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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289화 (289/470)
  • 제289화

    289화

    슈각, 하는 소리를 내며 빠르게 대기를 가르는 도의 소리에 그는 어느덧 자신감을 되찾았다.

    ‘그래. 원래 이렇게 돼야 하는 거야. 건방진 놈들!’

    그럴수록 그를 노려보는 폭천의의 눈빛은 점점 사나워지고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금방이라도 삼장로를 찢어 죽일 것처럼 적개심을 드러내면서도 정작 손을 쓰지는 않았다.

    처음 본 순간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뭐라고 특별히 그 이유를 찾을 수는 없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폭천의에게서 위험한 기운이 느껴졌다.

    이러다가 그를 죽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된다면 영영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초래되겠다고 여기며 삼장로는 도를 던져 버렸다.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는 않아 주먹을 휘둘렀다.

    거친 주먹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폭천의의 고개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 모습을 보니 기분이 조금 풀렸는데 눈이 마주쳤을 때는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뿐이었다.

    도대체 이놈은 어떻게 돼 먹은 놈이기에 이런다는 것인가.

    삼장로는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폭천의에게 밀리는 기분을 느꼈다.

    맞는 것은 폭천의인데 자신이 왜 그러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삼장로가 사람을 아주 잘못 보았소. 삼장로는 폭천의를 건드리면 안 되는 거였소. 우리를 위해서는 잘된 일이지만 말이오.”

    그 일이 일어나는 동안 중재도 하지 않고 별말 없이 있던 혈교주가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동안 보아왔던 모습과 너무나 달라서 사람들은 그자가 자기들이 알던 혈교주가 맞는 건가 할 정도였다.

    “폭천의는 여간해서 싸우고 싶어 하지 않지. 자기가 일단 힘을 쓰기 시작하면 얼마나 위험해지는지 알기 때문이오. 나는 폭천의가 참지 않으면 좋겠던데 고집이 너무 세서 내 말을 듣지도 않지요. 그러니 삼장로에게는 개인적으로 고맙소. 폭천의를 화나게 해 줘서 말이오.”

    삼장로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말에 혈교주를 바라보았다.

    고작 폭천의 따위가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해서였다.

    술법을 익혀 이상한 짓이나 하는 자가 뭘.

    그러던 삼장로의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

    전해진 둔탁한 통증은 주먹이 닿은 면을 넘어 그 주위로 화끈하게 퍼져나갔다.

    단 한 번의 일격.

    팔을 움직이는 것도 알지 못했는데 이미 공격이 끝나 있었다.

    몸이 붕 날아올랐고 고통이 켜켜이 몸에 쌓였다.

    이제 곧 바닥에 처박히겠구나 했지만 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몸이 바닥에 닿기도 전에 폭천의의 다리가 휘둘러졌던 것이다.

    “크아아악!”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그의 비명에 덮여버리고 말았다.

    눈이 튀어나올 것 같은 두려움과 놀라움.

    그 순간에 더 컸던 것은 아픔이었는지, 충격이었는지 그 자신도 알 수가 없었다.

    도무지 말도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희미하게 부서졌다.

    얼굴을 타고 흐르는 게 눈물인지 핏물인지 알 수도 없었다.

    “아. 그것도 미리 얘기해 둘 걸 그랬나요? 폭천의는 안 좋은 버릇이 있는데 그 버릇을 아직 고치질 못했지요. 별것은 아니고, 자기가 죽인 사람을 먹어 버린답니다. 주위가 지저분한 것이 싫은 모양이에요. 자기가 저지른 일은 스스로 처리를 하는 거니까 칭찬해 줘야 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혈교주야말로 미친 자 같았다.

    일이 이렇게 됐으면 폭천의를 말려야 하는 게 아닌가 말이다.

    그러나 오히려 폭천의를 독려하는 것처럼 재미있어하는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당신들은 가만히 보고만 있을 거요? 내가 이렇게 죽으면 다음은 당신들의 차례라는 걸 모르냐는 말이오!!”

    함께 신교에서 도망쳐 혈교에 몸을 의탁한 이들에게 삼장로가 화를 내며 소리쳤다.

    죽음을 목전에 두었으면서도 아직 그렇게 소리 지를 기운이 남아 있다는 것이 신기한 일이었다.

