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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288화 (288/470)

제288화

288화

때마침 역천마의가 마두들과 함께 돌아오지 않았다면 그들은 한참을 더 떠들어댔을 터였다.

“…….”

“주군이라고 부르거라.”

뇌혈검과 다른 이들이 뭐라고 말을 할지 모르겠는 듯 서 있자 역천마의가 그들에게 말했다.

그들은 놀란 얼굴로 역천마의를 바라보았다.

데려오기는 했지만 무슨 일인지는 말을 하지 않은 듯했다.

그래도 안에 들어와서 린린의 모습을 보고 놀란 기색은 아니었는데 린린이 일부러 기척을 숨기지 않았고 그들도 미리 린린의 기척을 알아채서 그랬을 터였다.

“다시 말하겠다. 나는 천마신교의 새로운 교주가 될 것이다. 패월악이 아닌, 서이린으로 말이다.”

“……!”

마두들의 얼굴에 놀라움이 한층 더 커졌다.

그러나 그 안에 깃든 진짜 감정은 감격이었다.

그 자리에서 린린을 주군이라고 부르는 것을 망설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것을 역천마의에 대한 배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없는 듯했다.

“이건 신교를 위해서도, 이 나라를 위해서도 꼭 필요한 일이다.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역천마의의 힘이 꼭 필요해서다.”

그리고 린린은 그때부터 역천마의가 해야 할 일을 알려 주었다.

“역천마의. 추살접을 만들어라. 술법을 행하기 위해 그자들도 만만치 않은 재료를 소모해야 할 것이다. 구하기도 힘들고 구하려고 하면 돈도 많이 들어가는 재료들이겠지. 그런 걸 사용해서 술법을 행하려면 효과를 먼저 생각할 수밖에 없을 거야.”

“혈마 수라대의 조장급 정도로 말이지요.”

섬마대주가 말하자 린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장급 이상으로 추린다면 추살접을 얼마나 만들어야 할지 알 것이다.”

“그 사람들 각자를 끝까지 쫓아가는 추살접을 만들라는 말씀이신지요. 주군?”

역천마의는 물으면서 동시에 답을 찾은 듯했다.

복잡하기는 하지만 불가능하지는 않을 일이었다.

많은 인원이 동원되겠지만 비교적 간단한 일이었다.

“추살접이 따라붙지 않은 사람은 처음부터 이 일의 목표가 되지도 않을 거고 대법의 효과도 미미할 것이다.”

평범한 집안의 아이.

그 아이가 다른 아이로 바꿔치기가 되고 그 아이가 소란을 부린다고 해도 그것은 결코 혈마 수라대의 괴멸과 같은 결과를 초래하지는 못할 것이다.

단리서언이 황금을 위조했을 때 값비싼 비용을 지불했던 것처럼 이번 대법도 마찬가지이고 목표를 찾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면 외부에서 다른 목표를 탐색할 수밖에 없을 터였다.

그것은 그들을 쫓던 맹수를 다른 곳으로 쫓아내는 방법으로 임시방편이 되겠지만 일단 그렇게 해서 숨을 돌릴 수 있다면 거기에서부터 흉수의 무리를 찾아내서 괴멸할 방법을 찾아낼 수도 있을 터였다.

“이 일은 미룰 것이 아니다. 역천마의가 전사들을 소집하고 권력의 이양을 발표하여라. 그리고 추살접을 만드는 일을 시작해라.”

린린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곳에 있던 이들의 얼굴에는 벅찬 감격이 서렸다.

그러나 그것도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이제부터 진짜 전쟁이 시작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들이 나가고 다시 자리에는 아진과 린린만이 남았다.

“잘했다. 내 동생. 긴장되지는 않지?”

“긴장돼.”

린린이 심호흡을 하고 두 볼에 바람을 가득 집어넣은 채 말했다.

귀엽게 보이려고 일부러 그런 건 아닐 테고 정말 긴장이 돼서 그런 것 같았지만 아진은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웠다.

그러면서 정말 만두 같다고 생각하며 손가락으로 볼을 꾹 눌러 바람을 빼놓았다.

속이 후련하고, 자기가 꼭 해야 할 일을 마친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아졌다.

