로 달려갔기 때문이다.
하나씩 떼어 놓고 보면 우연히 일어난 일인 것 같았지만 이어놓고 생각하면 그렇지 않았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동안 수레는 어느새 산본의가를 유유히 빠져나갔다.
얼마쯤 가다 수레가 멈춘 곳에 마차가 서 있었고 죽립을 쓴 한 남자가 마차에서 내려 수레로 다가갔다.
자기 발로 수레에 올라탔던 선화 부인은 정신을 잃은 것처럼 축 늘어져 있었고 죽립을 쓴 남자는 선화 부인을 안아 마차로 데려갔다.
수레를 끌고 왔던 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대로 수레를 끌고 사라졌고 마침내 마차도 사라졌다.
마차가 사라진 길에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라버니 말이 맞았어.”
“벽 소저가 맞춘 거지. 일단은 계속 쫓아가 보자.”
두 사람의 신형이 거짓말처럼 사라졌고 멀리 서 있던 나뭇가지가 조금씩 흔들리다 떨림을 멈췄다.
벽예월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처음에 생각한 것은 랑랑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아진의 머릿속에는 선화 부인에 대한 생각이 집요하게 들러붙었다.
린린이 신교에서의 일을 마무리하지 못했기에 당장 본가로 돌아가자고 재촉하면 안 될 것 같아서 웬만하면 기다리려고 했는데 갑자기 조급한 생각이 들면서 불안을 떨칠 수가 없었다.
아진이 무슨 근심에 사로잡혀 꽤 불안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린린은 역천마의에게 얘기를 하고 그대로 아진을 따라나섰다.
아진은 자기가 생각하는 걸 말해 주었고 어쩌면 흉수들이 먼저 움직여 선화 부인을 노릴지도 모른다고 했다.
린린은 그 말이 신빙성이 있겠다며 그를 따라왔고 자기들이 돌아왔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은 채 전각 지붕에 앉아 멀찍이서 선화 부인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가모전에서 나온 선화 부인의 움직임이 갑자기 이상해지는 것을 알아차렸다.
멍하니 어딘가에 정신이 사로잡힌 것 같은 선화 부인을 보면서 아진과 린린은 그녀에게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난 것을 깨달았다.
그때부터는 선화 부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고 그녀의 안전이 확인되는 동안에는 최대한 흉수의 본거지를 알아내는 쪽으로 하기로 한 후에 그 뒤를 쫓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추적을 멈춰야 했다.
기척을 숨겼는데도 들켜 버렸던 것이다.
마차가 어두운 숲으로 들어가 달리고 한참이 지나자 계곡이 나왔는데 그곳을 지나 얼마쯤을 더 달리자 몇 사람이 아진과 린린의 앞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곳에서 마차를 미리 기다리던 사람들이 아니었다면 그렇게 허망하게 들키지는 않았을 텐데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본거지를 찾는 일은 포기하고 이제 선화 부인을 안전하게 데리고 돌아가는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하며 두 사람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린린이 마차를 향해 몸을 날리자 몇 사람이 린린을 막으려는 듯 그쪽으로 몸을 틀었다.
그러나 그들은 아진을 상대해야 했다.
가공할 속도로 짓쳐드는 아진의 검이 그들의 가슴팍이며 몸을 스치고 지나가자 피가 솟구쳤다.
그들은 몸을 숨기는 것에는 재능이 뛰어났을지 몰라도 아진의 상대가 될 수 있는 자들은 아니었다.
아진은 시간을 오래 들일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 더욱 서둘렀다.
빨리 그들을 해치우고 린린을 도와 선화 부인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마차 안에 타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없어서 마음이 더욱 급했다.
상대는 어렵지 않았는데 마음이 조급했다는 게 문제였을까.
정신이 마차로 쏠려 있어서였는지 아진은 자신을 향해 연달아 날아오는 비수 세 개를 연달아 놓쳤고 그것이 어깨 밑에 꽂혔다.
“크크크큭. 패혈독이다. 제대로 알고나 죽으라고 알려주는 것이다. 그게 네 몸에 닿은 이상 이제 네 몸과 피가 모두 썩어들어갈 것이다.”
공격을 한 번 성공시켜 놓고 그들은 다 이겼다는 듯이 기고만장해졌다.
그런 이들은 한두 번을 본 것이 아니었다.
아진은 귀찮다는 표정을 감추지 않은 채 비수를 뽑고 손으로 상처를 눌렀다.
그렇게 한다고 패혈독이 퍼진 몸을 낫게 할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겠지만 그들은 아진을 몰랐다.