    평소에 삼장로와 뜻을 같이한 이들이 있었지만 그들 중 나서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삼장로의 몸은 한 번 허공에 떠오른 후에 바닥에 내려오지 못하고 있었다.

    내려올 때쯤이 되면 폭천의가 계속해서 다리를 휘둘러 그의 몸을 떠오르게 만들었던 것이다.

    돼지 오줌보를 채워 그걸 가지고 걷어차며 노는 것처럼 재미있는지 얼굴에는 웃음까지 지어졌다.

    주먹과 다리만 사용하는 것도 아니고 예기가 가득한 소도도 들고 수시로 휘둘러 대는지 삼장로의 몸에서는 진득한 핏물이 쉬지도 않고 흐르고 있었다.

    그의 어깨와 옆구리 할 것 없이 곳곳에서 핏줄기가 솟구쳤다.

    “미, 미안하네. 내가 잘못했네. 제발 나를…… 나를 살려 주게……!”

    삼장로는 설마하니 자기가 그런 말을 하게 될 거라고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허공에 떠오른 상태라고 하더라도 삼장로 정도의 무위를 가진 사람이라면 그곳에서 균형을 잡고 반격을 가하는 것이 아주 불가능하기만 한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도저히 손을 쓸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다.

    가공할 압박.

    뭔가 아주 이질적인 힘이 공간을 지배하고 장악하는 것 같은 기분에 삼장로는 살려 달라고 말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뇌기나 자기가 작용하는 공간에 있는 것처럼 그는 시간이 갈수록 혼란에 휩싸였다.

    폭천의가 다시 손을 썼을 때 삼장로는 눈이 튀어나올 것 같은 통증과 함께 제 몸이 찢긴 것을 깨달았다.

    “……!”

    그때는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단순히 통증을 걱정해야 하는 것을 넘어서서 이제는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삼장로와 친분이 있던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무리 그래도 저게 저렇게까지 할 일은 아니지 않냐고 말을 하고 싶었는데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눈이 기괴하게 변해 있는 것을 보고 말았다.

    하려고 했던 말은 전부 다 목구멍으로 기어들어 갔다.

    “말로 할 때 알아들으면 좋잖아요. 사람이니까요.”

    폭천의가 불만스럽다는 듯이 말하며 바닥에 떨어진 삼장로의 시신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혈광이 깃들고 탐욕스러운 표정이 얼굴을 가득 채웠다.

    “용기가 있었으면 신교에서 싸웠어야지. 그러지도 못하고 도망친 주제에 어디에서 왕 노릇을 하려고.”

    폭천의는 분이 쉽게 가라앉지 않는 듯이 계속 중얼거리더니 주위에 있던 사람들을 한 번 바라보고는 삼장로의 몸을 어깨에 걸치고 사라졌다.

    “이제 다른 분들도 확실히 깨달았기를 바라오. 깨닫지 못한다고 해도 그 나름대로 도움이 되기는 할 거요. 한 번 식인을 하고 나면 폭천의의 힘이 강해지는 것 같거든. 폭천의 자신은 그걸 원하지 않는 것 같긴 하지만 말이오. 왜 그러는 건지는 몰라도 아쉽기는 하오. 제 목숨이 줄어들기라도 하는 것인지. 그렇더라도 교를 위해 그 정도 희생도 못 한다는 것인지.”

    혈교주는 재미있는 얘기를 한 것처럼 웃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있던 이들 중 그를 따라 웃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멍청히들 있지 말고 뇌동에 갇힌 자들에게 가 보시오. 발각되기 전에 교체하려면 서둘러야 할 테니. 교체될 자들은 아끼지 마시오. 그들이 최대한 중원을 많이 흔들어 대야 하니 본교의 가장 수준 높은 고수들을 우선해서 사용하시오.”

    혈교주는 다시 평상시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듯했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있었던 일을 잊으려고 애썼지만 충격적인 모습이 워낙 강하게 남아서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 * *

    “랑랑. 이제부터는 흑주를 항상 가지고 있어. 흑주만 가지고 있으면 나쁜 사람들이 와도 안심할 수 있을 거야.”

    “응. 오라버니.”

    랑랑도 분위기를 알고 있었다.

    겁을 먹을 수도 있었지만 그래도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지 확실히 아는 게 좋다고 해서 소청이 작금의 상황을 정확하게 알려 주었던 것이다.