역천마의는 놀라운 방식으로 그 일을 해내 버렸다.

신교내의 가장 커다란 광장에 전사들을 소집하고 그들에게 엄청난 소식을 전했다.

교주의 자리를 포기하고 그것을 서이린에게 이양할 거라는 내용이었는데 사람들이 충격의 도가니에 빠질 틈도 없이 그다음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다음에 나온 이야기는 타당하고 현재 상황에서 문제를 타개하는데 가장 적합해 보였다.

아무리 그래도 그 전에 나왔던 이양 문제 역시 쉽게 생각하고 넘어갈 일이 아닌 것 같았는데 역천마의는 거기에 대해서 더 이상 거론도 하지 않았다.

조장급 이상을 모으자 그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조직적인 거센 저항이 나올 법도 했는데 지금은 그것보다 추살접에게 자신들을 인식시키는 게 더 중요하다는 것을 모두 알았기에 그러지도 못했다.

그건 말도 안 된다며 반항을 할 황금 같은 시간이 속절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당장 추살접에게 각인을 시키지 않으면 자기들도 흉수에게 납치를 당해서 어떤 식으로 일을 당할지 모르는 것이라 어어어, 하고 당황한 소리를 내기만 할 뿐 누구 하나 제대로 된 반응을 보이지 못했다.

역천마의는 더 이상 자신을 교주라고 부르지도 못하게 했고 과거에 자신이 훈련한 사람들을 불러내 추살접을 키워 내게 했다.

일이 얼마나 긴박하게 흘러가는지는 다른 사람의 눈에도 확실하게 보였기에 처음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던 이들도 대부분, 이내 상황을 받아들였다.

역천마의가 교주가 되기 전에는 많은 사람의 마음이 린린을 향하지 않았던가.

신교의 위기 상황에서 다시 돌아와 교주가 되겠다는데 막을 이유는 없었다.

그리고 어차피 막는다는 것이 불가능한 것 같기도 했다.

마신의 특별한 비호를 받는 교주를 자기들이 무슨 권리로 거절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역천마의를 제외하고 권력의 정점에 서 있던 자들은 혹시라도 자기들에게 기회가 올 수 있지 않을까 하면서 기대를 했던 만큼 그 상황이 실망스러웠다.

혈마 수라대가 괴멸된 것처럼 그 정도의 사건이 몇 번 더 일어나면 교주가 책임질 상황에 이르게 될 것이고 그때는 기회가 생길 거라고 여겼는데 눈앞에서 돌풍이 휙 지나가는 것처럼 교주가 바뀌어 버렸던 것이다.

새로운 교주로 추대된 이가 서이린이 아니었다면 애초에 그런 이양은 상상도 할 수 없고 받아들여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강자존의 법칙이 절대적인 힘을 발휘하는 신교에서, 서이린이 신교에 돌아오기만 한다면 그녀 외에 그 자리에 더 적합한 사람은 없었다.

떠들썩한 분위기 속에서도 질서만큼은 유지한 채 추살접을 만드는 과정이 한창 진행될 때 광장 연단에 한 사람이 올라섰다.

린린이었다.

그 사실을 알아차린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그다음에 이어진 사자후로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집중되었다.

“나는 너희의 교주, 서이린이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일제히 깨달았다.

패월악이 돌아온 것이 아니라 서이린이 새로운 마교천하의 주인이 되었다는 것을.

* * *

사람마다 그 일에 대해 말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실종된 사람이 다시 돌아오면 그 사람의 주변이 피바다가 되고 그가 속해 있던 작은 세계가 괴멸한다는 이야기.

몰랐을 때는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이미 알게 된 후에는 거기에 대한 대비책을 찾았다.

천마신교는 천마신교대로, 정의맹은 정의맹대로, 황실은 황실대로.

그럴수록 위축되는 것은 혈교도들이었고 그들은 어쩌다가 일이 이 지경으로 치달았는가 하면서도 그 안에서 다시 대책을 논의했다.

“너무 성급했소. 아직은 모든 게 준비되지 않았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도대체 언제까지 그런 소리를 할 거라는 말이냐. 네놈은 오십 년 뒤에도 똑같은 소리를 할 것이다. 내가 장담한다.”