아진은 이를 악물고 그들의 중앙으로 쇄도해 들어갔다.
검이 허공에 커다란 궤적을 그리며 휘둘러졌다.
그 주위에 돌풍이 생기는 것처럼 대기가 휘말렸고 사람들은 자기들이 무엇 때문에 쓰러지는지도 모른 채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고 쓰러졌다.
검이 닿은 것도 아니고 제대로 어떤 느낌을 받은 것도 아니었는데 어느 순간 몸에서 핏줄기가 솟구쳤고 살갗이 길게 벌어져 검상이 새겨졌다.
죽음은 예정되어 있었고 그들은 이제 그것을 맞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린린이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는 것이 불안해서 아진이 마차를 향해 몸을 날렸을 때 린린이 뒤로 튕겨 나왔다.
마차의 문을 부수면서 삼 장은 되는 거리를 뒤로 날아가 버린 것이다.
판단이 잘못되었다.
린린에게 놈들을 맡으라고 하고 자기가 마차로 가는 건데 그랬다고 생각하면서 아진이 마차로 향하자 그 안에서 죽립을 쓴 남자가 나왔다.
그에게는 선화 부인이 의식을 잃은 채 안겨 있었다.
그것 때문에 린린이 제대로 공격을 하지 못한 듯했다.
“신경 쓰지 마라. 별 중요하지도 않은 침모가 아니냐. 잘 사용하고 시신도 잘 처리할 테니 이대로 돌아가라. 그러면 목숨은 살려 주겠다.”
죽립 쓴 남자의 음산한 목소리를 들으면서 아진은 린린을 바라보았다.
“왜?”
“린린. 저자. 혈교도 아니야? 혈교도면 신교에서 뻗어 나간 거잖아. 그러면 너를 알아봐야 할 것 같은데. 왜 너한테 반말해?”
“오라버니한테 반말한 거거든?”
“아니야. 너를 보고 있잖아.”
“오라버니를 보는 거잖아.”
“아. 그래? 눈이 조금 이상하…… 아. 미안하네. 상처를 건드릴 생각은 없었는데.”
죽립 쓴 남자는 기가 막힌다는 듯이 아진을 노려보았다.
아진은 그가 한 말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고 잠시 후에 선화 부인의 몸이 허공에 떠서 아진에게로 움직였다.
사람을 향해 허공섭물을 사용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죽립 쓴 남자도 그 사실을 알고 선화 부인을 붙잡으려고 몸을 날렸지만 그때마다 그녀의 몸이 자유자재로 이리저리 허공에서 떠오르는 바람에 결국 놓쳐 버렸다.
“린린. 선화 부인을 모셔.”
“응. 그리고 오라버니. 마차에서 내가 졌다고 생각하면 안 돼. 그냥 안이 너무 좁은 것 같아서 밖으로 나온 거야. 알았지? 밖에서 싸우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좁아서 나오는데 그렇게 요란하게 나오냐? 문을 손으로 밀어야지 왜 등으로 부수고 나와. 창피해서 원. 소청이한테 다 말해야지. 네 사고가 어땠는지 알았냐고.”
“아. 진짜. 아니라니까! 소청이한테만 말하지 마. 알았지?”
죽립 쓴 남자는 그들의 간계에 넘어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사실 두 사람은 그를 정신 사납게 하려고 한 게 아니라 서로가 진심으로 한 말이었는데.
소청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은 그들에게 그것은 정말 중요한 얘기였던 것이다.
린린은 선화 부인의 몸을 안전한 곳에 잘 눕혀 놓고 그 옆을 지켰다.
그러면서 싸움을 지켜보다가 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가세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진의 검에서 쏟아진 검기가 죽립 남자의 몸을 강타했다.
그러나 호신강기를 두른 것인지 오히려 검기가 터져 나갔다.
선화 부인을 안전하게 구한 후라서 아진은 이제 급할 것이 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 흉수들의 본거지를 알아차리는 것은 어려워진 것 같으니 차라리 그들의 전력이라도 제대로 알아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마차를 기다리고 서 있던 사람들은 하수였고 그들의 전력은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눈앞의 남자는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 자였고 그가 사용하는 무공을 알아볼 수 있다면 그들의 정체를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지 않을까 했다.
혈교도 사람이고 신교에서 파생된 무공을 쓴다면 자기보다는 린린에게 더 익숙할 테고 린린이 알아보면 된다고 생각했다.
아진은 그 남자가 절기를 모두 드러내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계속 몰아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