    “산본의가는 안전하겠지. 오라버니?”

    “그럼. 당연하지.”

    랑랑의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했지만 계속해서 그 옆을 지키고 있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소청에게 랑랑을 맡겼던 사람들조차 소청에게 다른 일을 다시 부탁하기 일쑤였다.

    그때마다 소청은 여러 명의 무인에게 랑랑을 맡기고 임무를 수행하고 최대한 빨리 자리로 돌아왔다.

    소청은 시간이 날 때마다 벽예월을 찾아갔고 이 일이 어떻게 될 것 같은지 물었다.

    벽예월은 천기를 보며 대비하고 싶어 했지만 쉽지 않았다.

    흉한 일이 일어날 거라는 것은 알 수 있었지만 그것이 언제 어디에서 누구에게 일어날 일인지는 알 수가 없어서 미리 방비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된 바에는 그런 일을 당하게 될 사람들이 자기들과는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난을 피하지는 못할 거야.”

    “다시 그런 일이 생긴 것 같아요. 사도련이 충독을 가지고 세상을 혼란하게 하던 일요.”

    “그래도 지금은 그때보다 상황이 많이 낫잖아. 이미 한 번 이겨 보기도 했고. 그러니까 힘을 내고 믿어 보자, 소청아.”

    할 수 있는 말은 그 정도였다.

    사람들은 모일 때마다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에 대해 얘기했다.

    서로를 어떻게 알아볼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얘기하고 부지런히 방법을 강구했던 것이다.

    제선문주는 새로운 약제를 만드는 일에 박차를 가했고 거기에서도 곧 진전이 보일 것 같았다.

    그때까지만 버티면서 기다리면 이 어두운 구름은 산본의가에 그늘을 만들지 못하고 완전히 지나갈 거라고 생각하며 사람들은 희망을 품었다.

    “어서 가 봐, 소청아.”

    벽예월은 소청을 재촉하며 돌려보냈다.

    비교적 자세하게 보였던 천기.

    천살성의 곁에 있던 별 하나가 빛을 잃었다.

    빛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눈에 띄게 희미해진 것은 사실이었다.

    아진이나 린린은 확실히 아니었다.

    벽예월은 그 별이 랑랑일 거라고 생각했고 흉수들이 랑랑을 노리는 거라고 믿었다.

    그 이야기는 이미 아진과 린린에게도 말을 했다.

    가주와 가모, 도종과 북리소은에게도 말을 하고 싶었지만 그들에게는 결국 말을 하지 못했다.

    랑랑이 관계되면 그들이 크게 평정심을 잃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래도 제 생각대로 쉽게 판단을 내리기는 어려워서 아진에게 먼저 이야기를 해 봤는데 아진 역시 그러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했다.

    랑랑에 대한 호위를 한층 강화하고 물샐 틈 없이 경계하면 이 일도 무사히 지낼 수 있을 거라는 아진의 말에 벽예월도 그 말을 믿어 보기로 했다.

    주위에는 전에 없던 긴장감이 감돌았다.

    도대체 어떤 자들이기에 사람들의 일상을 이렇게 송두리째 뒤흔들 수 있다는 것인가 하며 벽예월은 깊어지는 한숨을 멈추지 못했다.

    * * *

    “역시 선화부인의 자수는 따라가지 못하겠어요.”

    가모가 한숨을 쉬며 자기가 들고 있던 자수 꾸러미를 슬그머니 내려놓았다.

    “아니에요. 가모님. 저야 미천한 재주일 뿐인 걸요. 가모님이 하시는 일에 비하면 제가 하는 자수며 바느질은 정말 별 볼 일 없어요.”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황상께서도 부인의 자수를 정말 좋아하셨잖아요.”

    두 사람은 서로 주거니 받거니 이야기를 하다가 어느덧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얘기로 돌아갔다.

    “이 일이 빨리 어떻게든 해결이 돼야 할 텐데 말이죠, 가모님. 정작 본가는 걱정이 되지 않는데 다른 사람들은 큰 피해를 볼 것 같아서 걱정이에요.”

    “그러게 말이에요. 나도 그 점이 걱정돼요.”

    선화 부인은 가모와 이야기를 하다가 의방에 가져다주기로 한 게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급히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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