“삼장로님. 이건 서두른다고 될 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번 일만 봐도 그렇습니다. 조금만 더 신중했다면 두 기(基)가 그렇게 일찍 발각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혈마 수라대만 괴멸시키고 끝날 일이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역천마의까지도 노릴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삼장로는 혀를 차더니 폭천의를 노려보았다.

“네놈이 재주가 모자라서 실패한 일을 가지고 나를 끌어들이려고 하는구나.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이냐. 내 잘못이라고 우겨서 나를 몰아내고 싶은 것이냐. 처음부터 내가 여기에 온 것을 꽤 마음에 들어 하지 않더니. 이놈. 그러고 보니 일을 이렇게 만들려고 일부러 실수한 것이 아니냐. 네놈이라면 그리 하기도 어렵지는 않을 터.”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저라고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저희끼리만 있는 동안에는 일이 이리된 적이 없었는데 교주가 바뀌면서 몇몇 분이 이리로 들어오고 그때부터 자꾸 정보가 새어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드니 말입니다.”

“뭐라. 그러면 네놈은 우리가 간자라도 된다는 말이냐!”

삼장로는 폭천의의 말을 듣고 그냥 참지만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자기들을 향한 사람들의 시선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직접 그런 말까지 들은 이상 넘어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곳 혈교에 들어와서 각자가 고위직을 차지하고 대부분 삼장로회나 원로회의 일원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천마신교에서 누리던 높은 지위 때문이었는데 단순히 그곳에서 지위가 높았다는 것이 혈교에서 높은 지위를 보장해야 하는 이유가 되냐는 반발이 거셌다.

그런데도 혈교주는 새로 들어온 이들에게 선심을 크게 썼고 구성원들 간에 사사건건 반복해 오던 것이 급기야 터져버린 것이다.

삼장로는 폭천의를 향해 곧바로 도를 휘둘렀다.

콰콰콰쾅-.

거대한 폭음이 울려 퍼지면서 폭천의의 몸이 날아갔지만 그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삼장로는 그로 인해 자신의 꼴만 더 우스워졌다고 생각했다.

화가 난다고 해도 지금 상황에서 자기가 폭천의에게 할 수 있는 실력 행사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 일을 주도하는 사람이 폭천의인데 제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죽일 수는 없었던 것이다.

폭천의도 그것을 알고 있는 듯했고 무심한 눈으로 혈교주를 바라보았다.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자기도 이번에는 그냥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이 단호한 시선이었다.

혈교주는 우유부단한 자였고 그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리고 모순적이게도 그 이유로 그의 주위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혈교주가 궂은일을 다 하고 어느 정도 조직을 정상화해 놓으면 자기들이 조직을 장악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았던 것이다.

어찌하시겠습니까.

폭천의의 눈이 혈교주에게 그렇게 묻고 있는 사이에 삼장로는 다시 한번 도를 휘둘렀다.

이러면 안 된다고 깨닫는 것과 별개로 너무 화가 나서 몸이 제어되지 않았던 것이다.

살면서 이런 수모는 한두 번 겪는 것으로 족하다.

잊을 만하면 또 당하고, 또 당하고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더군다나 아무것도 아닌 놈까지 기어오르는 것은 그냥 봐줄 수가 없었다.

조금 전보다 훨씬 더 큰 폭음이 터지고 폭천의의 몸이 뒤로 몇 장이나 밀려나면서 그의 입에서 진한 핏물이 터져 나왔다.

흡사 그의 앞에 붉은 안개가 퍼지는 것 같았다.

착지도 좋지 않아서 폭천의는 볼썽사납게 구석에 처박혔다.

사람마다 이것만은 참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다른 법인데 폭천의는 남들의 앞에서 그런 식의 폭력에 무너지는 것을 보이는 걸 참지 못했다.

그것은 누구라도 마찬가지이겠지만 폭천의는 특히나 거기에 더 민감했고 참지 않기로 했을 때 할 수 있는 일도 있었다.

폭천의가 삼장로를 노려보자 삼장로는 저도 모르게 움찔했고 그것 때문에 더 화가 났다.

자기가 움찔한 것을 사람들이 봤을 거라는 생각 때문에 기분이 나빠져서 그는 더욱 잔인하게 도를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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